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파 공녀님 (43)화 (43/123)

#43.

요제프는 언제나처럼, 먼저 샬롯을 바라보고 있었다.

날씨와는 하나도 어울리지 않는 고요하디고요한 시선으로.

“기다리면, 뭐가 바뀌는데?”

기분 나쁜 기색을 숨기지 않는 샬롯의 질문에, 요제프가 어깨를 가볍게 으쓱했다.

“없어지지 않는 절대적인 내 편. 그건 말로 설득해서 믿게 만들 수 없으니까. 내가 보여 주면 되잖아. 네게 그게 있다는 걸. 시간이 흐르면 믿도록, 직접 보여 주지.”

샬롯은 전에 없이 길게 장광설을 늘어놓는 요제프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게 뭔데.

없어지지 않는 절대적인 내 편.

단 한 번도 가져 보지 않은 거라서, 도대체 어떻게 생겨 먹은 건지 상상도 안 되는 그게. 대체, 뭔데.

“네가?”

“내가.”

“네가……? 나한테……?”

“내가, 너에게.”

샬롯은 진지하기 짝이 없는 요제프의 짙은 눈동자를 바라보다가,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갑자기 이런 이야기들을 왜 꺼냈나 했다.

그런데, 그냥 이 결론을 말하고 싶은 거였다.

요제프라서 알아냈을 거다. 제 마음속에 있는 깊은 균열을.

황제로부터 제 잘못이 아닌 이유로 단 한순간도 인정받지 못하고 자랐던 요제프라서.

‘차라리, 그냥 당장 믿으라고 했다면 무슨 소리냐고 했을 텐데.’

앞으로 보여 주겠다니. 기다리라니.

요제프도 아직 어린아이였고, 언제 어떻게 그 결심이 바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당장은 그 말이 기꺼웠다. 그리고 따뜻했다.

“난 네 곁에 있을 거야. 계속. 줄곧. 네가 믿든, 믿지 않든.”

“믿어. 믿을게.”

“그러니까 어디 가서 지고 다니지 마.”

이유 없이 속이 울컥 시렸고, 어딘가 간질간질하기도 했다.

샬롯은 어쩐지 대답이 입으로 나오지 않아서,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혼자 다짐했다.

‘정말, 이 모든 일이 잘되게 하자.’

요제프가 뭔가를 갚길 바라서 시작한 일은 아니었지만, 그가 정말로 잘되었으면 좋겠으니까.

실제로 요제프가 저 말을 지킬 거라는 기대는, 반쯤은 있었지만 동시에 없기도 했다.

아이들이란 미래에 대해 잘 모르고 말을 함부로 하기도 하니까.

그래도 저렇게 말을 해 준 것만으로도, 뭔가 한결 개운해진 기분이었다.

그녀는 나름대로 자신이 있었다.

카밀라를 설득하는 건 정말이지 쉽지 않을 거다.

하지만 이미 카밀라에게 받아 둔 약속이 하나 있었다.

제가 칼그림자의 날, 대회에서 우승하면 무슨 소원이든 들어주겠다는 약속.

그리고 제가 읽었던 책에 나왔던 카밀라는 절대로 자신이 뱉은 말을 번복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고작 그런 것에 의지하는 게 우스운 일이었지만, 할 수 있는 데까지는 해 볼 수밖에.

쏴아아아-.

각자의 생각을 가진 샬롯과 요제프는 소나기가 그칠 때까지 그 후로도 오래도록 나무 밑동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

* * *

칼그림자의 날이 차츰 다가왔다.

대회를 사흘 앞둔 날, 샬롯은 이른 아침 운기조식을 끝내고 제가 한자로 메모해 둔 책의 줄거리를 다시 한번 훑어보았다.

이제 슬슬 대회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준비를 할 때가 되었다.

물론, 대회의 내용에 대해서는 철저히 대외비에 붙여지기 때문에 그 누구도 알 수 없었지만, 주인공인 요제프가 대회에 대해 회상하는 장면에서 몇 번 얼핏얼핏 이번 대회에 대해 언급되는 구간이 있었다.

칼그림자의 날 대회에는, 그녀가 전혀 모르는 요소들이 등장했다.

