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파 공녀님 (52)화 (52/123)

#52.

요란한 고함 소리와 열광하는 함성 속에서, 카밀라는 썩 내키지 않는 얼굴로 의자에 몸을 파묻었다.

슬라임.

몬스터.

이세계에서 왔다는, 그 어떤 동물과도 다른 형상을 하고 다른 물리법칙을 적용받는 그것들은 대체로 절멸했다.

지금은 가장 약한 개체들만 인간들이 연구를 용도로 살려 두었기에 마도를 공부하는 마탑에서나 볼 수 있을까, 일반인들에겐 공개되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이따금 이런 이벤트를 위해서, 인위적으로 그들 중 몇 개체를 다시 복원해 내기도 했다.

당연히 관중들 입장에서는 책이나 동화에나 등장하는 몬스터를 실제로 본다니 몹시 흥분되고 신이 날 수밖에.

카밀라는 황제의 이런 쇼맨십 자체는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지금 이 자리에는 체이커 국 사람만 와 있는 게 아닐 테니, 자국의 우수한 마도 공학을 이 기회에 뽐내 두는 것도 좋았다.

‘……하지만, 평소보다는 꽤 잔인한 예선전이 되겠는데.’

그녀는 속으로 중얼거리며 제 팔을 톡톡 두드렸다.

인간 대 인간의 대련에서는, 어지간해서는 생각보다 많이 다치지 않는다.

검과 방패를 다루는 법 자체가 어느 정도 정형화되어 있기도 했거니와 아무리 누군가를 찌르고 베기 위한 검술이고 창술이었지만, 막상 정말 타인을 다치게 할 상황이 되면 저도 모르게 손을 멈추게 되니까.

그리고 이 대회에서 어쩔 수 없는 상처가 생기는 것은 모두가 용인했고, 항복을 외치기 전까지는 얼마든지 공격해도 좋다는 규정이 적용되고 있었지만, 대회 자체가 서로를 살상하라고 만든 건 아니었으니까.

‘슬라임은 아무리 귀엽게 생겼다 할지라도, 몬스터다. 자식 간수를 똑바로 하고 싶은 부모라면, 예선을 포기시킬 수도 있겠어…….’

카밀라는 손을 들어 턱을 톡톡 두드렸다.

세티야 가의 아이들이 참가하고, 참가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그녀는 아무런 입도 대지 않을 생각이었다.

어디까지나 부모의 소관으로 맡기고 있었다.

하지만 가주가 여기에서 보고 있는데, 조금이라도 제 자식을 세티야 가의 사람으로서 인정받게 하고 싶은 부모라면 무리해서라도 제 아이를 참가시킬 것이다.

아마 세 명. 세티야 가 방계의 아이들과 샤를로테. 그 아이들은 크게 다칠지도 모른다.

굳이 그 많고 많은 몬스터 중에 황제가 슬라임을 선택한 이유를, 그녀는 알고 있었다.

슬라임은 물리 공격으로는 타격을 받지 않는 가장 대표적인 몬스터였다. 마법을 쓸 수 있는 자라면 모를까, 단순히 무술만을 토대로 평가받는 칼그림자의 날에는, 나름대로 꽤 성가신 상대가 되리라.

* * *

첫 번째 조가 입장하고, 두 번째 조가 입장할 때까지 샬롯은 대회장에서 일어나는 일을 알 수 없었다.

모두 공정한 조건에서 대회를 치르기 위해, 사전에 대회장의 일을 알 수 없도록 차단해 둔 것 때문이었다.

와아아아-.

와아아아아-!

우우우-!

‘두 번째 조의 경기가 끝났나 봐.’

수백, 수천의 관중이 내지르는 함성이 일제히 귀에 와 꽂혔다.

1, 2조의 경기 내용에 대해서는 제가 알 수 없었지만, 샬롯은 아무런 걱정 없이 침착하게 혼자 고개를 끄덕였다.

‘요제프는 통과했어. 이건, 안 봐도 알아.’

물론 작중에서 이미 예선을 통과해서 대회를 잘 치르다가 중도 탈락하는 내용을 읽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요제프의 실력에 대한 믿음이 더 컸기 때문이었다.

그는 충분히 우승을 노릴 만한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예선 따위에서 탈락할 인재가 아니었다.

그래서, 샬롯은 굳이 요제프에게 예선에 나오는 몬스터에 대해 언질 주지 않기도 했다.

공정함이란 중요한 가치라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그녀의 침착한 태도와는 달리, 다른 아이들은 제 차례가 다가온다고 생각하자 공황 상태에 빠져 버렸다.

“어, 어떻게 해.”

“이제…… 이제 우리야.”

“슬라임이라잖아. 어떻게 해? 나, 무서워.”

“한 명당 한 마리씩 상대해야 하는 거지? 난…… 난, 자신 없어.”

“나, 나도. 몬스터 같은 거, 실제로 본 적 없단 말이야.”

샬롯은 제 바로 옆에서 서로 속삭이며 웅크리고 앉아 있는 세 명의 아이들을 흘끗 바라보았다.

얄궂게도, 안면이 있는 아이들이었다.

란슬롯이 저를 괴롭힐 때, 주위에 서서 웃고 있던 아이들 중 몇이었다.

그녀가 물에 빠져 죽어 갈 때도, 아무렇지도 않게 웃고만 있던 아이들.

그 아이들의 방패나 무기에 새겨져 있는 황곰의 문양으로 보아, 그중 둘은 세티야의 방계 소속인 모양이었고, 또 한 명은 푸른색 독수리의 문양으로 봐서 탄티누스 후작가의 여식인 모양이었다.

