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파 공녀님 (44)화 (44/123)

#44.

샬롯이 마차를 타러 본관 앞으로 나왔을 때, 미리 나와 있는 인물은 의외로 란슬롯이었다.

은색이 많이 섞인 금발을 보고 샬롯은 조금 놀라 멈춰 섰다.

“무슨 일이야?”

“……뭐가.”

“아니, 왜 여깄냐고.”

“나는 본관에도 오면 안 되는 사람이다, 이건가?”

란슬롯은 지난번 마지막으로 봤을 때보다 어쩐지 더 골이 나 보였다.

평소에는 그저 얄밉기만 했는데. 방계라 그런지 완벽하게 금발이 아니라 은색이 잔뜩 섞인 금색 머리카락에 녹색 눈을 한 란슬롯은 이렇게 따로 떼어 놓고 보니 제법 귀엽고 잘생겨 보이긴 했다.

샬롯은 뚱한 얼굴을 한, 체격 좋은 소년을 보다가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어쩐지 혼자 떨어져 있는 란슬롯을 보니, 조금 우습고 하찮아서.

“뭐야, 왜 웃어?”

“……하하하.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내가 우스워?”

“아니, 아닌데. 까르르.”

“이게, 진짜. 자꾸 이런 식으로 나오면 쇼핑이고 뭐고 없어.”

“……응?”

샬롯은 웃음을 참으려고 이를 살짝 깨물다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쇼핑?

그러고 보니, 시간 맞춰 본관 앞으로 온 건데 대기하고 있는 마차는 한 대였고 제롬의 모습은 보이질 않았다.

‘……아, 란슬롯과 함께 가라고 한 거구나.’

서운한 마음은 들지 않았다.

제롬이 한가한 몸이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었고, 검을 사 주겠다고 마음을 써 준 것만 해도 고마웠으니까.

샬롯은 방긋 웃으며 시종의 부축을 받아 먼저 마차 안쪽에 올라탔다. 그러고서 제 옆자리를 두드리며 란슬롯에게 얼른 타라고 재촉했다.

란슬롯은 뭐 씹은 듯한 표정으로 그녀의 옆자리를 오래 바라보았다.

한참이 지나고서야 그가 샬롯의 옆자리에 올라탔고, 두 사람을 태운 마차는 서서히 출발했다.

샬롯은 검을 산다는 생각에 너무 들떠서 머릿속으로 이런저런 검의 모양을 떠올려 보며 다리를 흔들거렸다. 휘파람까지 불어 대던 그녀는 지겹다는 얼굴을 하고 있는 란슬롯에게 문득 말을 걸었다.

“혼자 쇼핑해도 되는데, 굳이 같이 가 줘서 고마워.”

란슬롯은 샬롯을 흘끗 바라보았다.

샬롯은 그냥 제 할 말을 한 게 볼일의 끝인지, 더 이상 말을 붙이지 않고 그냥 즐겁게 이 상황을 즐기고 있었다.

매일 보는 창밖이 뭐가 그렇게 신기한지, 마치 세티야 가를 벗어나는 게 몇 번 되지 않는다는 듯이 촌뜨기마냥 창밖을 신이 나서 구경해 댔다.

들떠서 볼이 붉게 상기된 샬롯의 얼굴은, 그냥 그 나이 또래의 여자아이였다.

세티야 가답게 제대로 옷을 갖춰 입고, 작은 구두까지 갖춰 신은 그녀는.

‘대체 뭐냐고.’

그는 지금 이 상황이 불편해 죽을 지경이었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인지 콕 집어서 말하기도 힘들 정도로 모든 것이 불편했다.

직계 출신인 샬롯의 수발을 들라고, 바쁘지 않은 저를 콕 집어 시키는 것도 짜증이 났다. 게다가 할 줄 아는 것도 없는 샬롯에게 검을 사 주는 것도 짜증이 났고…….

무엇보다도…….