몬스터.

‘대회에 나오는 내용을 미리 알고 있는 것도 이상하니까. 누구한테 물어볼 수도 없고.’

고민 끝에 혼자 마음속으로 생각만 하고 있던 일을 실행에 옮기기로 결심한 그녀는 방을 나가 미리 위치를 봐 둔 서재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서재에 거의 다 도착했을 무렵, 샬롯의 앞에 길고 호리호리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아가씨, 길을 잘못 드신 것 같습니다만…… 제가 안내를 도와드릴까요?”

“응?”

고개를 들고 바라보자, 얇은 안경을 쓴 남자가 다정해 보이는 얼굴로 웃고 있었다.

‘아, 제롬의 비서 레이트다.’

레이트는 유능한 비서였다. 별 탈 없이, 아이작이 가문을 이어받은 이후에도 제 몫을 다 하는.

누구나 그렇지만, 작중에서 샬롯을 좋아하는 인물은 아니었다. 그래도 그녀는 이렇게 맡은바 각자의 자리에서 제 몫을 하는 이들을 좋아했다.

샬롯은 레이트에게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어 주었다.

“안녕.”

“……안녕하세요?”

“인사하니까, 참 좋다. 그치?”

레이트가 묘한 눈으로 샬롯을 바라보았다.

“소문은 익히 들었습니다만…… 정말로 많이 바뀌셨군요.”

“그래?”

“……뭐, 아닙니다. 그보다 이쪽은 서재밖에 없습니다. 어디로 가고 계셨던 거죠? 제가 나가는 길을 안내해 드리죠.”

샬롯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서재에 온 거 맞아. 길이 복잡해서 헷갈렸는데, 확인해 줘서 고마워.”

“……네?”

“좋은 하루 보내!”

그리 길지도 않은 팔을 번쩍 든 샬롯이 한껏 크게 손을 흔들어 주곤 서재 쪽을 향해 종종걸음을 옮기자, 레이트는 그대로 뒤를 돌았다.

‘……서재를 간다고 하셨는데, 지금. 게다가 고맙다고도……. 좋은 하루를 보내라고도 하시고…….’

레이트는 샬롯에 대해 새로운 정보를 알아낼 때마다 제롬에게 보고를 올리고 있었지만, 그 정보들은 남의 입에서 듣고 제 선에서 걸러 제롬에게 전달할 뿐이었다.

한데 막상 직접 샬롯을 대면하니까, 그녀의 변화가 확 체감되었다.

‘어딘가, 예의 바르고 귀엽다고 느껴지는 건 착각인가?’

레이트는 고개를 갸웃 기울이곤 제가 가던 방향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끼익.

공작저의 1층 가장 구석진 곳, 빛이 잘 들지 않는 북쪽 벽에 붙어 있는 서가는 제법 거대한 공간이었다.

“……와.”

감탄하는 그녀에겐 화산파의 그 조그마한 서가도 정말 큰 보물 창고 같은 곳이었는데……

여긴, 화산파의 열 배는 될 듯한 거대한 규모의 서가가 있었다.

‘방 몇 개를 한꺼번에 튼 거구나.’

삼면을 책으로 가득 채운 공간에서 맡아지는 종이가 낡아 가는 냄새가, 너무 익숙한 것이라서 그녀는 저도 모르게 미소가 나왔다.

도화에게 서가란 사실 비무장만큼이나 익숙한 공간이었다.

도화는 화산파에서도 종종 서가를 정리하는 일을 도맡아 하곤 했었다. 이런저런 허드렛일을 하는 그녀에게 비급을 봐도 좋다고 허락해 주었기 때문에, 서가를 정리하면서 꽤 많은 비급들을 빌려다가 밤새 탐독하곤 했다.

‘어딜 가도 책 냄새만은 변하지 않는구나.’

빛이 잘 들지 않도록 제일 구석진 곳에 위치해 있는 서가였기 때문에, 샬롯은 대낮인데도 서가의 등불을 밝혀 두고 책을 찾아야 했다.

『실전 무술』

『도의 실제와 이론』

『마상 전술』

『팔랑크스 : 창병 전술에 대하여』

…….

