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파 공녀님 (46)화 (46/123)

#46.

뭐가, 어떻게 된 건지도 모르는 채로, 란슬롯은 다음 순간 제가 마차 바닥에 드러누워 있다는 것을 알았다. 또한 제가 내민 손은 완벽히 제압당해 있었고, 제 몸 위를 샬롯이 깔고 앉아서 저를 차가운 눈으로 내려 보고 있다는 것도.

그 풀빛 눈에는, 제가 아는 샬롯의 그 어리숙함 따위는 단 한 점도 남아 있지 않았다.

가주 카밀라의 눈빛에서나 본 적 있는, 서늘하리만큼의 당당함만이 있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내 몸에 손대지 마. 이젠 내가 네게 놀아날 사람이 아니라는 걸 너도 알 텐데 굳이 덤비는 건, 내가 여자라서인가?”

절대, 우위를 점할 수 없다.

그동안 생각했던 나쁜 예감들은, 예감이 아니었다.

란슬롯은 그 지독한 패배감 속에서도, 다른 생각이 먼저 들었다.

그녀가 저를 이런 식으로 보는 게 싫었다.

아이작은 온기 섞인 미소로 바라본 주제에. 저에겐 시선 한 번 안 주다가 이제야 돌아보고서, 이렇게 죽일 듯한 눈으로 내려다보는 게 싫었다.

“이거 놔!”

뒷자리의 소란을 들었는지, 마차가 느리게 달리다가 덜컹, 소리와 함께 멈췄다.

그것과 함께, 란슬롯은 샬롯의 팔을 뿌리치고 그대로 마차 밖으로 뛰쳐나갔다.

이해할 수 없이 속이 상했다. 속이 상해서 죽을 것 같았다. 그리고 저 자신이 창피하고 부끄러워서, 정말이지 죽고 싶었다.

* * *

그 뒤로, 이상하게 평화로운 나날이 흘렀다.

란슬롯이 이상할 정도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게 된 게 결정적인 원인이었다. 게다가 아이작과 러슬이 샬롯을 감싸고도는 바람에 다른 아이들은 요제프 황자를 괴롭힐 틈을 노리다가도 샬롯이 나타나면 귀찮다는 얼굴로 자리를 피해 버렸다.

평소 같으면 요제프 황자가 잘 지내는 꼴을 보지 못한 2황자가 직접 나서서 드잡이질이라도 했을 테지만, 다른 사람도 아니고 고작 멍청이 샬롯과 둘이서 검 수련을 한다는 말을 들은 2황자는 그마저도 귀찮아졌던 거다.

황궁에 있는 화려하고 삐까뻔쩍한 검 수련장이니, 검술 수련 스승이니, 황족을 위해 완벽히 준비된 수련 상대들 같은 것들을 다 갖추고 있는 2황자 자신과 너무나 비견되는 보잘것없는 상황에 관해 이야기를 들으니까.

덕분에 요제프와 샬롯의 마지막 사흘도 평화롭게 흘러갔다.

그리고 어느덧, 칼그림자의 날 아침이 밝았다.

체이커의 수도, 비브로슈의 정중앙에는 황궁이 위치해 있었다. 그리고 황궁의 동쪽, 가장 너른 도로가 잘 정비되어 있는 길의 정중앙에는 거대한 원형 경기장이 있었다.

수십, 수백의 인부가 동원되어 체이커 국 초대 황제 대에 건설된 그 경기장은 체이커 국의 자랑이었다.

며칠 전부터 비브로슈에 투숙하거나 이른 아침에 수도에 도착한 인파는 새벽부터 경기장 앞으로 몰려들어 줄을 섰다.

수도 경비병들이 총동원되어 구경꾼들을 줄 세우고 질서를 통제했고, 미리 허가받은 행상들이 그 사이를 바쁘게 오갔다.

