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
“대진표, 이젠 보여?”
“……응. 고마워요, 아이작 오라버니.”
샬롯은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을 털어 내고 얼른 대진표를 둘러보았다.
대진표를 본 샬롯은 제 이름을 찾기도 전에 요제프라는 이름에 시선이 가 닿았다.
샬롯은 대번에 머리에 열이 솟았다.
‘3황자인데, 예선에 참여해야 한다고? 진짜 쓰레기 같은 놈들이네.’
지난 대회에서 5위 안에 들었던 자들은 예선은 자동으로 통과하는 게 관례였고, 거기에 더불어 지난 대회에 어려서 참여하지 못했던 2황자도 예선에는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 3황자는 예선에 나가야 본선에 진출할 수 있다는 게 말이나 되냐고.
당연히 아이작의 이름도 예선에는 적혀 있지 않았고, 본선 대진표에 이미 적혀 있었다.
“이거 완전, 비운의 연인이나 다름없군.”
문득, 손으로 감싸 쥐고 있는 아이작의 머리통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네?”
“조가 갈려서. 기왕이면 일찍 붙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아이작의 말을 듣고서야, 샬롯은 대진표에 조가 나뉘어 있는 것을 눈치챘다.
크게 세 조로 나뉘었다. 1조에는 아이작과 1황자가, 2조에는 러슬과 요제프, 그리고 2황자 리카르도가, 3조에는 비야키와 샬롯, 란슬롯이 들어 있었다. 아무래도 본선과 예선을 통합한 조 편성인 모양이었다.
샬롯도 그제야 아이작의 말을 이해하곤 고개를 끄덕였다.
“오라버니랑 제가 붙으려면 결선까지 가야 하네요.”
“그래.”
토너먼트 방식이라서 한 번 지면 다시는 도전 기회가 없었고, 다른 조와는 결승에서만 만나게 되어 있었다.
1, 2, 3조에서 끝까지 살아남은 각기 두 명씩이 결승에 진출하고, 거기서 한 번에 승패가 결정 난다고 했다. 동시에 치르게 되는 모양이었다.
샬롯은 고개를 한쪽으로 길게 기울이곤 씩 웃었다.
“재밌을 것 같네요.”
아이작은 깊게 웃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재밌었다. 그저 무료하기만 할 예정이었던 이 대회가.
* * *
제롬이 통솔하는 세티야 가 아이들은 일제히 관중석을 가로질러 첫 번째 열을 향해 걸어갔다.
절도 있게 걷는 백금발 아이들 사이로, 불쑥 섞여 있는 분홍빛 머리카락 여자아이의 존재는 참 눈에 띄는 것이었다.
미리 대회장에 가 앉아 있던 카밀라도 입장하는 제 가문의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묘한 공기를 읽었다.
칼그림자의 날은, 매년 돌아오는 날이 아니었다.
5년에 한 번 겨우 돌아오는 행사였다.
그러니만큼 서로 나이가 다른 아이들이 출전했고, 당연히 그 시기에 성인이 되었거나 너무 어린 아이들에게는 형평성이 맞지 않는 대회가 되었다.
하지만 그게 문제가 되지 않을 만큼 지금에 와선 각 가문의 후기지수들이 제 가문의 명예를 걸고 출전하는 대회로 당당히 자리매김했다.
당연히, 매년 그렇듯 올해의 우승도 황가 아니면 세티야 가에서 차지할 것이 뻔했다.
이 대회의 관중들을 보면 민심을 알 수 있었다.
사람들이 어떤 이에게, 얼마나 기대를 걸고 있는지. 누구의 우승에 기뻐하는지.
그런 것들이 후계자에 적합한 인물이 누구인지를 암시하기도 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입을 모아 기대하는 대회 또한, 2황자의 대전이나 아이작의 대회가 되어야 했다.
그런데…….
“샬롯 세티야가 이번 대회에 출전한다는 소식은 들으셨지요, 마담?”
“들었냐고요? 아니, 그 정도가 아니라, 란슬롯을 저번 대련에서 몇 합 만에 꺾어 놨다고 하던걸요?”
