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파 공녀님 (42)화 (42/123)

#42.

“대회 전에?”

샬롯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반문하자, 요제프가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뭔데?”

“……계속해서.”

“응?”

“계속해서, 이 시간이 이어지는 건 쉽지 않을 거다. 내 형님들은, 내가 숨을 죽이고 지내지 않으면 나를 죽여서라도 잡음을 제거할 사람들이니까.”

평온하게 오늘 날씨라도 이야기하듯, 요제프가 꺼낸 이야기는 생각지도 못하게 무거운 내용을 담고 있었다.

요제프는 샬롯의 대답을 기다린 게 아닌지, 담담하게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아마 내가 대회에서 우승을 노린다는 건, 형님을 꺾는다는 건, 한순간이라도 두각을 드러내고자 한다는 건…… 내 죽음으로 이어질지도 모른다는 거다.”

“……요제프.”

“그래도, 납작 엎드려 살면서 삶을 연명하는 것보다는 그쪽을 택하는 게 낫겠다고, 이제 생각하게 됐어.”

“……왜?”

샬롯의 머뭇거리는 물음에, 요제프가 느릿하게 입술을 움직여 대답했다.

“그냥.”

“……그냥?”

“욕심이 생겨서.”

“무슨?”

“내가 가진 게 있다면, 지켜야겠다는.”

샬롯은 앞뒤가 다 잘려져 있는 말의 문맥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요제프는 더 이상 설명할 생각도 없는 모양이었다.

그녀는 안타까움에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요제프의 말이 맞았다.

그가 두각을 드러낸다는 건, 곧 그의 목숨이 경각에 달린다는 이야기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잘될 거야. 일단 너무 조급해하지 말고 첫 단추를 끼우자. 2황자가 황제가 되는 것을 막으려면, 일단 이번 대회에서 2황자를 꺾어 두어야 해. 그리고 요제프가 얼마나 대단한 재능을 가졌는지 보여 줄 수 있다면, 그렇게 된다면 무를 숭상하는 세티야 가문도 마냥 2황자의 뒷배만 밀어줄 수는 없게 될걸.’

그리고, 잘만 하면 이번 대회를 통해 원작의 여자 주인공을 이용할 기회도 얻을 수 있을는지도 모른다.

외국의 세력을 끌어들이는 것은 결코 좋은 일이라고 하긴 힘들었지만, 나로선 마냥 빚을 지는 게 아니라 그에 상응하거나 더 큰 대가를 지급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여자 주인공 위주의 소설이었으니, 그녀의 주변에 대한 정보라면 아주 줄줄 꿰고 있었으니까.

샬롯은 머릿속에서 생각을 팽팽 굴리며 요제프의 손에 제 손을 깍지 껴서 꽉 움켜쥐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 황자님. 이 누님이 지켜 준다고 했잖아. 내가 알아서 어떻게든 해 볼게. 넌 앞만 보고 열심히 해.”

그때였다.

그녀가 꽉 움켜쥔 손을 흘끗 바라본 요제프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내 말을 하나도 이해 못 한 것 같군.”

“……어? 무슨 말?”

“네가 나를 지키는 건, 그건, 질리도록 행동으로 보여 줬으니 이제 됐다.”

“……어?”

요제프가 샬롯을 똑바로 바라보며, 그 고요한 눈동자로 천천히 추궁하듯 물었다.

“지난번부터 줄곧 궁금했는데, 너는 왜 스스로에게 선을 그어 두는 거지?”

그 목소리는, 너무 진지하고 또 너무 맑았고 또 너무 진지했다.

돌이켜 보면 요제프는 그녀가 뭔가를 말하면 대답하는 쪽이었지 뭔가를 묻는 쪽이 아니었다.

샬롯은 새삼스럽게 요제프를 바라보았다.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가운데 바라보는 요제프는, 하나도 꿉꿉해 보이지 않는 아이였다. 뒤가 비쳐 보이지나 않을까 싶게 맑고 청명해 보이기만 했고, 처음 만났을 땐 기력 한 점도 보이지 않던 그 검은 눈동자 속에도 날씨와 상관없는 반짝임이 보였다.

무릎이 닳은 검은색 무복 차림에, 황족인 것을 나타내는 증표라곤 허리에 차고 있는 검 하나밖에 없는 주제에도. 그는 정말로 신성해 보였고, 누구보다 고상해 보였다.

‘정말로 많이 변했구나, 요제프.’

묘하게 그런 실감이 들었다.

샬롯이 눈을 접으며 웃었다.

그녀가 아무런 대답도 안 하고 그저 저를 바라보기만 하자, 요제프가 한층 더 나지막해진 목소리로 물었다.

“이해하기 쉽게 말하지.”

“응.”

“넌, 우리 체이커 국에서 가장 잘나고 부도, 권력도 손쉽게 손에 넣기를 반복해 온, 그래서 축적한 것이 넘치도록 많은 세티야 공작가 출신이지.”

“어? 어…….”

샬롯은 요제프가 갑자기 왜 이런 얘기를 꺼내는지 의문이 들었지만, 그가 모처럼 먼저 시작한 이야기인지라 끊지 않고 귀를 기울였다.

“게다가 넌 다른 이들보다 유리한 위치야. 직계의 직계의 직계. 넌 실감하지 못할 테지만, 그리고 재능이 없었으니 오히려 억울하다 느꼈을 수도 있겠지만…… 남들이라면 누구나 손을 내밀고 싶을 정도의 위치란 말이다.”

이야기가 갈수록 미궁이었다.

“그……렇지? 그래서?”