할 줄 아는 게 없어야 하는 샬롯이 할 줄 아는 게 너무 많아서 짜증이 났다.

란슬롯은 밤잠까지 설쳐 가며 샬롯과의 대련을 복기했던 지난 밤들을 떠올렸다.

샬롯이 떨어트렸던 나뭇가지를 손 안에 들고, 오러를 쳐내는 것을 연습해 보겠다고 설친 날도 있었다. 거기에 오러를 주입하는 순간 그 목재는 가루가 되어 흩어졌다.

요즘 정말이지, 몇 날 며칠을 밤잠을 못 자고 샬롯에 대한 생각밖에 하지 않았다.

이해가 안 되니까.

당연히 제 발아래에 있어야 하는 여자애가, 제 앞에서 가당찮게 설치고 다니는 게 이해가 안 되니까.

오죽하면, 요제프 황자를 못살게 구는 소중한 일과까지 다 마다하고 주변 사람들을 붙들고 대련만 해 댔겠는가.

그런데 지금 바로 그 샬롯이 옆에 앉아 있는 거다.

당연히 짜증이 날 수밖에 없었다.

저는 지금, 샬롯의 일 때문에 이렇게 매일매일 신경을 쓰고 있는데, 정작 당사자인 샬롯은 아무렇지도 않게 어릴 때부터 수도 없이 보아 왔을 바깥 풍경이나 신경 쓰고 있으니까.

“뭐가 그렇게 좋냐?”

당연히, 말도 곱게 나오질 않았다.

샬롯은 제 감사 인사 이후로 한참 동안 조용히 있다가 갑자기 말을 툭 쏘아붙이는 란슬롯을 얼른 돌아보았다.

“응?”

“뭐가 그렇게 신나냐고.”

“아, 진검. 내 진검을 가져 본 적이 없거든. 뭐, 빌린 거라면 가졌었지만…….”

란슬롯은 샬롯이 별것도 아닌 것에 들떠 하는 것도 짜증이 났다.

“칼그림자의 날, 대회에 출전한다며. 거기 대회 등록하려면 검이 필요한 거 정돈 상식 아닌가? 그래서 사는 거지, 별 대단한 이유로 네게 선물하시는 것도 아니야.”

“……아, 그래? 몰랐네. 그런 이유였구나.”

“그래.”

샬롯의 동공이 조금 커졌다.

란슬롯은 기세가 등등해서는 칼그림자의 날에 대해 설명을 덧붙였다.

칼그림자의 날은 체이커 국의 미성년 중 가장 높은 수준을 가진 이를 가려 내는 대회였지만, 대외적으로도 체이커 국의 강함을 과시하는 대회이기도 했다.

워낙 체이커 국을 집어삼키려는 대국들이 바로 옆에 딱 붙어 있다 보니 생긴 문화였다.

그러다 보니 대회 내에서 오러를 사용하는 것도 허용하고 있었기에, 대회에서는 그날 사용할 무기를 사전 등록받고 있었다.

란슬롯의 설명을 들은 샬롯은 혀를 찼다.

‘아니,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그 소설책에 나온 내용은 요제프의 아름다운 외모 묘사랑, 황녀님이 요제프를 얼마나 사랑하는지에 대한 게 8할이었는데.’

“싫어?”

샬롯은 냉큼 손을 저었다.

“아니, 좋아. 너무 좋아. 가자, 가자.”

하지만 좋다는 말과는 달리, 표정은 아까보다 한층 가라앉아 있었다. 게다가 조금 기가 죽은 듯 등을 붙이고 앉았고, 다리도 흔들지 않았다.

란슬롯은 그런 샬롯을 흘끗 바라보곤 기세등등하게 웃어 보였지만, 어쩐지 속이 그렇게 생각만큼 좋진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제가 바라는 건 이런 게 아니었다.

덜컹.

마침맞게 마차가 멈춰 섰다.

