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
리카르도가 문간에 서서 안쪽을 바라보고만 있자, 그에게 묵례를 해 오는 수많은 이들 사이에서 샬롯이 러슬의 품에서 내려서더니 작게 묵례하곤 그에게 다가와 섰다.
황자의 앞에서도 조금도 긴장하는 기색 없는 풀색 눈동자로, 샬롯은 여상하게 물었다.
“절 찾아오신 건가요?”
리카르도는 저를 올려다보는 조그마한 소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분명 여기까지 찾아올 때만 해도, 정말이지 어마마마가 말도 안 되는 일을 제게 분부했다 여겼건만.
막상 샬롯을 눈앞에 두니까 마음이 또 달라졌다.
볼품도 없는 데다, 실력도 재능도 없고, 가문에서까지 무시당하는 계집이라고 생각할 때는 정말로 하찮아 보이기만 했는데.
리카르도가 눈썹을 밀어 올리며 고개를 끄덕이곤 바깥을 가리켰다.
러슬이 주제넘게 좀 당황한 눈으로 바라보는 시선을 알아차렸지만, 리카르도는 그런 것을 신경도 쓰지 않고 몸을 돌렸다. 언제부터 샬롯이 그리 대단한 인물이었다고, 제 사람이나 다름없는 세티야 가 사람 주제에 저를 그런 눈으로 보는지 모를 일이다.
“샬롯…….”
“금방 다녀올게요. 뭐 좀 받을 게 있어서요.”
샤를로테는 슬쩍 러슬을 돌아보곤 괜찮다는 뜻으로 윙크를 해 주고, 요제프에게 괜히 따라오지 말란 뜻으로 손을 들어 보이고서야 2황자의 뒤를 따라나섰다.
탁.
리카르도와 샤를로테가 나란히 사라지고 나자, 참가자들 사이에서 또 한 번의 술렁임이 지나갔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 고압적이고 사람을 턱끝으로 부리길 좋아하는 리카르도가 직접 제 발로 걸어서 누군가를 찾아왔다?
게다가 두 번째였다.
예선전이 시작되기 전에도 분명 샬롯과 리카르도가 함께 별실로 사라지는 것을 본 이들이 있었다.
‘어머어머, 대체 뭐야. 두 번째야, 이게!’
‘근데 샬롯은 관심도 없는데 리카르도 황자님이 쫓아다니는 것 같지 않았어?’
‘그게 말이나 돼? 내가 볼 땐 그냥……’
‘그냥, 뭐? 그게 아니면 둘이 무슨 볼일이 있겠어? 그리고 리카르도 황자님이 직접 찾아오신 거잖아? 안 그래?’
참가자들의 시선은 일제히 요제프에게로 쏠렸다.
그 어떤 기대조차 받지 못하고 있는 요제프는 고요하게 앉아 문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언제나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그저 존재할 뿐인 3황자치고, 오늘따라 그의 시선에서 묘하게 분노 같은 게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누가 보면 삼각관계라도 되는 줄 알겠다.’
‘얘, 입조심해.’
마치 재밌는 농담이라도 들었다는 듯 까르르 웃는 아이들 사이에, 요제프는 그저 그대로 앉아 눈을 내리감아 버렸다.
그의 손아귀에 꽉 쥐어진 검집이 파르르 떨렸다.
방을 옮긴 샬롯은 리카르도를 쏘아보듯 바라보았다.
생긴 것만 번듯한, 정신병자 2황자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비어 있는 대기실에 들어선 뒤로 말이 없었다.
‘무슨 생각이지?’
이 마음에 드는 구석이라곤 눈곱만치도 없는 2황자가 정말로 예선이 끝났다고 즉각 제게 목걸이를 주러 오리라곤 생각해 보지 않았다.
그래서 남들 다 보는 곳에서 달라고 요구할 생각이었는데, 왜 둘만 보자고 하는지 좀 의심스러웠다.
그럼에도 또 저를 보러 올 다른 용무 같은 건 아무리 머리를 굴려 봐도 생각나지 않았으니 순순히 따라온 거다.
도대체 뭔가 싶어서.
하지만 샬롯이 그리 길지 않은 제 팔을 구겨 팔짱을 끼고 한참을 기다려도, 도대체 리카르도는 먼저 말을 꺼낼 기색이 없었다.
어쩔 도리 없이 그녀는 먼저 입을 열었다.
“제가 예선을 통과한 게 만족스러우셨나 봐요? 이렇게 손수 저를 보러 와 주신 걸 보면.”
“어? 그래.”
“그럼 약속대로 그 목걸이를 제게 주시려고 오신 거예요?”
목걸이?
리카르도는 애초에 샤를로테와 했던 내기에서 제가 질 거라고는 생각조차 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한참 미간을 찌푸리고 기억을 떠올리고서야 겨우 그런 조건이 있었음을 기억해 냈다.
‘아…… 그런 내기를 했었지.’
솔직히 샬롯과 내기에서 져서 뭔가를 준다는 것 자체가 일단 고까운 일이었다.
원래대로라면 절대 뭘 주고 그럴 생각 따위는 없었지만, 지금은 그딴 걸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그것도 전대 황제인 할마마마께서 남기신 유품 중 하나라 들었지만…… 뭐, 제가 알 바는 아니었다.
애초에 리카르도는 워낙 풍요 속에서 살아왔기 때문에 어떤 물건도 귀하다는 생각을 별로 해 본 적이 없었다.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붉은 펜던트의 목걸이를 벗어 내밀었다.
“자.”