“그런데 왜, 그렇게 주저하지?”

“……어? 내가? 뭘?”

“샌드위치 도시락에 만족하는 거 말이다.”

“어……?”

도대체 샌드위치 도시락이 뭔데.

‘요제프가 황족다운 기백과 품위가 흘러넘치는 것과는 별개로, 이야기를 조리 있게 순서대로 말하는 실력은 모자라는 게 아닐까?’

샬롯이 얼토당토않은 의심까지 하는데, 요제프가 줄곧 그녀 혼자 힘을 주고 있던 깍지 손에 꽉 힘을 주었다.

샬롯이 조금 놀라는데, 그가 조곤조곤 입을 열었다.

“누가 널 싫어하는 것도, 이젠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지지 않았어?”

“……어?”

“그런데 왜 그렇게 미움받기 싫은 아이처럼 구냔 말이야.”

‘미움받기 싫은 아이’라는 말은, 어딘가 심장을 콕콕 찔러왔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내가 언제 그랬어?”

“언제 그러냐고? 네가 당연히 가져야 할 것들에도 깜짝깜짝 놀라면서, 잘도 물어보는군. 그 멍청이 같은 놈들에게 무시당하고, 말도 안 되는 별명까지 이고 사는 동안에 제 자리를 전부 다 잊어버린 것 같아서 하는 말이야.”

“……아.”

그녀는 이제야 맥락을 따라잡았다.

그러곤 조금 놀라서, 아니 너무 놀라서 어쩔 줄 모르는 눈으로 요제프를 바라보았다. 분홍색이 섞여 들어간 길디긴 그녀의 속눈썹이, 그녀의 당황스런 마음을 대변하듯 팔랑팔랑 나부꼈다.

쓸데없는 것에 신경 쓰지 말라고, 그런 게 아니라고 부인하고 싶은 마음이 만만했는데…….

그런 말이 나오질 않았다.

요제프의 눈에 제가 그렇게 비칠 줄은 몰랐으니까.

그를 비롯한 다른 이들 중 누구의 눈에라도 제가 그렇게 비칠 줄은 상상조차 못 했으니까.

쏴아아아-.

샬롯은 어쩐지 처음으로 요제프의 검은 눈동자를 마주하기 어렵다는 생각을 하며 시선을 슬쩍 돌려 쏟아지는 비를 바라보았다.

비는 조금도 그 기세를 줄이지 않고 온 하늘과 땅을 삼킬 듯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그나마 쓸 만하다 생각했던, 모처럼 돌을 다 골라 놓은 흙바닥에 물웅덩이가 여기저기 모여들었고, 그 자리마다 굵은 빗방울들이 맹렬한 기세로 튀었다.

뚝, 뚝. 뚝.

일정하게 들리는 작은 소리에 시선을 가까이로 돌리자 요제프와 제가 몸을 피하고 있는 거대한 나무의 진녹색 잎사귀에서, 고여 내린 물방울들이 자잘하게 떨어져 내렸다.

멀리 있는 빗방울들은 하나하나를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거세게 퍼붓는 줄기였지만, 가까이에서 잎새를 타고 떨어지는 물방울들은 그 존재를 구분할 수 있었다.

‘그래, 가까이에서 보면 본래 본질은 쉽게 드러나는 법일까?’

마치…… 누군가에게 제 존재를 처음 들킨 것처럼 부끄러웠다.

작은 일에도 감사한다고 그냥 말하면, 마냥 사람 좋아 보이지만 사실은 그런 게 아니었다.

화산파에서 시종, 아니 하인이나 다름없는 삶을 살았었기에 그랬다. 심지어 부모를 가져 본 적도 없이 어린 시절을 보낸 고아여서 그랬다.

그래서, 뭔가를 바란다는 것 자체가 제겐 너무 낯설고 어색했다.

제가 뭔가를 가진다는 것 자체도 낯설었고, 그냥 다 고맙고 기꺼웠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저를 아껴 주는 이들이 있다는 게 너무 이상하고…… 언제든 그들이 제게 등을 돌릴 것만 같았다.

제가, 그들에게 아주 잘하지 않는다면.

사형이 그녀를 절벽에서 밀었던 순간처럼.

한동안 창백한 얼굴로 입을 꾹 다물고 있던 살롯이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왜? 그러면 안 돼? 내가, 미움받기 싫은 게 나빠?”

저도 모르게, 목소리가 곱지 않게 튀어나왔다.

요제프는 부드럽게 고개를 저었다.

그러곤 진지하게 목소리를 낮춰, 샬롯의 술렁거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려는 듯 얼른 입을 열었다.

“그런 말이 아니다.”

“그럼 뭔데?”

“없어지지 않는 절대적인 내 편. 원래 그건 부모여야 하는데, 너도 나도 그게 없었으니까. 나는 네 마음을 가장 잘 알아.”

“……요제프?”

요제프가 제 약한 부분을 인정하는 것도 처음이었다.

샬롯은 더 이상 강하게 나갈 수 없어서, 기세를 누그러뜨렸다.

“……말은 고마운데 난 지금도 충분히…….”

“그게 없었더라도, 이제 네가 충분하다는 걸 알아둬. 더, 네가 네 지위에서 응당 받아야 할 것들을, 더 욕심내고 더 누리라는 말이다.”

“충분하다는 게 뭐야?”

“……말로 해서, 될 게 아니었군. 됐다. 괜한 이야기를 꺼냈어. 그냥, 기다려.”

“기다리라고?”

“그래.”

기다리면?

호기심을 가득 품은 그녀의 시선이 다시금 요제프에게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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