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파 공녀님 (50)화 (50/123)

#50.

두 사람에 대해 쏟아지는 온갖 추측들을 뒤로하고, 샬롯과 리카르도는 대기실 옆의 작은 응접실을 찾아 들어갔다.

긴 이야기를 할 셈은 아닌지, 2황자는 자리에 앉지도 않고 선 채로 입을 열었다.

“요즘 내 동생과 그렇게 사이가 좋다던데. 어때? 비루먹은 말들끼리 모여 있으니, 기분이 썩 좋진 않았지?”

말을 해도, 정말 품위 떨어지게 한다.

아름다운 외모를 하고 있으면 뭐 하나. 사람을 눈앞에 두고 비루먹은 말이니 뭐니 폄하하는데.

샬롯은 한숨을 숨기며 애써 평온하게 대답했다.

“염려해 주신 덕분으로, 요제프 황자님과는 잘 지냈습니다.”

“흐음? 꽤 또랑또랑하게 말하는데?”

“제겐 어쩐 볼일이신지…….”

리카르도가 불쑥 손을 내밀어 샬롯의 턱을 움켜쥐었다.

그 손을 백 번도 더 피할 수 있었고, 동시에 리카르도의 뺨도 열 번쯤 후려칠 수 있었지만, 샬롯은 그의 양옆을 지키고 서 있는 호위 기사들을 슬쩍 바라보곤 얌전히 턱을 잡혔다.

리카르도의 미지근한 손에서 느껴지는 땀이 턱끝에서 맴도는 감각은, 지극히 불쾌했다.

어쩜 같은 형제인데도 이렇게 다를까?

요제프와는 손깍지를 껴도 그저 귀엽고 산뜻하기만 한데.

그리고 아이작이나 러슬은 아예 저를 안아도 이렇게까지 꺼림칙한 적이 없었다.

아마, 리카르도에겐 자신의 의사를 살피는 기색이 전혀 없어서 이렇게까지 기분이 나쁜 걸 거다.

‘진정하자. 어쨌든 실격 처리가 되면 큰일이니까, 황자를 패면 안 돼. 리카르도를 패지 말자, 패지 말자…….’

샤를로테는 요제프를 떠올리며 최대한 저를 달래었다.

‘높은 곳에서 만나자고 이야기까지 해 놓고선, 리카르도를 때려서 내가 실격 처리되면…… 요제프가 실망할 테니까.’

샬롯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길이 없는 리카르도 2황자는 그녀가 다소곳하게 제 앞에서 눈을 내리깔고 있는 것을 한참 바라보았다.

그냥 요제프가 안달복달하는 여자애라고 하니까, 한번 접근해서 요제프가 속상한 꼴을 보겠다는 게 제 의도의 시작이자 끝이었을 뿐이었다.

아홉 살짜리 여자아이를 상대로 이상한 관심을 가질 생각은 없었다.

그런데 막상 가까이에서 보니까, 더 가까이에 두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잔뜩 부풀린 드레스나 화려한 머리 장식이 없는데도, 산기슭에 고고히 피어 있는 예쁜 꽃같이 시선을 사로잡는 구석이 있었다.

그래서일 거다.

그냥, 예쁜 것을 보면 누구든 좋아하니까.

그리고 그 자신은 예뻐 보이고 좋아 보이는 거라면 뭐든 가까이에 두고 싶어 해도 되는 황족이었으니까.

게다가 무인들에게서 나는 시큼한 땀 냄새 대신 어디선가 달콤한 꽃향기까지 풍기는 것 같았다.

“샤를로테.”

“……말씀하세요.”

“요제프 황자 대신, 내가 놀아 줄게.”

“네? 무슨 말씀이신지……?”

샬롯은 눈을 가늘게 뜨고 리카르도를 바라보았다.

“너도 심심해서, 그 어디 버릴 수도 없는 쓰레기랑 놀고 있는 거잖아. 내가 놀아 주겠다고.”