“아니, 그 재능도 없는 아이가 그렇게까지 수련을 했다는 건가요, 그럼?”
“그게 말이나 됩니까? 전 샬롯이 예선 1회전에서 떨어지는 데 2하스론 겁니다. 아주 부인들은 헛소문에만 귀가 밝으시구려.”
“허, 이 양반이. 좋아요. 그럼 전 샬롯 세티야가 1회전에서 통과한다는 데 20하스론을 걸겠어요.”
대회장 입구에서부터, 카밀라가 들어선 대회장의 중앙에 이르기까지 들려오는 이름이라곤 온통 샬롯의 이름뿐이었다.
‘……이래서야 마치…….’
“이래서야 마치, 세티야 가 막내 따님이 오늘의 주인공인 것 같군요.”
제 생각을 읽은 듯한 황후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카밀라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를 맞이했다.
보라색 머리카락을 길게 한쪽으로 말아 내린 셀렌 황후는 언제나처럼 우아하고 강렬한 복색을 걸치고 있었다.
새하얀 튜닉 위에 길게 늘어뜨린 금빛 천을 왼쪽 어깨에서부터 둘러 오른 어깨에 고정했고, 황제와 황후만 사용할 수 있는 보라색과 금색 실을 잔뜩 섞어 장식한 자수 천인 타블리온을 두르고 있었다.
원체 무를 숭상하는 나라이니만큼, 정식 황궁 무도회가 아닌 이상에야 체이커 국 여인들은 이런 식으로 여자와 남자 구분 없는 의복을 입었다.
다만 보통은 황후가 황제보다는 덜 화려한 색을 선택하게 마련인데, 셀렌 황후는 절대 황제에게 뒤지지 않게 화려하게 색을 섞어 쓴다는 게 특징이라면 특징일까.
카밀라는 그런 셀렌 황후의 옷을 흘끗 바라보며 깊이 고개를 숙였다.
“오셨습니까, 황후 폐하.”
“그래요. 이번에도 훌륭한 후계자 후보를 여럿 길러 내신 모양입니다. 아이작에 비견될 인물은 없다 여겼는데.”
황후가 손을 내밀었고, 카밀라는 공작의 지위에 올라 있는 만큼 예외적으로 사내들처럼 그 손등에 키스하여 예를 표했다.
그리고 공손히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런 것은 아닙니다. 빈 수레가 요란할 따름이지요. 워낙 의외의 아이가 조금이나마 노력을 경주한 것을 가지고 사람들이 놀라서 그렇지, 별반 다른 변수는 되지도 못할 겁니다.”
황후는 부채로 입을 가리며 카밀라를 바라보았다.
“정말 그래야 할 겁니다.”
“그럴 겁니다.”
황후의 연한 녹색 눈동자가 반짝거렸다.
“그 아이가 지난번엔 제 앞에서 3황자를 비호하더군요.”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카밀라는 공손하게 웃었지만, 속으로는 혀를 찼다.
최근에는 칼그림자의 날 준비에다 갑자기 국경 근처에서 신경전을 벌이기 시작한 이웃 나라 세레스 제국 때문에 정신이 혼미할 정도로 바빴다. 그래서 샬롯과 3황자가 붙어 지낸다는 보고를 분명 두어 번 들었던 것도 같건만 제롬에게 일러 타이른다는 게 통 그럴 짬이 나질 않았다.
원래 공고한 동맹은 별일도 아닌 걸로 금이 가게 마련이었다.
손녀 단속을 제대로 못 한 건 틀림없이 저와 제롬의 잘못이었다.
카밀라는 속으로 지금은 다른 아이들을 돌보느라 제 곁에 나타나지 않은 제롬을 만나기만 하면 잔소리를 쏟아 낼 것을 결심하며 부드럽게 말했다.
“아무런 염려도 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그래야 할 겁니다.”
“물론입니다.”
“예정대로, 잘 진행되길 빕니다. 우리 사이가 틀어지지 않도록.”