고작해야 열 살 남짓으로 보이는 세 아이들이 모여서 손을 꽉 붙들고 오들오들 떠는 것은 보기에 가여워 보였지만, 샬롯은 굳이 거기에 말을 보태지 않았다.

‘아무도 안 도와주면, 사람이 행동할 때는 미래에 제가 어떤 대가를 치르게 될지 생각을 하고 행동해야 한다는 교훈을 배우겠지.’

제게 그 아이들을 향한 의리가 있을 턱이 없었다.

‘란슬롯도 분명 같은 조일 텐데. 걔가 알아서 하겠지, 뭐.’

그러고 보니 제게 시비를 걸어도 백 번은 더 걸었을 란슬롯이 아직 조용한 게 별일이다 싶긴 했다.

고개를 돌리자, 무슨 생각에 빠진 건지 모를 얼굴을 한 란슬롯이 가장 구석진 자리에 앉아 있었다.

남의 눈에 띄기를 그렇게 좋아하는 아이치고 정말 그답지 않은 행동이었지만, 샬롯은 란슬롯이 대회 전에 신경이 날카로워져서 그렇겠거니 하고 말았다.

오히려 다른 시선이 더 신경을 긁었다.

샬롯은 저를 바라보는 시선을 찾아 다시 고개를 돌렸다.

포니테일로 길게 묶은 백금발이 인상적인, 호리호리한 사내가 벽에 기대서서 저를 노려보고 있었다.

같은 조에 소속되어 있는 비야키였다.

비야키는 시선이 맞닥뜨릴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던지, 그녀와 시선이 마주치자 피식 비웃음을 지어 보였다.

‘하여튼 신경 쓰이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라니까. 그리고 저 표정은 뭐야. 입꼬리가 한쪽이 고장 났나? 왜 저렇게 웃어?’

하지만 샬롯은 온갖 수모를 겪으며 자란 세월이 워낙 길어서인지, 그런 어중간한 태도로 신경을 긁는 것 따위에는 크게 신경도 쓰이지 않았다.

어차피, 실력으로 모든 걸 입증할 수 있었다.

비야키가 자신을 우습게 보든, 그렇지 않든.

곧 모든 게 결정될 거다.

와아아아-!

그때, 다시 한번 관중들의 함성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방 입구로 저벅저벅 걸어 들어온 기사 한 명이 예선 참가자들 사이를 뚫고 반대쪽 벽에 다다르더니 선언하듯 말했다.

“이제 3조의 차례다.”

덜컹.

그리고 그 기사가 벽을 손으로 툭툭, 두 번 두드림과 동시에 어딘가에 걸쇠가 걸려 있던 것이 풀리는 소리가 나면서 3조가 들어가 있던 방의 한쪽 벽이 통째로 열렸다.

눈이 아플 정도의 햇살이 쏟아져 들어왔다.

방 안에 서 있던 마흔 명 남짓한 아이들이 웅성거리며 고개를 돌렸다.

처음 도착했을 때는 그저 축제의 현장같이 분주하고 신나기만 하던 대회장은, 바닥에서 올려다보니 지독히 냉혹한 공간처럼 보였다.

많은 관중이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는 모습 아래로, 거대한 철창이 마련되어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거기에는, 반대편이 투영되는 묘한 동그란 개체들이 제멋대로 굴러다니고 있었다.

그 개체들 안에는 작은 코인 같은 게 반짝이고 있었는데, 그 코인을 획득해야 예선을 통과하게 된다고 사회자가 설명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마치…… 젤리나 푸딩 같아. 책에서 나온 것과 같네.’

샬롯이 담담하게 속으로 슬라임들을 평가하고 있는데, 바로 옆에 서 있던 여자아이 한 명이 바닥에 주저앉는 게 보였다.

‘탄티누스 후작가의 여식…… 이름이 뭐더라. 케이트?’

하지만 길게 생각을 하고 있을 시간은 없었다.

철창 위에 올라서 있던 마법사 세 명이 기다란 스태프를 들어 올리며 동시에 같은 몸짓을 해 보이자, 철창의 문이 위로 스르륵 올라갔다. 그리고 그 안에 갇혀 있던 거대한 젤리들이 동시에 구르고 튀어 오르며 아이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발도 없고, 눈도 없는 주제에, 빠르긴 엄청 빠르네.’

스릉.

비야키를 비롯한 대회 유경험자들은 이 상황에도 크게 당황하지 않고 동시에 검을 뽑아 들며 앞으로 달려 나갔다.

샬롯도 별다른 동요 없이 검을 뽑아 들었다.

보통은 양손 검을 쓰지 않는 이상, 크든 작든 방패를 가지고 대회장에 오기 마련이었기 때문에 얇은 검만 하나 달랑 들고 온 샬롯의 발이 개중에 가장 빨랐다.

가히 제 키의 세 배는 되는 지름의 굉장히 통통한 구체의 앞에 다다른 샬롯은, 가까이에서 보니 너무 투명하다 못해 반대편 바닥이 보이는 슬라임의 피부 위로 검을 한 번 그냥 휘둘러 보았다.

통.

‘정말로 그냥 무력 공격은 듣지 않는구나.’

책을 미리 봐 둔 보람이 있었다.

제법 날이 잘 서 있는 검인데도, 정말로 이조차 하나 들어가지 않았다. 무슨 굳혀 둔 고무처럼 반발력이 있어서, 검이 절로 퉁겨져 나왔다.

‘아니, 이렇게 재밌고 예쁜데. 꼭 없애야 하나?’

순간적으로 그런 생각을 하는 순간, 샬롯이 서 있던 바로 앞부분에서 기괴한 촉수 같은 것들이 뻗어져 나왔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