샬롯은 이번에는 이십사수매화검법의 구결을 외웠다. 아무튼, 뭐라도 속으로 읊으며 생각을 다른 곳으로 돌리지 않으면, 입에 걸레를 문 저 황자의 날렵한 얼굴을 좀 더 다각형으로 만들어 버릴 것 같았다.

“……그런 게 아닙니다. 전 이만 대회장에 가 봐야 하니 놓아주세요.”

그녀는 스스로의 인내심을 칭찬하며 최대한 조곤조곤하게 말했다.

리카르도는 조금 놀랐는지 눈을 깜박였다. 그리고 이내 뭔가를 상기한 얼굴로 샬롯의 턱을 이리저리 돌려 보았다.

“그래. 맞아, 네가 화원에서도 요제프 그놈을 감싸고돌았지. 너네 공작가가 나와 어떤 사이인지도 모르는 멍청한 계집애가.”

“……그런 멍청한 계집애를 데리고 놀아서 뭐 하시려고요. 이제 그만…….”

리카르도가 그녀에게 길을 내어 주지 않고 대놓고 그녀의 앞을 가로막고 섰다.

“콧대가 높네. 예선, 내가 통과시켜 줄게. 그럼 됐지? 너, 그거 통과 못 하면 큰일이라며?”

그러곤 뭔가 대단한 거라도 제시한다는 듯 턱끝으로 그녀를 가리키며 말했다.

샬롯은 기가 막혀서 그를 가늘게 쏘아보았다.

점점, 부드러운 목소리가 안 나왔다. 저도 모르게 이가 갈려서.

“……예선은 제가 통과하겠습니다.”

리카르도가 혀를 찼다.

“이 미끼는 덥석 물 줄 알았는데. 그래도 세티야 가라고 자존심은 챙기는 건가?”

“그런 게 아닙니다.”

“아니라고? 왜? 왜 아닌데?”

리카르도는 집요하게 물었다.

샬롯이 가장 원하는 미끼를 제시했고, 다른 사람도 아닌 바로 저 리카르도가 말하고 있었다. 그는 제 제안이 이렇게까지 상대의 마음에 가닿지도 못하는 꼴을 처음 당해 봤다.

반면 샬롯은 리카르도가 계속 추궁하며 몸을 더 가까이하자, 목이 죄여 오는 느낌이 들었다.

남의 손 안에 제 목을 얌전히 바치고 있는 기분이 지극히 불쾌해서, 샬롯은 더 이상 그걸 견디지 못하고 슬쩍 옆으로 몸을 피했다.

그로 인해 그녀의 턱을 단단히 쥐고 있던 손이, 허공을 갈랐다.

리카르도가 기가 막힌다는 듯 혀를 찼다.

“허어, 이것 봐라? 지금 날 향해 호신술이라도 쓴 거야?”

샬롯은 이 상황 자체가 피곤하다고 생각하며 참을 인 자를 머릿속으로 열두 번째 그렸다.

“아닙니다. 그저…….”

“네가 통과 못 할 건 뻔한데. 왜 그렇게까지 하는 거지?”

“……통과할 겁니다.”

“못 하면?”

“……할 겁니다.”

리카르도가 입술을 비죽 당겨 웃었다.

“그렇게 확신이 있어? 그럼 이건 어때? 네가 통과 못 하면, 내가 요제프의 다리 한쪽을 잘라도 되나?”

샬롯은 조용한 경악과 분노를 삼키며 눈앞에 선 열네 살짜리 아이를 천천히 바라보았다.

도대체 어떤 성정을 가진 아이길래, 그렇게까지 체이커 국을 수렁으로 밀어 넣는 건지 솔직히 궁금했었다.

도대체 국민들의 고혈을 얼마나 빨아먹고, 민생을 얼마나 돌보지 않기에. 지금은 비록 강대국의 사이에 껴 있다고 하지만, 큰 탈 없이 평화를 구가하고 있는 이 나라가 그리 위기에 놓이게 되는지.

요제프 황자가 황위를 이어받기 전에, 전국에 이어 대대적인 반란까지 일어날 정도가 되는지.

