소설리스트

화산파 공녀님 (57)화 (57/123)

#57.

“솔직히 저 좋아하시지도 않잖아요?”

샬롯의 질문을 들으며 리카르도는 다시 한번 상기했다.

샤를로테 세티야가 얼마나 멍청한 여자아이였던가를.

도대체 왜 세티야 가에서 샤를로테가 그토록 대접받지 못한 존재였던가를.

이렇게 주는 기회도 받아먹지 못할 정도로 멍청해서, 세티야 가의 직계인 주제에 고작 요제프 황자와 함께 다니질 않았던가.

“……헛소리하지 말고, 똑바로 다시 잘 생각하고 대답해. 아니, 멍청한 너와 이야기한 내가 바보지.”

샬롯은 갑자기 저를 을러대는 리카르도를 이상한 눈으로 보았다.

귀가 갑자기 시뻘게져서는 열을 올려 대는 모습은, 정말 이상하기 짝이 없었다.

그녀는 혹시라도 리카르도가 제롬이나 카밀라에게 이 이상한 제안을 넣을까 봐, 슬쩍 다른 핑계를 덧붙였다.

“전 이미 점찍어 둔 약혼자가 따로 있으니까, 그런 말씀 하셔도 소용없을 거예요.”

“……점찍어 둔 사람이?”

그래, 또 그렇다면 이야기가 다르지.

리카르도는 머리끝까지 솟구쳐 올랐던 화를 간신히 가라앉혔다.

만약 이미 내정된 약혼자가 있는 거라면, 아무리 그의 신분이 대단하다 한들 당장 약혼을 권할 수 없긴 했다.

그런 가능성을 상상조차 못 했다.

귀족가의 아이들은 어릴 때부터 약혼 상대를 내정하기도 했지만, 상대는 그렇게 썩 좋지 못한 평을 달고 사는 샤를로테였으니까.

리카르도 황자는 간신히 회복한 평정을 유지한 채로 샤를로테에게 물었다.

“그래서, 그 사람이 누구지?”

샬롯은 싱긋 웃었다.

“아…… 저희 아빠가 저번부터 자꾸 저보고 요제프 황자님과 약혼하라고 하시던데. 저도 생각이 좀 있고요.”

이건, 사실이기도 했지만, 거짓이기도 했다.

그냥 ‘자꾸 울면 드래곤이 와서 이놈 한다.’ 같은 말이었다.

가진 권력도, 뒷배도 없는 데다, 황제의 눈 밖에 나 있는 요제프 황자와 약혼하고 싶은 귀족 영애가 있을 리 없었으니까. 그냥 말 안 듣는 철없는 딸을 으르기 위해 한 말에 불과했다.

하지만 실제로 요제프와 약혼할 일은 없더라도 제롬이 이미 한 이야기니, 하지 않은 이야기라고 할 수도 없을 거다.

리카르도는 샬롯의 말도 안 되는 거짓말에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오늘따라, 벌레만도 못한 녀석이 지나치게 자꾸만 거슬렸다.

샬롯이 돌아왔을 때, 그사이 방 안의 구성원은 꽤 많이 바뀌어 있었다.

3조에서 예선전에 통과한 아이들이 몇몇 도착해 있었는데도 인원이 퍽 줄어들어 있는 걸 보면, 대진표의 순서상 앞서 준비를 하러 가야 하는 참가자들은 빠져나간 모양이었다.

다행히도 요제프는 아직 순서가 되지 않았는지 원래 있던 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설마 내가 가만히 있으랬다고, 진짜 가만히 있었던 건 아니겠지?’

샬롯은 어쩐지 요제프가 충견 같다고 생각하며 그가 올라앉아 있는 높은 의자에 훌쩍 올라가 나란히 앉았다. 그러고 요제프의 보드라운 까만 머리를 살살 쓰다듬어 주었다.

‘아. 정화된다, 정화돼.’

처음엔 그렇게 질색을 하더니, 이제는 이렇게 머리를 만져 줘도 그냥 한숨이나 몇 번 쉴 뿐 손을 쳐내진 않게 되었다.

