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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파 공녀님 (53)화 (53/123)

#53.

그러곤 그 촉수들이 샬롯의 몸을 휘감으려는 순간, 거대한 구체의 가운데가 텅 비게 벌어지면서 자글자글한 투명한 이빨 같은 것들이 순식간에 돋아 올랐다.

“히익!”

‘예쁘다고 생각한 건 취소야. 진짜, 몬스터는 몬스터구나.’

그녀는 미지의 존재에 대한 설렘 같은 것들을 제 마음속에서 얼른 지워 버리곤 마음을 다잡았다.

이렇게 정신을 빼놓고 있다간 대회 우승은커녕 예선에서 망신을 당하게 생겼으니까.

샬롯은 발에 순식간에 기를 휘감아 각력만으로 바닥을 차고 올랐다. 제 키보다 훨씬 큰 슬라임을 내려다보는 곳까지 뛰어오른 그녀는, 양손으로 검을 쥐고 그대로 아래로 휘둘렀다.

검의 길이보다 훨씬 더 긴, 붉은색 검강이 초승달 모양으로 튀어 나갔다.

자욱한 매화 향이 그녀를 휘감았다.

키에에에에엑-!

동그란 구체에서, 공기를 진동시키는 괴상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샬롯의 검강이 닿은 곳부터 껍질이 쩍- 하고 갈라지더니, 반구가 된 두 개의 형체가 바닥을 나뒹굴었다.

오래지 않아 반으로 갈라진 슬라임의 사체는 마치 급속도로 말라 가는 과일 껍질처럼 쪼글쪼글하게 마르며 바닥으로 다량의 점액을 뱉어 내더니 어느 순간에 전부 물로 녹아 버렸다.

땡그랑!

샬롯은 허공에서 떨어져 내린 은색 코인을 담담하게 주워 들었다.

3조에서 가장 먼저 코인을 획득한 사람은 샤를로테 세티야였다.

그건 대회장에 있는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사실이었다.

1, 2조의 대회에서 슬라임을 향한 각 가문 신진들의 무예를 볼 때마다 큰 함성과 박수로 열광하던 관중석에서는, 정적만이 흘렀다.

이례적인 사건이라고 해도, 정도가 있었으니까.

샤를로테 세티야가 예선을 통과할 수 있을지, 없을지로 내기를 하던 이들은, 기껏해야 그녀가 마지막 순서로 코인을 제출하기만 해도 정말 대단한 반전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거다.

그런데, 첫 번째.

그것도 대회에 이미 참가한 적이 있는 다른 쟁쟁한 열예닐곱 먹은 아이들보다도 빨리.

관중석의 1열, 황족들과 고위 귀족들만이 차지한 귀빈석에도 기묘한 침묵만이 흘렀다.

순간적으로 셀렌 황후가 카밀라를 노려보았지만, 평소 같으면 황후의 시선에 기민하게 반응했을 카밀라는 그녀답지 않게 넋을 놓고 대회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 * *

예선에서 합격한 자들은, 경기장 사방에 서 있는 감독관에게 코인을 제출하면 된다.

샬롯은 코인을 손 안에서 튕기며 대회장을 가로질렀다.

슬라임들은 그녀가 바로 옆을 유유히 걸어 지나가는데도, 그저 다른 아이들을 탐색하고 공격하는 데에만 열중하고 있었다.

샬롯은 그게 너무 신기해서 잠깐 발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신기하네.’

슬라임 개체마다 이미 짝이 매칭된 건지, 아니면 코인을 가지고 있는 상대는 공격하지 않도록 되어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마도 공학이라는 게 생각보다도 제법 대단한 분야인 것 같았다.

흥미가 절로 생겼다.

마도 공학이라느니, 마법이라느니 하는 것에 그동안 관심이 있긴 했지만, 그렇게까지 깊게 알아볼 생각은 하지 못했는데.

‘그쪽으로도 좀 배워 볼까?’

샬롯이 그런 여유 있는 생각을 하는 순간이었다.

“어, 어떻게 해!”

“케이트!”

“빨리 기권해! 기권해!”

그녀의 귀에 익은 아이들의 날카로운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이미 뒤돌아 서 있던 샬롯의 눈이, 다리를 붙잡힌 채 하늘 높이 들어 올려진 여자아이를 순식간에 포착해 냈다.

땋아 올린 푸른색 긴 머리, 목에 맨 독수리 문양의 손수건.

‘케이트 탄티누스.’

이미 잘 알고 있는 여자아이였다.

그 아이는 분명 방패는 빼앗겼지만 창을 오른손에 쥐고 있었고, 그 오른손은 자유로운 상태였다. 게다가 샬롯이 알기로는 오러도 쓸 수 있었다.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하여 대회장 곳곳에 지키고 서 있는 기사들도, 케이트를 주시하기만 하고 굳이 끼어들지 않는 이유도 그것이리라.

하지만 케이트의 눈 속에 깊은 공포가 서려 있었다. 이렇게 먼 곳에서도 그녀가 절대 그 창을 휘두를 수 없으리라는 것을 샬롯은 알았다.

심지어는 기권이라는 단어를 말할 수조차 없을 거라는 걸.

그건, 본능적인 거였다.

그리고, 순간적으로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탄티누스 후작가가 작중에 몇 번이나 나왔는데, 가문에 다리 한쪽이 의족인 여자아이가 있다는 묘사만 나왔지.’

그것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본 적도 없었는데, 지금 그걸 깨닫고 나니 등줄기가 오싹해졌다.

저를 괴롭히는 데 가담했던 여자아이라는 것은 지금, 이 순간 생각나지 않았다.