란슬롯은 시종의 시중조차 거절하고 마차에서 먼저 뛰어내리면서, 계속해서 골몰해 있었다. 도대체 제가 바라는 게 뭔지. 샬롯에게 뭘, 어떻게 해야 이 짜증으로 가득한 심사가 좀 나아질지.

샬롯과 란슬롯은 기사단에서 검을 공수하곤 하는 대장간이 쭉 모여 있는 골목에 서 있었다.

입구에서부터 몇 개의 대장간을 지나친 샬롯을 보며, 란슬롯은 미간을 모았다.

“……그냥 얌전히 내가 골라 주는 대로 선택하지?”

“응? 아…… 응. 그런데, 검이잖아.”

“검인 걸 누가 몰라? 잘 모르면 그냥 내가 골라 준다니까?”

“자기 무기를 남이 고르게 하는 무인도 있어? 어차피 따라온 거 좀만 참을성 있게 기다리면 안 돼?”

‘지금 자기를 무인이라고 부른 거야? 샬롯 주제에……?’

샬롯의 말은 당연한 말이었지만, 주제도 모르고 스스로를 무인이라고 칭하는 것 자체가 가소로웠다.

‘……아오.’

평소 같았으면 비웃었을 란슬롯이었지만, 오늘만은 어쩐지 비웃을 기분조차 제대로 들지 않았다.

어딘가 마음속에 돌이 박힌 것처럼 석연치 않았고, 자꾸 저 혼자 샬롯을 쳐다보게 되는 것에 머리끝까지 짜증이 솟구칠 뿐이었다.

골목에서 첫 번째에 자리 잡은 대장간은 가장 목이 좋은 곳이니만큼 다른 곳보다 더 화려한 장식이 되어 있는 값비싼 무구들을 위주로 팔았다.

하지만 샬롯은 보석이 줄줄이 박혀 있는 무구에는 시선도 주지 않고 그 대장간을 지나쳤다. 어찌나 태도가 단호한지 란슬롯이 저는 그곳에서 검을 맞췄다고 말해 보았자 소용이 없었다.

그 옆집은 기사단에 무기를 납품하는 유명한 대장간으로, 오래 써도 이가 잘 나가지 않는 단단하고 무거운 검을 주로 만드는 곳이었다.

그리고 세공을 아름답게 하는 그 옆집까지도 그냥 지나친 샬롯은 골목의 가장 안쪽에 있는 작고 초라한 집 앞에서 발을 멈췄다.

“……어, 여기다.”

란슬롯은 샬롯이 멈춰 선 대장간을 한 바퀴 휘둘러보았다.

얼핏 보기에도 금방 망할 것같이 생긴 대장간의 앞에는, 다른 가게들처럼 다양한 검을 전시해 두지도 않았다.

오히려, 일반인들을 상대로 하는 곳인지 몇 개의 농기구만 바구니에 담겨 놓여 있을 뿐이었다.

“너, 내가 골라 준다고 할 때 그냥 내 말 듣지 그래? 다 너 좋으라고 해 주는 말이다.”

“와…… 이거 너무 좋은데.”

샬롯은 란슬롯의 말이 들리지도 않는다는 듯, 그의 말을 한 귀로 흘리며 대장간 앞에 놓인 쇠스랑을 만져 보았다.

어차피 진기를 다룰 수 있는 무림인에게, 무기라는 것은 그저 하나의 수단에 불과했다.

솔직히 그녀 정도의 경지가 되면 창을 쓰든, 검을 쓰든, 단검을 쓰든 그게 그렇게까지 영향을 주지도 않았다. 검의 날카로운 정도도 상관없었다.

샬롯은 전생에도 그럴듯한 좋은 검을 가져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좋은 검이 뭔지는 지독히도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화산파 장로들의 소유물 중 쓰지도 않고 창고에 오래 처박혀 있는 수많은 검이며 무구들을 대신 손질해 주는 일을 꽤 오래 도맡아 해 왔던 거다.

좋은 검이란, 바로 이 대장간 앞에 놓인 저 쇠스랑 같은 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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