아직 성인이 되지 못한 자들 중에서 우열을 가려내는 대회인 만큼, 각 가문이 유망주에게 거는 기대는 대단했다. 이 대회의 결과에 따라, 그동안 각 가문이 온갖 자원과 노력을 쏟아 길러 낸 공을 확인할 수 있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관중들 또한 각 귀족 가문의 다음 세대를 이을 후기지수들에 대한 기대감이 대단했다. 그간 토벌하느라 수도를 비웠던 각 기사단을 비롯하여, 체이커 국의 모든 관심이 대회장으로 쏠렸다.

세티야 가도 아주 이른 새벽부터 평소와 다른 긴장된 공기가 맴돌았다.

카밀라는 누구보다 먼저 황제를 수행하기 위해 황성으로 떠났고, 제롬은 직계와 방계 아이들이 준비되길 기다리며 마지막 대회 준비를 점검했다.

샬롯도 아침부터 참가 준비를 하느라 바삐 머리를 단장하고 새로운 옷을 챙겨 입었다.

“심장이 튀어나올 것 같아요.”

베티가 샬롯의 옷 시중을 들다 말고 울상을 하곤 긴 한숨을 쉬었다.

샬롯은 그런 그녀를 다독여 주었다.

긴장은 되지 않았다.

오히려, 이 순간을 기다려 왔다.

그녀는 누구보다 신난 얼굴로 밝게 웃어 보였다.

“걱정할 거 없어. 베티는 나만 믿어.”

베티는 너무나도 듬직한 샬롯의 말에, 아가씨가 언제 이렇게 장성했나 싶어 눈물이 다 찔끔 새어 나왔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만은 작디작은 아홉 살 아가씨가 대견하기보다는 너무 걱정되었다.

요즘 샬롯은 베티를 정말 제대로 된 한 명의 사람으로 대접해 주었고, 아픈 가족까지 살뜰하게 보살펴 주었다.

늘 떼를 쓰고 바닥에 드러누워 사람을 난처하게 만들었던 옛날의 모습은 찾아볼 수도 없을 정도로 사람을 배려해 주었다.

원래도 충정을 다해 모셨지만, 요즘의 베티에게 샬롯은 충성을 바치는 대상이라기보다는…… 그냥 한 명의 가족 같았다.

샬롯이 저를 그렇게 대해 주니까.

베티는 샬롯이 아무리 재능이 없다고 하여도, 그런 것은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제 아가씨가 너무 소중했다.

“다 됐어요.”

베티가 손을 놓고 물러서서 거울을 바라봤다.

팔다리에 거슬리지 않는 붉은색 무복에, 머리를 높게 하나로 올려묶은 아가씨는 정말 앙증맞고 귀여웠다. 거기다가 키의 반절도 더 될 것 같은 기다란 검을 허리에 묶어 맨 모습은 귀엽다 못해 깨물어 주고 싶었다.

‘이렇게까지 너무 대단한 가문에 태어나지만 않았다면, 아가씨도 평범하게 사랑받으며 자라셨을 텐데.’

그깟 재능이 뭐라고.

베티는 손을 뻗어 샬롯의 손을 꼭 쥐었다.

그간 그래도 요제프 황자님과 함께 매일같이 수련한다고 나가시더니만, 마냥 보드랍기만 하던 통통한 손바닥에 굳은살이 조금 박인 게 손끝으로 느껴져 왔다.

하지만 그것마저도 그냥 다 안쓰럽기만 했다.

“……네. 그런데, 아가씨.”

“응?”

베티는 머뭇거리며 솔직한 진심을 전했다.

“혹시라도, 예선에서 탈락해도 괜찮으니까. 다치지 마시고 무리하지 마셔요…….”

샬롯은 조금 놀란 듯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만면에 미소를 드리우며 깊게 웃었다.

베티는, 그 웃음을 홀린 듯이 바라보다가 저도 모르게 샬롯을 꽉 껴안았다.

제 아가씨가 날로 좋아진다고만 막연히 생각했는데, 가끔 샬롯이 지금처럼 제 눈앞에 놓인 행복이 견딜 수 없이 기쁘다는 얼굴을 하면 정말이지 너무 사랑스러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예선에서 탈락하기도 쉽지 않을 것 같지만, 그래도 걱정해 줘서 고마워.”

