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
“일찍 왔구나. 다친 데는 없니?”
샬롯은 요제프와 얼른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지만, 러슬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제 팔다리를 살피는 것을 보곤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응. 오라버니도 다친 데 없이 잘 통과했어?”
그를 걱정할 수 있는 사람은, 여기에서는 정말 샬롯밖에 없을 거다.
러슬은 웃음을 터뜨리며 제 동생을 안아 올렸다.
샬롯에게 묻고 싶은 것이 많았지만, 한창 예민할 대회장에서 그런 것들을 묻기도 좀 그랬다.
‘다음 기회를 기약하는 수밖에.’
“비야키는?”
“아…… 글쎄? 보긴 봤는데…… 곧 올걸? 검 쓰는 거 몇 번 멀리서는 본 적이 있는데, 나쁘지 않던걸.”
“나쁘지 않다라…… 하하핫. 그럼 란슬롯도?”
“응. 정신없는 일이 좀 있어서, 내가 자세히는 못 봤네. 근데 워낙 다혈질이라서, 란슬롯은 어떻게 될지 잘 모르겠지만 금방 오지 않을까?”
마치, 저보다 한참 어리고 실력도 하수인 이들에 대해 평가를 내리는 듯한 말투였다.
러슬은 절로 웃음이 터져 나오는 것을 느끼다가, 문득 샬롯이 뽀송뽀송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등줄기를 따라, 작은 소름 같은 것이 내달렸다.
점액질로 가득한 슬라임을, 점액 한 방울 묻히지 않고 잡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러슬은 황곰 기사단의 부단장으로 일하면서 몬스터를 접할 일이 제법 자주 있어 왔기 때문에 요령을 익혔지만, 그것은 처음 슬라임을 접하는 사람이 쉬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정면에서 찔러서 잡았다면, 백 퍼센트 점액을 뒤집어썼을 텐데…… 도대체 어떻게 잡은 거야?’
“저기, 샬롯.”
“응?”
“슬라임이 터질 때, 물이 튀지 않았어?”
“……어? 아, 그랬어. 그런데 내가 더 위에 있었으니까 괜찮았어.”
위에?
슬라임보다 위에?
러슬은 제 품에 쏙 안겨 있는 자그마한 체구를 한 번 바라보곤, 샬롯의 얼굴을 한 번 바라봤다.
분홍색 머리카락을 깔끔하게 걷어 묶어 올리고, 작은 실핀들로 잔머리를 고정한 샬롯의 뽀얀 얼굴에서는 그저 앳된 소녀의 귀여움만을 찾아볼 수 있었다.
“……샬롯.”
“응?”
“너, 정말…….”
“정말?”
“많이 컸구나……. 이 오빠는 그간…… 정말 무심했구나. 미안하다…….”
“……우는 거 아니지?”
“내가 그럴 리가 있겠니?”
말은 그렇게 해도, 러슬의 눈은 어느새 촉촉해져 있었다.
샬롯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몸을 버둥거려 러슬의 품에서 빠져나왔다.
이 오라버니는 다 좋은데, 이따금 저렇게 이상한 죄책감에 사로잡히는 게 문제였다.
* * *
셀렌 황후가 지금의 위치에 오른 것은, 그녀가 단순히 탄티누스 후작가의 여식이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누구보다도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빠르게 판단을 내리는 능력을 인정받은 거였다.
그녀는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무엇을 제시하면 될지를 알고 있었고, 또 흐름이 바뀐다면 지금까지 아껴 왔던 충직한 부하도 필요에 따라 언제든 내칠 줄 알았다. 물론, 지금까지 제가 전혀 쓸모 없다 여겼던 쓰레기도 때에 따라 언제든 기용할 줄 알았고.
예선전이라는 대회 중 가장 첫 번째인 경기 하나만 보았을 뿐이지만, 셀렌 황후는 지금 이 경기장에서 가장 주목을 받는 존재가 실제로도 대단한 능력을 가지고 있음을 깨달았다.