샬롯이 만족스러운 얼굴로 한참 동안 그의 머리를 만지면서 정신 나간 리카르도와 대화하며 지친 마음을 달래는데, 요제프가 그녀를 돌아보며 문득 물었다.

“뭐였어?”

“아…… 2황자님?”

“그래.”

샬롯은 빙긋 웃어 보였다.

“이 누님이 걱정됐어? 아이, 진짜 너무 귀엽다니까.”

그나마 이렇게 귀여운데 확 끌어안지 않은 것만 해도, 샬롯으로서는 충분히 남의 시선을 신경 쓴 거였다.

뭐가 그렇게 신났는지 발까지 파닥거리는 그녀를 요제프는 빤히 바라보다가, 다시 한번 물었다.

“……뭐였냐고.”

샬롯은 그 나직한 질문에 조금 놀랐다.

평소 같았으면 샬롯이 누님 어쩌고 하면 그냥 고개를 젓고 거기서 대화를 끝내 버리곤 했던 요제프였으니까.

‘리카르도의 일이 신경이 쓰이긴 한 모양이지…… 진짜, 착해.’

샬롯은 어디까지 밝힐까 잠깐 고민하다가 그냥 순순하게 털어놓았다.

“약혼하자고 하던데.”

“……뭐?”

요제프가 인상을 팍 찌푸리며 되물었다. 워낙 표정이 없는 편인 요제프였기 때문에, 샬롯은 그가 그렇게까지 불유쾌하다는 얼굴을 하는 것을 처음 보았다.

만지면 보들보들했던 미간은 세로로 주름이 파였고, 선명하고 잘생긴 검은 눈썹은 잔뜩 꺾였으며, 붉고 귀여운 입술은 짜증으로 앙다물어졌다.

‘이건 이것대로 귀엽긴 한데……’

하지만 요제프는 당장 오늘 리카르도와 직접 대진이 짜여져 있었다.

그런데 쓸데없이 감정이 상해 있었다간, 눈앞에 리카르도가 있을 때 감정 때문에 일을 그르칠 위험도 있었다.

‘뭐…… 요제프라면 그럴 리가 없긴 하지만.’

혹시 모를 일이니, 샬롯은 얼른 요제프를 달랬다.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어. 정말 왜 그런 말을 들었는지 하나도 모르겠고, 가문끼리 오간 이야기도 없는걸? 분명하게 딱 잘라서 거절했어.”

“……하, 정말…… 어이가 없군. 그 외엔? 무슨 짓을 한 건 아니야?”

“아무 일도 없었어. 금방 왔잖아.”

“그놈이 그렇게 순순히 물러갈 놈이라고?”

요제프가 밤하늘을 닮은 새까만 눈으로 샬롯을 추궁했다.

샬롯은 피식 웃으며 다시 한번 요제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네 핑계를 대니까, 그냥 가던데? 너랑 약혼해야 된다고 했어. 재밌지?”

‘뭐, 좀 더 정확히는…… 대회가 끝나고 요제프가 어떤 꼴이 되어 있는지 본 다음 다시 대답을 듣겠다면서 간 거지만.’

그 말에 계속 추궁할 듯하던 요제프는 눈을 빠르게 깜박이며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샬롯은 요제프가 제 말을 못 알아들은 게 틀림없다고 생각하며 친절하게 해설을 덧붙여 주었다.

“그냥, 핑계 삼은 거야. 걱정하지 마. 내가 다 알아서 한다니까?”

“……핑계라.”

요제프는 그 말이 마치 목에 걸린 사람처럼, 그 뒤로 입을 꾹 다물어 버렸다.

샬롯은 유일한 말동무인 요제프가 뭔지 모를 생각에 전념해 있자 순식간에 심심해져서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자연스럽게 벽에 커다랗게 붙어 있는 대진표에 눈이 갔다.

곧, 아이작과 1황자의 대진이 있었고…… 그리고 2황자와 3황자의 대진도 그리 멀지 않았다.