샬롯이 속삭이는 말이 허세라고 생각한 베티가 그녀를 더욱 힘주어 껴안으며 눈물을 숨겼다.

샬롯은 이제 베티가 저를 폭 안아도 더 이상 놀라지 않았다.

그저 다 큰 아이처럼, 조용히 베티를 마주 안아 주었다.

샬롯도 베티가 너무 소중하고 고마웠다.

그녀는 눈을 꼭 감고 이 순간을 즐겼다.

따뜻한 품에 안기는 건, 여전히 조금 낯설지만 언제나 기분 좋은 일이었다.

* * *

대회장에 도착한 이들을 가장 먼저 맞이하는 건, 멀리서도 볼 수 있을 만한 거대한 대진표였다. 사람 키의 몇 배는 되는 거대한 종이에 그려진 대진표는, 대회장 입구마다 여러 장씩 붙어 있었다.

‘요제프의 이름은 어딨지?’

아무리 대진표가 거대하다고 해도, 앞에 어른들이 잔뜩 늘어서 있어서 샬롯의 눈에는 대진표의 가장 윗부분 몇 줄만 보였다.

샬롯이 제자리에서 팔짝팔짝 뛰면서 어떻게든 아랫부분을 보려고 애를 쓰는 순간, 양쪽에서 손이 불쑥 들어왔다.

“이거 놓지.”

“아니, 아버지. 샬롯은 제가 돌보겠습니다. 신경 쓰지 마시죠. 지금까지 그러셨던 것처럼.”

“하지만 내가 더 키가 크질 않느냐. 네가 안아서 뭐가 그리 잘 보이겠어?”

“제 팔이 더 두껍습니다, 아버지.”

샬롯이 당황해서 위를 올려다봤다.

제롬과 러슬이 어정쩡하게 손을 내민 자세로 아웅다웅 서로를 향해 쏘아붙여 대고 있었다.

저를 안아 올리려고 다투는 이들을 보는 건 또 처음이었다.

하지만 도통 결론이 나지 않는 둘의 설전을 보는 건 재미있고 고맙기도 했지만 큰 도움은 되지 않았다.

‘……그냥 앞 열로 가서 보는 게 빠르겠다.’

샬롯이 그렇게 결론을 내리고 발을 움직이려는 순간, 불쑥 들어온 손이 그녀를 가볍게 안아 올려 목에 올려 주었다.

샬롯은 놀랄 만큼 부드러운 백금발 머리카락이 제 손가락 안에서 사르르 움직이는 것을 느끼다가, 문득 제가 누구의 목에 목말을 타고 있는 건지를 깨닫고 몸을 굳혔다.

‘……히익, 아이작 오라버니.’

로맨스 소설의 배경 묘사니까, 아이작이 가주가 된 뒤 피바람이 불었다는 묘사로 끝난 거지…… 실제로는 정말 끔찍한 참상이었을 거다.

아이작이 가주가 된 뒤 그가 세티야 가를 마음대로 움직이는 데 방해가 되는 이라면 주저 없이 몰아내고, 추방시키고, 심지어는 지하 감옥에 유폐해 버리거나 죽이기도 했다고 나와 있었다.

그런 아이작이 누군가에게 잘해 주거나 친하게 지냈다는 묘사 같은 건 본 적도 없었다.

이후에도 누군가와 혼인했다는 묘사도 없었을 정도였으니까.

샬롯은 이젠 많이 적응했다고 생각했지만, 아무래도 아이작이 이렇게 제게 잘해 줄 때마다 자꾸 소설 속의 묘사들이 떠올라서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따지고 보면 저와 가장 친근한 인물 두 명이 모두 미래의 학살자라니.

‘어쩌면 내 인생, 아주 잘못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는 걸지도 몰라.’

샬롯이 혼자 머릿속으로 중얼거리는데, 미래의 학살자 중 한 명이 말을 걸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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