샬롯은 앞뒤를 잴 것도 없이 암향표를 최대 속도로 전개했다.

한가롭게 멈춰 서 있던 그녀의 몸이 잔상조차 제대로 보이지 않을 속도로 이동하는 것을 똑바로 쫓을 수 있는 이는 그리 많지 않았다.

샬롯은 케이트를 감아올리고 있는 슬라임의 앞에 도착하자마자 달려온 가속도에 더해 발에 기를 쏟아부어 그대로 슬라임을 걷어차 버렸다.

키에에에에- 키에에엑!

금방이라도 케이트의 작은 몸뚱이를 입 안으로 삼켜 버릴 듯하던 슬라임은, 샬롯이 걷어찬 곳에서부터 커다란 구멍이 나더니 그대로 풍선 터지듯 터져 버렸다.

투두둑.

허공에서 점액이 쏟아져 내렸고, 중심을 잃은 케이트도 그대로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꺄아아악!”

슬라임의 촉수에서 놓여나자, 그제야 제정신이 든 듯 케이트는 뒤늦은 비명을 내질렀다.

샬롯은 어쩔 수 없이 손을 내밀어 바닥에 닿기 직전의 여자아이를 낚아챘다.

털썩.

“꺄아아악…… 어?”

케이트는 따뜻하고 작은 품에 몸이 쏙 감겨들자 질끈 감았던 눈을 슬그머니 떴다.

한 번 겁을 먹으니까, 그걸로 끝이었다.

정말로 몬스터를 눈앞에서 직접 보니까, 제가 그걸 어떻게 할 수 있는 실력이 있다는 걸 이론적으로는 알고 있었지만…… 도저히 몸이 딱딱하게 굳어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정말 꼼짝없이 큰일이 날 줄 알았는데…… 누가 이렇게 구해 준 걸까?’

그녀가 발견한 건 저를 안고 있는 샤를로테였다.

쭉정이. 투명 인간. 없어져도 아무도 모를 아이. 모지리.

그렇게 그녀가 다른 아이들과 함께 따돌리고 놀리고 괴롭혔던 그 아이.

다른 사람도 아니고, 샤를로테가 저를 구해 주리라곤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첫째로, 제 주변엔 분명 가까이에 닿을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기사님조차 그런 저를 바라보며 혹시 몰라 몇 발짝 다가와 서 있었지만 제법 거리가 있었다.

게다가 샬롯에게 그런 대단한 실력이 있을 줄도 몰랐다.

“……어? 어……? 도대체 어떻, 어떻게…….”

케이트가 말을 더듬으며 샬롯을 올려다보았다.

란슬롯의 말대로, 평소에는 우습다고만 생각했던 샬롯이었다. 최근 들어 몇 가지 사건을 통해, 특히 란슬롯과의 대련을 통해 어쩌면 생각과는 다른 모습이 꽤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한 번 마음속에 굳어진 이미지를 털어 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샬롯을 낮춰 보고 있는 마음이 있었는데…….

정수리 위에서 내리쬐는 햇빛을 받으며, 분홍빛 머리카락 아래로 그늘이 멋지게 드리운 샤를로테를 올려다보자니 너무 멋있어서 심장이 절로 뛰었다.

솔직히 ‘샤를로테 따위’라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지만, 지금 이렇게 샬롯에게 구해진 것이 창피하지는 않았다.

그보다는 제가 샬롯이었다면, 저를 구해 주지 않았을 거란 생각이 들어서…….

“이제 괜찮으면 내려와.”

케이트는 그 아무렇지도 않은 말에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고…….”

“뭐?”

“고…… 고…… 고마워! 고마워! 죽는 줄 알았어. 아니, 정말 죽었을 거야. 그리고 미안해!”

“……지금이 그런 말 할 때야? 얼른 일어나.”

“응. 그런데 정말 고맙고…… 그간 내가 정말 잘못했어.”

샬롯은 억지로 몰아붙이듯 사과해 오는 케이트를 좀 당황해서 바라보았다.

하지만 대회장에서 나누는 대화는 모두 관중석에 중개될 수 있다는 점을 염두에 뒀을 때, 앞뒤 상황을 재지도 않고 저렇게 다짜고짜 사과부터 하는 게 그리 밉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냥, 순수한 거다.

아이들은 선도 될 수 있고, 악도 될 수 있다. 그 점이 제일 무섭지만, 또 어떨 때는 너무 쉽게 좋은 방향으로 바뀌기도 한다.

샬롯은 눈물까지 맺혀서 저를 올려다보는 귀여운 케이트의 얼굴을 보곤 고개를 살래살래 젓고 툭 손을 놔 버렸다.

“꺅…… 아?”

그렇게 덥석 안겨 있었던 것치고는, 샬롯과 케이트의 키 높이가 정말 조금도 차이 나지 않았기 때문에 크게 떨어질 곳도 없었다.

케이트는 놀라다 말고 발을 똑바로 디디고 섰다.

샬롯은 그녀의 등을 가볍게 툭 쳤다.

“사과는 본선에 올라와서 해.”

케이트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본선.

그래, 본선.

지금 이렇게 눈앞에서 저와 다를 것 없는 몸집의 샬롯이 슬라임을 아무렇지도 않게 해치워 버리는 것을 보니까, 저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물론 샬롯과 제 실력 사이에 엄청난 차이가 있다는 건 방금 깨달았지만.

“응. 꼭, 그럴게.”

케이트는 고개를 끄덕이며, 바닥 어딘가에 내팽개쳐져 있을 제 창을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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