게다가 현재 리카르도의 머릿속은 어마마마께서 분부하신 일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에, 샬롯이 온 얼굴이 환해지며 그 별것도 아닌 목걸이를 받아 드는 것에는 깊게 신경을 쓸 새가 없었다.
“감사합니다. 그럼, 전 이만 가 보아도 괜찮을까요?”
샬롯이 밝게 생글생글 웃으며 금방이라도 물러날 기세로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이는 것을 보고, 리카르도는 얼른 손을 저었다.
“아니, 할 말이 있다.”
“네? 제게요?”
“그래.”
샤를로테는 리카르도의 행동이 묘하다고 생각하며 그 자리에서 멈춰 섰다.
아까 예선 전 대기실 옆방에서 이야기를 나눴을 때, 피차 할 얘기는 다 한 거라 생각했다.
어쨌든 리카르도는 요제프 황자가 조금이라도 숨을 쉴 수 있게 된 게 못마땅해서 저에게 접근한 거였고, 그 빌미라는 게 고작 예선을 통과할 수 있게 해 주겠다는 거였다.
이미 예선은 다 지나갔고, 예선의 결과에 대한 내기까지 모두 정산이 끝났다.
그런데 2황자가 제게 할 말이 뭐가 있을까?
‘또 뭐……? 이번엔 대회 우승이라도 하게 해 주겠다고 하려고?’
샬롯은 고개를 갸웃 기울이며 리카르도가 말을 하길 기다렸지만, 그는 갑자기 입이 붙은 사람처럼 눈만 깜박이며 그녀를 쏘아보았다.
손가락으로 제 허벅지를 톡톡 두드리고, 입에 든 것도 없는데 이를 딱딱 두드리는 폼이…….
‘……뭐야, 아깐 날 협박까지 하더니 이젠 왜 저래?’
착각이 아니라면, 저에게 마치 뭔가 말하길 머뭇거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샤를로테 세티야.”
한참이 지나서 겨우 입을 뗀 리카르도는 다시 한번 제 앞에 서 있는 소녀의 이름을 불렀다.
“왜요?”
리카르도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제 말을 기다리는 샬롯 앞에서 쉽사리 입을 못 여는 자신에게 짜증이 났다.
솔직히 뭐라고 말을 해야 좋을지 알 수 없어서 그랬다.
‘카밀라 가주가 널 몰래 키운 거야?’
이렇게 대놓고 물어볼 수도 없었고,
‘실력이 제법 대단하더군. 요제프 황자에게서 배웠나?’
이렇게 물어보기엔 또 짜증이 솟구쳤으며,
‘솔직하게, 다 털어놔. 뭘, 어떻게 했기에 이렇게 검술을 대단하게 쓰는 거지?’
어마마마의 조언대로 칭찬을 해 주자니, 또 배알이 뒤틀렸다. 살면서 누구에게도 칭찬 같은 간지러운 말 따위 해 본 적이 없었다.
게다가 이렇게 말을 꺼내는 게 어려운 이유는 또 있었다.
아까도 느꼈던 그 묘한 꽃향기 같은 것 때문이었다.
지금 눈앞에 서 있는 샤를로테에게서 풍기는 그 꽃향기 때문에 몇 번이고 봐 왔던 볼품없는 여자아이가, 마치 뭐라도 되는 것처럼 그럴듯하게 보이는 거다. 대단치 않은 재능의 방증이나 다름없는 백금발이 아닌 머리카락과 연두색 눈동자도 괜히 좀 나아 보이고 그런 거다.
오히려 그가 말을 걸어 준다면 샬롯 입장에서 뛸 듯이 기뻐하고 감사해야 할 일인데, 왜 제가 이 말을 망설여야 한단 말인가?
리카르도는 한참 동안 말을 고르고 또 고르다가 될 대로 되라 싶어서 그냥 다짜고짜 입을 열었다.
“샤를로테.”
“……네?”
“약혼하자.”
앞뒤 맥락을 다 자른 말이 튀어나왔다.
리카르도의 눈동자가 조금 커졌고, 샬롯도 눈을 휘둥그레 떴다.
리카르도는 제가 뱉은 말을 주워 담고 싶다는 생각을 잠깐 떠올렸다가, 샬롯이 깜짝 놀란 눈으로 저를 바라보는 것을 보고 있자니 오히려 잘했다 싶었다.
‘……에잇. 뭐…… 솔직히 이 말부터 할 생각은 아니었는데, 왜 말이 이렇게 튀어나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차라리 잘됐어. 귀가 솔깃하면 뭐든 술술 털어놓겠지.’
어차피 황제가 될 제가 이런 제안을 하다니, 정말 파격적인 조건의 이야기였다.
샤를로테가 아니라 그 누구라도 반길 텐데, 샬롯이라면 더하겠지.
하지만 그의 예상과는 달리 샬롯은 즉각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이지도 않았고, 기뻐 날뛰지도 않았다.
다만, 그 보석 같은 에메랄드색 눈동자에 의문을 가득 담고서 한참 고개를 이쪽저쪽으로 기울이고서야, 긴 속눈썹을 팔랑이며 되물어 왔다.
“……네? 제가요? 전 생각이 없는데…… 원래 다른 예정자도 있으실 텐데, 아닌가요? 왜 그런 생각을 하셨어요?”
“……뭐?”
“네?”
너무 당혹스러운 답변이라, 머리가 안 돌아갔다.
“싫다고…… 한 건가?”
샤를로테는 오래 생각해 보지도 않고 다시 한번 리카르도의 제안을 칼같이 잘라 냈다.
“네. 제가 왜요……?”
리카르도의 말문이 턱 막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