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파 공녀님 (49)화 (49/123)

#49.

‘다행이다.’

정말 최악의 사태는 요제프 황자가 대회에 참가도 못 하게 되는 일이라 생각했는데, 그런 일은 없었던 모양이었다.

역시, 요제프 황자의 몸 상태가 좋아진 것을 그의 호위 기사들이 알아내지 못한 덕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샬롯을 바라보는 요제프의 시선에는, 전에 없는 결의가 가득 들어차 있었다.

샬롯은 그 당당하기만 한 시선을 보고선 작게 웃었다.

처음 만났을 때의, 금방이라도 자신을 놓아 버릴 것 같던 허무한 시선이 아니라는 게 얼마나 뿌듯한지 몰랐다.

샬롯은 입 모양으로 작게 말했다.

‘높은 곳에서 만나자.’

알아들었을까?

오늘 아침에 확인한 대진표에 따르면 샬롯과 요제프는 각기 다른 팀에 편성되어서, 설령 둘 다 예선을 통과한다 하더라도 결승전까지는 만날 일이 없었다.

하지만 요제프는 샬롯을 그저 뚫어져라 바라보기만 했다.

‘워낙 먼 거리라, 내가 뭐라고 했는지 모르나 보다.’

샬롯이 머쓱하게 웃으려는 순간, 요제프가 한층 더 결의를 다지는 눈으로 입을 천천히 움직였다.

‘높은 곳에서.’

샬롯은 그런 그가 귀엽기 짝이 없다고 생각하면서 방긋 웃었다.

샬롯과 요제프는 말로는 할 수 없는, 이 순간만의 긴장과 다짐을 서로 눈빛으로 주고받았다.

그때, 카밀라가 의석에서 일어났다.

“검을 하늘로!”

전장을 몇 번이나 호령해 본 적 있는 세티야 공작, 카밀라의 쩌렁쩌렁한 호령 소리와 함께 백 명이 훌쩍 넘는 청년들이 일제히 검을 뽑아 하늘로 치켜들었다.

이날을 위해 갈고닦은 검신들 백여 개가 나란히 허공을 노리며 빛나는 모습은 가히 장관이었다.

대회를 위해 대회장에 모여 있던 황족과 귀족들이 모두 관중석으로 물러났고, 의자와 의례를 위한 장식품들이 일제히 거두어졌다.

순식간에 대회장의 흙바닥이 정갈하게 다듬어졌다.

뿌우-.

대회장 가운데로 나선 진행자가 손에 들고 있는 거대한 고동을 한번 불어 젖혔다.

- 예선전의 참가자들은 모두 대기실로 향해 주십시오. 다시 한번 말합니다…….

러슬이 샬롯의 어깨를 툭 쳤다.

“다녀오자.”

지난 대회에서 결승까지 남았던 이들은 예선을 치르지 않는 의례 때문에 아이작은 예선에 참여하지 않았다.

샬롯은 고개를 끄덕이고 러슬과 함께 의자에서 일어났다.

당연히 걸어갈 생각이었는데, 러슬은 아무렇지도 않게 샬롯을 안아 들고 발을 옮겼다.

‘아니, 다른 곳도 아니고 대회장에서도 어린애 취급이냐고.’

샬롯은 남 보기가 조금 창피해서 발을 동동 굴러 봤지만, 오히려 그녀보다도 긴장한 듯한 러슬은 그녀의 작은 반항을 눈치채지 못했는지 저벅저벅 큰 걸음을 옮길 뿐이었다.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어쩔 수 없이 러슬의 품에 기댔다.

뭐 솔직히, 편한 건 사실이었다. 워낙 보폭이 크니까 금방 이동하는 것도 좋았고. 탑승감도 안정감이 있었고.

하지만 역시, 오빠의 품에 안겨서 대회 예선장으로 간다고 생각하니까…….

‘도통 이 상황이 현실감이 없단 말이지.’

아까 러슬이 물어볼 때까지만 해도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오빠니 뭐니 하는 현실감 없는 단어를 떠올리니까 뭔가 마음이 붕 들뜨는 기분이었다.

고개를 돌리자 저를 바라보고 있는 황금빛 눈이 있었다.

그녀가 다녀오겠다는 뜻으로 아이작에게 손을 흔들어 보이자, 아이작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곤 손가락으로 러슬을 가리켜 보이더니 제 목에 손을 그어 보였다.

‘……나보고 러슬 오라버니를 죽여 버리라는 뜻일까.’

틀림없이 대회장에서 꺾어 버리라는 뜻에 불과할 텐데, 다른 사람도 아니라 아이작이 그런 손동작을 하니까 섬뜩하게만 보이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샬롯은 피식 웃었다.

‘나보고 긴장을 풀라고 저렇게 해 주는 걸까?’

실제로 어떤 뜻인지는 모르겠지만, 아이작이 그녀를 배려해 주고 있다는 거 하나는 알 수 있었다.

습-하-.

그녀는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내뱉곤 아이작을 향해 알겠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씩 웃어 주곤 몸을 돌렸다.

무림에도 대회는 많았다.

각 가문의 후기지수를 가리는 대회, 가문끼리 붙어서 정파나 사파 젊은 인재들 사이의 서열을 가리는 대회 등등.

강함에 미쳐 있는 자들이니만큼, 그런 대회 하나하나에 열광하는 것은 이곳 못지않았다.