샬롯은 서가에 꽂혀 있는 두터운 장정의 책들을 손으로 한 번씩 쓸어 보다가 멈춰 섰다.

『몬스터 도감 : 당신이 궁금해하는 모든 몬스터에 대하여』

그녀가 찾던 게 바로 이 책이었다.

혹시나 누군가 다가오는 기척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샬롯은 그 책을 꺼내 들어, 주저하지 않고 색인을 펼쳤다.

색인을 따라 쭉 훑어 내려가던 그녀의 손은, 위에서 여덟 번째에서 멈췄다.

[슬라임]

‘남들은 모르는 예선전 내용을 나 혼자 미리 알아 두는 건 반칙이지만, 남들이 알고 있는 상식을 알아 두는 건 반칙이 아니지.’

샬롯은 그렇게 스스로를 납득시키며 책을 후루룩 넘겼다.

* * *

아침부터 베티가 들뜬 표정으로 샬롯을 찾아왔다. 그녀가 서가에서 막 돌아온 시간이었다.

“아가씨!”

“응?”

“작은 주인님께서 찾으세요.”

“아버지가?”

‘무슨 일이지?’

샬롯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려 선반이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지극히 기분파인 제롬은 요즘 들어 샬롯에게 뭔가를 사 주는 것에 맛이 들였는지 자꾸만 뭔가를 사 주고 그녀의 반응을 가만히 구경하곤 했다.

선반 위에는 최근, 방을 꾸며 준 뒤에 제롬이 또 사다 나른 몇 가지 물건들이 쭉 진열되어 있었다.

토끼 인형, 귀족가 아이들이 좋아할 법한 화려한 인형의 집, 머리 장식 리본 같은 것들이었다.

하나같이 샬롯의 취향을 물어보지도 않고 아홉 살 즈음의 귀족가 여자아이가 좋아하리라 생각하는 것들을 사 온 거였다.

지금의 샬롯도 그렇지만, 원래의 샬롯조차도 좋아하기엔 조금쯤 시기가 지난 것들이었다.

샬롯에 대해서 정말로 잘 모르는 게 티가 났다.

솔직히, 마음속 한구석에서는 제롬이 하는 행동이 진짜 우습고 가당치도 않다고도 생각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그 선물을 받아 드는 순간만큼은 솔직하게 기뻤다.

이런 것은 필요 없다는 말이 입 밖으로 튀어나오지 않을 만큼.

샬롯이 궁금한 눈으로 베티를 쳐다보고만 있자, 신나서 부랴부랴 찾아온 것치고는 꽤 망설이던 그녀가 머뭇머뭇 대답했다.

“그러니까…… 오늘, 검을 사 주신대요.”

“……검?”

“네, 그…… 대회에 출전할 때 쓸 진검이 없으실 테니, 사 주시겠다고…….”

샬롯은 귀가 번쩍 뜨였다.

지금까지 그녀가 들었던 무기라야, 요제프와 함께 수련할 때 쓰는 목검이 전부였다. 당연히 진검이 필요했다.

“정말이야? 정말이지? 너무 좋아!”

샬롯이 볼까지 빨개져서 신나 하자, 베티는 슬픈 표정과 기쁜 표정 사이쯤 되는 이상한 얼굴을 했다.

‘……아가씨께서, 이제 다 체념하셨나 봐.’

베티는 아무리 생각해도, 세티야 가문이 너무 잔인하다고 생각했다.

칼그림자의 날을 맞이하는 시기가 나이마다 각자 다르게 마련인데, 아무리 그래도 아홉 살의 조그마한 여자아이를 그런 대회에 출전시키다니.

대단한 성적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곤 하지만, 그래도 너무했다.

샬롯이 요즘 저렇게까지 열심히 수련에 열을 올리는 것을 볼 때마다, 검과 관련된 것들을 부인하고 싫어만 할 때보다 더 마음 아팠다.

“빨리, 빨리 준비해 줘. 응? 옷 뭘로 입을까?”

샬롯이 기쁜 얼굴로 재촉하자, 베티는 어쩔 수 없다는 얼굴로 희미하게 웃으며 옷가지를 꺼내 와 그녀를 단장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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