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파 공녀님 (41)화 (41/123)

#41.

눈앞에 있는 요제프의 이마에는 땀이 흥건히 흘러 있었지만, 얼굴에는 편안함이 가득했다.

샬롯은 겨우 긴장을 풀고 어깨를 늘어뜨렸다.

요제프는 무아지경에 빠져, 샬롯이 이미 인도한 방향에 따라 움직여 온 기운들을 느껴 보고 있는 것 같았다.

“……일단, 한시름 놨네.”

그렇게 중얼거린 그녀가 요제프의 손을 놓으려고 했지만, 깊은 명상 중에 빠져 있어서 그런지 그는 손을 전혀 놓아줄 기색이 없었다.

샬롯은 작게 웃었다. 작은 아기들이 반사적으로 뭔가를 움켜쥐고 매달리는 모습이 연상되어서.

‘요제프도 열두 살이니까, 그렇게까지 어린 아기도 아닌데…… 작중 모습보다 너무 어리니까 자꾸만 아기처럼만 느껴진단 말이지.’

그녀는 요제프가 제 손을 꼭 쥐고 있는 것을 내버려 두곤 그의 인형 같은 얼굴을 뜯어보며 시간을 보냈다.

오래지 않아, 요제프의 긴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그러곤 눈꺼풀이 올라가며 새까만 눈동자가 드러났다.

“어때?”

샬롯의 물음에, 요제프는 대답하는 대신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너무 오래 멍하니 눈만 마주치고 있기에, 샬롯이 다시 한번 물어보려는 순간 요제프가 느리게 눈을 감았다 뜨며 입을 열었다.

“더할 나위 없이 좋아. 지금까지 겪었던 그 어떤 컨디션보다도 좋아.”

샬롯은 만족한 듯 입꼬리를 올려 길게 웃었다.

이 대답이 듣고 싶었다.

요제프는 다시 한번 말했다.

“샤를로테.”

“응?”

“……샤를로테.”

“응?”

영원히 차갑기만 할 거라 생각했던 요제프의 얼굴 위 가면이 무너져 내렸다. 그의 인형 같던 얼굴에 감정이 깃들었다.

“내 기억이 있는 한, 몸속에 폭탄을 안고 있는, 매분 매초 누군가가 나를 찌르는 듯한 감각이 없는 건 처음이다.”

그렇게 담담히 고백해 오는 요제프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 담담한 말에 담긴 무게가 너무 무겁고, 또 너무 가여워서 샬롯은 뭐라고 그를 위로해야 좋을지 몰라서 뭐라고 말도 꺼내지 못했다.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것처럼만 보였던 요제프의 눈에서 굵은 눈물이 방울방울 흘러내렸다. 흐느끼는 법조차 모르는 황자는 샬롯을 멍하니 마주 보며,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눈물을 보이는 법을 배웠다.

“……이리 와.”

샬롯은 소리조차 없이 눈물을 뚝뚝 쏟아 내는 요제프를 제 품으로 끌어당겨 안았다.

제가 뭐 그렇게 대단한 일을 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요제프의 이토록 불행한 시절에 조금이나마 제가 도움이 된다는 게 기뻤다.

기쁘면서, 요제프의 삶은 왜 이렇게 박정하고 비정한가 싶은 생각에 그녀도 절로 눈물이 났다. 그냥, 모두 행복하길 바랐다. 그냥, 아이들은 부모의 잘못에 제 삶이 좌지우지되지 않길 바랐다.

“행복해지자, 우리. 행복해지자.”

요제프의 어깨를 토닥토닥 다독이는 샬롯의 눈에도 어느새 눈물이 가득 들어찼다.

“…….”

“요제프, 넌 이 누님이…… 흑, 지켜 줄게. 흐앙.”

이내 샬롯이 훨씬 더 큰 소리로 통곡하듯 울었기 때문에, 요제프는 울음을 멈추고도 한참 동안 저보다 몸집이 작은 샬롯의 품에 어정쩡하게 안겨 있어야 했다.

* * *

탁, 탁, 탁.

탁, 탁!

탁!

조용한 빈 공터에 목검 두 개가 조화롭게 어우러지는 소리가 이어졌다.

샬롯은 즐거움을 참지 못하고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목검을 휘둘렀다.

“매화혈우.”

“매화만개.”

“매화난만.”

목검이 부딪는 소리 외에는 샬롯의 목소리만이 조용히 울려 퍼졌고, 거기에 가끔 요제프의 기합 소리가 더해질 뿐이었다.

예상대로, 이 소설의 주인공인 요제프는 검을 지독하게 잘 썼다.