황후는 그제야 자리에 앉았지만, 아직도 심기가 그리 편하지는 않은 얼굴이었다. 그녀는 속에 못다 한 말이 남았다는 듯 카밀라를 올려다보며 말을 덧붙였다.
“3황자와 샬롯 세티야라는 그 아이가 그리 친하다 들었는데, 혹여라도 그 아이를 몰래 염두에 두고 키워 오셨던 거라면…….”
“별걱정을 다 하십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미소가 오가는 부드러운 대화의 현장이었지만, 속내는 달랐다.
아까는 정말로 샬롯이 눈에 거슬렸던 거라면, 지금 셀렌 황후가 하는 말은…….
‘샬롯이 보잘것없는 실력을 가진 아이라는 걸 두고 비웃는 소릴 하는 거야.’
아무리 제 가문에서는 천대받는 아이라지만, 남이 그것을 두고 뭐라고 하면 원래 속이 좋지 않은 법이다.
카밀라는 속내에 치미는 화를 숨기려 최대한 입꼬리를 올려 웃어 보였다.
다행히도, 그 순간 황제가 들어와 황후의 옆자리를 차지했다.
“황제 폐하, 오셨습니까?”
“오랜만에 뵙습니다, 폐하.”
“황제 폐하를 뵙사옵니다. 칼그림자의 날 축복이 함께하시길.”
주위의 귀족들이 우르르 일어나 인사를 건네었다.
그 덕분에 카밀라와 황후의 대화는 거기서 끝이 났다.
카밀라는 황제에게 인사를 올리며 그를 바라보았다.
황제는 건재함을 과시하기 위하여 소매가 없는 튜닉을 입은 모양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풍채가 제법 좋고 양팔의 근육이 보기 좋은 황제에게, 간편해 보이는 튜닉과 황후와 꼭 같은 장식의 타블리온은 제법 잘 어울렸다.
산체스 황제는 첫째와 둘째 황자와는 닮지 않은, 검은색에 가까운 잿빛 머리카락과 잿빛 수염을 가지고 있었다.
‘2황자 리카르도에게 산체스 황제의 반만 되는 인품만 있어도, 내가 걱정할 일이 없을 텐데.’
“어서들 앉게, 하하하. 이렇게 좋은 날 아름다운 내 사람들과 함께하니 실로 기분이 좋소.”
카밀라는 황제의 말에 주위 귀족들과 함께 의자에 앉으며 한숨을 삼켰다.
그녀가 이끌고 있는 세티야 가문은, 단순히 권위와 재산을 대물림하는 공작가가 아니었다.
언제 무너질 지 모르는 체이커 국을 똑바로 지탱하는 가장 큰 기둥이었다.
그녀가 점찍어 둔 유일한 후계자인 첫째 아들이자 제롬의 형인 로룸이 불미스러운 사고로 일찍 죽은 뒤로, 카밀라는 그 누구에게도 자리를 물려주지 않고 쉰이 넘는 나이가 되도록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제 눈에 들 만큼의 재능과 지도력을 가진 자가 나타나기 전까진 가주의 자리를 내어 줄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제 아들 대에서는 인재를 찾지 못했지만, 제 손자 대에서는 어쩔 도리 없이 제가 물러나야 할 것이다.
지금이야 카밀라가 전장을 호령하는 현역이었지만 제아무리 대단한 기사라도 세월 앞에는 어쩔 도리가 없는 법이니까.
아마, 아이작이 되겠지.
압도적인 재능에서 승패는 결정 난 거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아이작에겐 결정적인 문제가 있어.’
2황자와 아이작은 이 나라를 이끌어 가는 기둥으로서는 서로에게 잘 맞는 파트너가 아니었다. 한 명이 강하다면 한 명은 유해야 했다.
‘……2황자와 아이작이 다음 세대를 책임지도록 두는 게, 정말로 최선의 선택일지. 이번 대회를 통해서 다시 한번 알게 되겠지.’
어차피 그녀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시대가 만들어 낸 흐름이 이미 그렇게 흐르고 있으니 어쩔 도리야 없겠지만.
카밀라는 무거운 마음으로 좌석에 몸을 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