멍청이들은 제가 가지고 있는 선입관에 사로잡혀 빠르게 생각을 전환할 줄 모르지만 그녀는 달랐다.
샤를로테가 놀랍도록 대단한 무위를 선보이고 나서 물러난 후, 주위의 귀족이고 평민이고 할 것 없이 그녀에 대해서만 떠들어 댄다는 것은 그녀에게 주목할 필요가 있다는 뜻이었다.
어쩌면, 카밀라가 일부러 지금까지 대외적으로 공표하지 않고 비밀리에 키워 온 비밀 병기일지도 몰랐다.
‘대회가 시작될 때만 해도 그렇게 시치미를 떼더니만. 어디 보자. 만약 그렇다면, 무슨 의중일까?’
샤를로테와 요제프가 그토록 붙어 지낸다는 이야기들이 자연스레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셀렌 황후는 짙은 장미색으로 물들인 제 입술을 꽉 깨물었다.
역시, 우군이라고 해도 백 퍼센트 믿을 이는 아무도 없었다.
설령 그게 카밀라라고 해도.
심지어는 제 남편인 황제도 못 믿을 마당이니, 어쩌면 당연할지도 몰랐다.
“리카르도.”
셀렌 황후는 부채를 크게 펴 입 모양을 가린 채로 제 옆에 앉아 있는 사랑스러운 아들을 불렀다.
“네, 어마마마.”
“요즘 요제프가 안 보이더구나.”
“……네?”
“요제프를 괜히 밖으로 내돌리느니, 그냥 궁에서 가만히 있게 두거라. 그러다 밖에서 누구와, 어떤 친분을 쌓을 줄 어찌 알고.”
“……아, 그것은…… 하지만, 고작해야…….”
‘고작해야 샤를로테와 함께 지낸 건데 그걸 굳이 경계할 필요가 있겠냐.’고 말하려던 리카르도는, 아직도 귀가 얼얼하도록 주위에서 들려오는 함성 소리에 떠밀려 입을 꾹 닫았다.
“리카르도.”
“……네, 어마마마.”
셀렌 황후는 옆으로 흘끗 눈을 돌렸다.
아까부터 샤를로테 세티야에게 눈독을 들이고 있는 제 언니 라모레이가 보였다. 절대로 쉽사리 누군가에게 마음을 여는 사람이 아닌 언니인데.
그 반짝이는 시선을 다른 사람도 아닌 제가 알아채지 못할 수가 없었다.
뿐만 아니었다.
세티야 가의 가주 카밀라도, 샬롯이 등장한 이후로 퍽 생각이 많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제 곁에 앉아 있던 황제가, 샤를로테가 한 번에 시원하게 슬라임을 해치워 버리는 순간 놀라움에 눈이 동그래져서는 아예 아이처럼 그녀를 구경하겠답시고 단상 아래로 내려가 버렸다.
이 자리에서 가장 대단한 권력자를 꼽으라면 아마 그 셋인데, 그 셋의 마음을 한 방에 사로잡은 거다.
뭐가 되어도 될 거다.
세티야 가에서 중용하게 되든, 누가 데려가게 되든.
셀렌 황후는 조용히 제 아들에게 을렀다.
“내 생각에, 샤를로테는 생각보다 훨씬 더 크게 될 아이다. 우리가 먼저 데려오는 게 맞을 것 같구나.”
“……데려온다니, 제 궁으로 말입니까? 하지만 내기를 했는데 그건 제가…….”
“어쩌면 네 약혼자를 바꾸는 것도 좋을지도 모르겠구나.”
“네? 제가 저런 계집애랑 말입니까?”
셀렌 황후가 부채 뒤에서 은밀하게 리카르도를 엄하게 노려보았다.