다만, 그런 대회에 참석할 수 있는 자격에 제한을 두지 않는다고 해도 그건 말뿐. 추천인조차 하나 없는 도화가 거기에 참석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래서일 거다. 이렇게 절대 닿지 않을 것 같던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고 있는 걸 실감할 때마다 속이 울렁거리는 건.

‘더, 네가 네 지위에서 응당 받아야 할 것들을, 더 욕심내고 더 누리라는 말이다.’

문득, 요제프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것 같았다.

샬롯은 저 혼자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그런 게 제 마음대로 잘 익숙해지지는 않았지만, 욕심내도 좋다면 그래 보자. 제 손에 들어온 것들을 놓지 않기로 해 보자.

“나는 2조라서 이쪽이야. 3조는 이 복도를 쭉 따라 걸어가면 돼. 내가 같이 가 줄까?”

샬롯이 마음속으로 다른 생각을 하는 사이에, 어느새 둘은 갈림길 앞에 서 있었다. 그녀는 제 옆을 스쳐 지나가는 많은 참가자들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뭐야, 내가 애도 아니고. 그 정돈 할 수 있어.”

“……애가 아니기는.”

“나중에 나한테 지고 울지나 마.”

러슬이 기가 막힌다는 얼굴로 샬롯을 내려다봤다.

“너한테 어떻게 지냐? 너한테 지려면 네가 결선에 올라와야 되는데.”

샬롯은 고개를 저었다.

러슬이 나이에 비해 대단한 오러와 힘을 가진 실력자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저렇게 긴장한 얼굴로 뭐 실력 발휘를 얼마나 할지는 모를 일이다 싶어서.

“오라버니가 남 걱정을 할 때가 아니야. 잘 해.”

“……그래.”

“긴장하지 말고. 어?”

러슬에게 안긴 채였기에, 샬롯은 손쉽게 손을 뻗어 러슬의 뺨을 잡고 슬쩍 늘렸다가 놓았다. 아직 수염이 나지 않은 부드러운 볼살이 말랑말랑하게 늘어났다가 도로 줄어들었다.

러슬은 황당하다는 얼굴을 했지만, 이내 바람 빠지는 소리와 함께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러슬도 제법 긴장이 풀린 얼굴이 되어 있었다.

“그래. 알겠다. 우리 꼬마 아가씨, 이렇게 오빠 뺨을 뭉갤 정도의 정신력이라면 잘 해 낼 거야. 조금 이따 보자.”

“응.”

“예선만 통과하는 거야. 알았지?”

“그건 내가 알아서 할게.”

샬롯은 러슬이 몸을 숙여 주자 얼른 그의 품에서 내렸다. 그러곤 말과는 달리 아직도 걱정되는 눈치로 서 있기만 한 러슬을 흘끗 바라보곤 그보다 먼저 갈림길에서 오른쪽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 * *

대기실로 막 들어서는 순간이었다.

황후를 퍽 닮은, 보랏빛 머리카락의 덩치 큰 사내가 온갖 폼을 다 잡으며 벽에 비스듬하게 기대 서 있는 게 보였다.

황족이란, 아름답디아름다운 여인들과 사내들이 또 그에 걸맞은 짝을 찾아 유지하는 혈통이라 그럴까?

작중에서 그가 맡고 있는 역할을 생각해 보면, 도저히 예뻐 보일 수가 없는데도 리카르도는 객관적으로 보아서 잘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마에서부터 턱까지 흐르는 선이 도드라져 있었고, 남자다운 턱과 보기 좋은 귀, 단정하게 잘 정리된 보랏빛 머리카락.

보석이 박힌 헤어밴드나 어깨띠 같은 것을 걸치고도 장신구에 묻힌다는 느낌이 전혀 없을 정도의 화려한 얼굴이었다.

샬롯은 주변의 여자아이들 사이에서 들뜬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을 들으며 고개를 살래살래 저었다.

마지막으로 그와 만났을 때, 저와 그 사이는 그리 썩 좋지는 못했다.

도대체 예선에 출전하지도 않는 리카르도가 여기에서 왜 예선 대기실 입구에 버티고 서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피차 마주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샬롯은 황자가 자리를 비킬 때까지 기다릴까 하다가, 그의 앞으로 우르르 몰려 지나가는 귀족들 사이에 섞여 들었다.

여기에 50명 가까운 귀족 아이들이 모여 있는 것을 생각하면, 황자가 굳이 제게 신경을 쓸 것 같지도 않았다.

‘뭐…… 설마, 날 알아보겠어? 내가 바로 투명 인간이라는 별명까지 얻은 샬롯인데.’

막 리카르도의 옆을 지나가는 순간이었다.

“안녕, 샤를로테 세티야.”

기다렸다는 듯, 리카르도가 그녀의 이름을 정확히 호명했다.

‘꺅. 리카르도 황자님께서 인사하셨어!’

‘넌 귀가 안 좋니? 너한테 인사한 게 아니라 샬롯에게 하던걸?’

‘샬롯에게……? 황자님이……?’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한 조합에 사람들의 시선이 몰려드는 것을 느끼며, 샬롯은 한쪽 입꼬리를 억지로 끌어올리며 무릎을 살짝 굽혀 보였다.

“……안녕하십니까.”

“얘기 좀 하지.”

리카르도는 그 말을 끝으로, 먼저 몸을 돌렸다.

‘어머, 두 분이 따로 어딜 가시는 거야?’

‘리카르도 황자님은 예선 안 치르시잖아? 샤를로테 님을 뵈러 온 거 아냐?’

‘세상에, 샬롯이 무슨 사고를 또 친 거 아냐?’

온갖 추측이 둘의 등 뒤를 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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