궁금했었다.

그런데 이제 좀 알 것 같았다.

아이작이 미래에 잔인하게 모두를 도구로 이용하기만 하는 게 문제라면, 리카르도는 애초에 덕이라는 것 자체가 없었다.

그 아래에 제대로 된 인재가 모여들 리도 없었다.

나라를 위하는 게 아니라 돈과 권력을 탐하는 자들만 꼬이겠지.

그럼 그들이 또 다른 돈과 권력을 탐하는 자들을 기용할 테고.

당연히 아래에 있는 자들을 혹사시키고, 짓밟고 올라서는 문화가 팽배할 거다.

아직 10년은 더 남은 지옥도와 같을 그 상황이 눈에 너무 선연했다.

“그런 게 될 리가 없잖습니까?”

“왜? 확신이 있다며?”

“……황자 전하, 저는 다른 사람을 내기 거리로 삼지 않습니다.”

리카르도가 재밌다는 듯 눈을 접으며 비죽 웃었다.

“까탈스럽게 구네. 좋아, 좋아. 이것도 재미지. 그러면 다른 사람 말고 본인을 걸어.”

“……제가 저를 어떻게 겁니까.”

“왜 못 걸지? 예선에서 통과하지 못하면, 내 궁에서 한 달 동안 지내. 그럼 되잖아?”

리카르도의 궁에서 한 달.

‘리카르도는 어차피 나한텐 관심도 없어. 그냥 나를 가지고 놀아서, 요제프에게 피해를 주고 싶은 거야.’

어린아이 같은 리카르도의 심리를 꿰뚫어 보는 것은 어렵지도 않았다.

‘역시 어려.’

샬롯은 입술을 꼭 깨물었다가 나직하게 웃었다.

“요제프 황자님이 제가 없다고 눈이라도 한 번 깜짝할 것 같아요? 제가 한 달 동안 리카르도 황자님의 궁에 있는다고 하면, 오히려 아빠만 좋아하실걸요?”

리카르도는 상관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에겐 확신이 있었다.

그 무엇에도 관심도, 집착도 보이지 않던 요제프 황자가, 저 계집에게 아주 미쳐 있다는 확신이.

한 달이면 긴 시간이다.

저 계집에게 훨씬 더 재밌는 세상이 있다는 걸 알려 주기엔 충분할 터.

그나마 하나 찾아낸 마음의 의지처마저 잃은 요제프의 꼴이 너무너무 보고 싶어 견딜 수가 없었다.

“뭐, 그건 상관없지.”

‘난 상관 있단 말이다.’

샬롯은 속으로 이를 빡빡 갈았다.

리카르도의 궁에서 지내는 동안에 제게 좋은 일이 있을 리는 없었다.

게다가, 밥 중에서 제일 맛없는 게 남의 눈치 보면서 먹는 밥이다. 지금 겨우 공작가에서 요제프와 맛있게 밥을 먹는 데 적응한 참인데. 굳이 그렇게 불편한 곳에서 지내고 싶진 않았다.

샬롯은 제가 알겠다고 하기 전까지는 절대 물러날 기미가 없는 리카르도를 고요하게 쳐다보았다.

이대로 리카르도가 저를 놓아주지 않아서 예선 탈락이 되느니, 차라리 저딴 내기라도 받아들이는 게 나으리라.

솔직히, 예선에서 떨어질 생각이 없기도 하고.

그렇다면 그냥 제게 손해뿐인 내기를 하면 안 되지.

“그럼, 황자 전하께서는 무엇을 거시겠습니까?”

샬롯의 당돌한 질문에 리카르도가 눈을 크게 떴다. 황후를 닮은 엷은 녹색 눈에 짜증이 서렸다.

“나보고 뭘 걸라고? 미친 건가?”

“어차피, 저 같은 게 통과 못 할 건 뻔하지 않습니까. 제가 이기면…….”

순간적으로 샬롯의 머리가 팽팽 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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