요제프의 대진보다는 제가 란슬롯과 상대하는 대진이 순서상으로 우선이었지만 제 대진표를 확인하는 것보다, 어쩐지 요제프의 대진표를 보는 게 더 심장이 떨리는 기분이었다.

‘……아!’

문득 그 대진표를 바라보고 있는 사이에, 샬롯은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그녀는 줄곧 요제프에 대한 사람들의 평가를 바꿔 놓을 기회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다.

요제프의 실력이야 이번 대회를 통해 보여 줄 수 있을 테고 평판도 바꿔 놓을 수 있을 거다.

그런데, 그것만으로 충분할까?

2황자 리카르도를 지지하는 세력이 그렇게 공고한데.

여론을 끌어올 필요가 있었다.

그녀는 리카르도 황자의 인성이 얼마나 쓰레기인지 알고 있었지만, 대부분의 국민은 모른다. 본의 아니게 방금 막 리카르도 황자가 얼마나 제멋대로인지 알게 된 뒤로, 이걸 좀 더 다른 사람들의 앞에 선보일 기회가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 거다.

게다가 마침맞게 이 나라에서 가장 많은 인구가 한 장소에 모이는 절호의 기회가 지금 진행되고 있질 않은가?

‘게다가 대회 중이라면, 리카르도 황자를 약삭빠르게 조종하는 황후의 입김이 미칠 수도 없을 거야.’

보여 줄 것이 있다면, 지금 보여 주어야 했다.

그것도 노골적으로 리카르도에 대해 직접 폭로하는 것이 아니라, 리카르도 그 자신이 제 약점을 스스로 드러낼 수 있도록 할 방법이 떠올랐다.

샬롯은 얼른 다시 요제프의 앞으로 몸을 돌렸다.

“요제프. 그보다, 나 생각해 둔 게 있는데 좀 들어 봐.”

“응.”

“리카르도 황자랑 좀 이따가 붙을 예정이잖아. 끝내기를 시도할 때, 혹시 그렇게 해 줄 수 있어?”

“……뭘?”

“리카르도 황자에게 항복하기 딱 애매한 정도의 간격을 허용해 줄 수 있어? 내가 방금 가서 보면서 느꼈는데, 워낙 다혈질이라 좀 이용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전혀 다른 화제가 된 대화에 따라오지 못하는 건지, 아직 다른 생각에 잠겨 있는 건지 요제프는 한참 동안 침묵하며 눈만 깜박이다가 겨우 느리게 대답했다.

“……그러니까, 리카르도 그놈이랑 싸울 때, 그가 무기를 떨어트리거나 그의 목에 검날을 대더라도 약간의 여지를 주란 말인가?”

샬롯은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요제프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리카르도 황자는, 제 목에 진짜 검날이 닿지 않는 이상, 내게 패배를 인정할 리 없는 사람인데. 그렇게 하면 절대 인정하지 않을걸.”

그녀가 방긋 웃어 보였다.

“응. 내 생각에도 그래.”

“……알겠어. 그럴게.”

요제프는 잠깐 생각하는 얼굴을 하더니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끝이었다. 요제프는 샬롯이 그런 요구를 한 이유도 묻지 않았다.

샬롯은 구구절절 이유를 설명할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어차피 그렇게 어려운 주문도 아니었다.

리카르도 황자도 제법 뛰어난 검사임은 분명하였고, 체격이 워낙 좋아서 할버드를 휘두르기 때문에 잘못 맞기만 해도 위험해질 것도 맞았지만…….

샬롯에겐 확신이 있었다.

귀엽디귀여운 요제프가, 확실히 승기를 잡을 수 있을 거라는.

그녀는 눈을 가늘게 뜨고 머릿속으로 다음 수를 계산했다.

마치 장기를 두는 기분이었다.

천천히 한 수, 한 수를 둬서 상대의 졸부터 야금야금 잡아먹은 다음, 왕이 도망칠 곳을 모조리 막고서야 선포하는 거다. 피할 곳이 없는 외통수라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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