리카르도는 어지간해서는 제 현명한 어머니의 말을 따르는 게 맞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고작 슬라임 한 마리를 우연히 빠르게 잡았기로서니 앞으로 황제가 될 제 부인 자리에 저런 하찮은 계집을 앉힐 생각을 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라 여겼다.
“큰 것을 얻기 위해서는 항상 모든 것을 정치적으로 판단할 줄 알아야 한다 가르쳤거늘, 너는 어째 늘질 않는구나.”
“어마마마, 하지만 상대는…….”
“일단은 지켜보자꾸나. 지금은 당장 가서 인사만 건네고 오거라.”
“……아니, 저 정도 되는 황자가 고작 샤를로테에게 직접 인사를 가란 말씀이십니까?”
셀렌이 제 아들을 의아한 눈으로 바라봤다.
“아까 예선 전에는 직접 인사를 다녀온 게 아니었느냐?”
“아니, 그것은 다르질 않습니까?”
“내기든 뭐든 핑곗거리가 있다 하니 더욱 잘된 게 아니냐? 가서 한번 떠보고 오거라. 카밀라의 의중에 대해서. 그 아이의 입이 정 무겁거든 약혼 이야기를 꺼내도 좋다. 아무튼, 칭찬도 하고, 어떻게든 구워삶아 보란 말이다.”
“……하지만.”
“리카르도. 내 말대로 해라, 지금 당장.”
하지만, 리카르도가 거역하기에는 셀렌은 너무나도 엄한 어머니였다.
그는 처음으로 황후의 말이 부당하기 짝이 없다 여기며 투덜거리면서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 * *
‘나 샬롯이 케이트를 구해 주는 거 보고 왔잖아, 완전…… 나는 뭐가, 어떻게 된 건지도 못 봤어.’
‘케이트를? 샬롯이? 솔직히, 나 같으면 거들떠보지도 않을 텐데.’
‘그건 둘째 치고 실력이 되냔 말이야. 진짜 이쯤 되면 샬롯이 무슨 고대에나 있던 마족이랑 계약이라도 한 거 아니야? 어떻게 사람이 이렇게 바뀌어?’
샬롯을 찾아 예선이 끝난 대기실 앞까지 찾아간 리카르도는 방 안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여기까지 오면서도, 온통 샤를로테 세티야에 대한 이야기들뿐이었다.
뭐 실력이 좀 발전한 건 맞는데 이렇게까지 다들 열광적으로 반응하는 것에 대해 솔직히, 이해가 안 될 정도였다.
리카르도가 보랏빛 곱슬머리를 손으로 쓸어 넘기며 문을 향해 턱짓하자, 그의 뒤에 서 있던 수행원이 얼른 앞으로 튀어나와 문을 열어 주었다.
제법 줄어들어 있는 대회 참가자들 사이에서, 러슬의 품에 쏙 안겨 있는 샬롯은 대번에 눈에 들어왔다.
왜냐하면, 그가 그리도 벌레처럼 싫어하는 요제프를 찾는 것은 무엇보다도 쉬웠고, 요제프의 시선만 따라가면, 그녀를 발견할 수 있었으니까.
‘아주 순애보 나셨네.’
제가 뭐라고 타이르고 떠들어 대건 귓등으로도 듣는 척을 안 하던 요제프가, 도대체 무슨 사이라고 저렇게 샬롯을 눈이 빠져라 바라보는지, 정말이지 꼴값이었다.
“2황자 리카르도 님께서 납셨습니다.”
시종이 리카르도의 방문을 알리고서야, 요제프의 시선이 천천히 리카르도에게 향했다.
새카만 눈에 가득한 빛은, 누가 봐도 적의라고밖에 이름 붙일 수 없는 것이었다.
‘……제 소꿉친구를 건드렸다, 이건가? 아주, 지극정성 나셨군.’
지금까지는 그저 죽은 인형처럼만 굴었으면서.
리카르도는 그런 눈빛을 받고도 아무렇지도 않을 사람이 아니었다. 그도 요제프를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