검을 잘 쓴다는 것은 여러 갈래가 있지만, 요제프는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모든 것을 동시에 잘 해냈다. 동체시력도 좋았고 판단력도 좋았고 몸의 반응 속도도 좋았다.

거기에 더해서 자신의 부족한 점을 빨리 알아채고 그것을 보완하기 위해 노력도 할 줄 알았다. 아이답지 않게 승부를 보려는 몇 수 앞을 읽는 판단력까지, 무엇 하나 빠지는 게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요제프의 컨디션은 완벽했다.

기의 흐름과 운용이 좋아졌다는 것은, 오러를 잘 쓴다는 뜻뿐만 아니라 근육과 장기도 건강하다는 뜻이었다.

샬롯이 가르쳐 준 운기조식을 매일 아침 행하는 것만으로도, 요제프의 몸은 그 어느 때보다 가뿐했다.

탁, 탁!

샬롯이 허수를 섞어 앞으로 내지른 목검의 궤도를 완벽하게 읽은 요제프가 그녀의 검을 흘리며 짧게 목검을 내질렀다.

동시에 샬롯과 요제프의 목에 서로의 목검이 가 닿았다.

둘의 시선이 허공에서 맞부딪혔다.

검은색 눈동자는 그저 조용해 보였지만, 거기에 담겨 있는 호승심은 정말이지 누구 못지않았다.

샬롯이 웃음을 참지 못하고 까르르 웃으며 검을 던지고 바닥에 드러누웠다.

옷이 샬롯만큼이나 땀으로 흠뻑 젖어 있는 요제프도 목검을 아무렇게나 집어 던지고 그녀의 옆 풀밭에 드러누웠다.

샬롯이 허공으로 손을 뻗어, 이제는 제법 물집이 잡힌 제 뽀얀 손을 들여다보며 물었다.

“도대체 어떻게 그렇게 검을 잘 써? 나랑 비슷하게 검을 쓰다니.”

“……기가 막히는군.”

요제프는 언제나처럼 질문에 대한 대답을 바로 내놓는 대신, 어이없다는 듯 혀를 차 댔다.

‘뭐…… 어떻게 들으면 내 질문이 오만해 보이나? 하지만 정말로 궁금한걸.’

샬롯은 고개를 옆으로 돌려 언제부터인가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던 까만 눈을 응시했다.

이제는 제가 보지 않을 때도 요제프가 자신을 보고 있는 것에도 흠칫흠칫 놀라지 않았다. 요 며칠 동안 같이 지내면서, 그냥 그게 요제프의 습관이겠거니 생각하게 되었을 뿐이다.

“나야말로 묻고 싶다.”

요제프가 샬롯의 연둣빛 눈동자를 들여다보며 그렇게 중얼거리다가, 그녀의 깊은 미소에 시선을 주곤 아이답지 않은 긴 한숨을 토했다.

“……그만두지.”

샬롯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뭘?”

“아니다. 제대로 된 대답을 들을 수 있을 거라는 기대는 꽤 오래전에 버렸으니까.”

“대체 뭐야. 삐쳤어? 응?”

툭.

여느 때와 같은 대화를 주고받는 사이에, 하늘에서 뭔가 작은 물방울이 떨어졌다.

후둑. 후두둑.

그러곤 순식간에 빗방울이 굵어졌다.

“비다.”

“소나기네.”

요제프가 몸을 일으켜 샬롯에게 손을 내밀었고, 그 손을 잡고 일어난 그녀가 먼저 바로 옆에 있는 큰 나무 아래로 뛰어들었다.

쏴아아아아-.

빗줄기는 순식간에 거대해졌다.

두 아이는 나무 아래에 주저앉은 채 쏟아지는 폭우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이러면, 우리가 하는 말 안 들리겠는데.”

“그렇겠군.”

샬롯과 요제프가 하는 말은, 근처에 서 있는 요제프의 호위 기사 두 명에 관한 이야기였다. 워낙 빗줄기가 굵어진 탓에, 두 기사도 바로 옆의 다른 나무 아래로 몸을 피한 상태였다.

귀가 따갑도록 굵은 빗방울이 억수같이 쏟아지는 바람에, 바로 옆에 있는 사람의 말소리조차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평소라면 요제프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던 그들도 지금 이 순간만은 어쩔 수 없으리라.

“……오도 가도 못하는 상황인데, 제일 자유로운 상태가 된 게 우습군.”

요제프가 중얼거리는 말에 샬롯이 눈살을 가볍게 찌푸렸다.

요제프는 속내를 잘 내비치지 않았기 때문에, 현재 그가 얼마나 힘든 상황에 부닥쳐 있는지 이렇듯 종종 잊곤 했다.

그래서 그의 처지에 대해 이런 식으로 생각이 닿을 때마다 속이 더 아린 것 같았다.

요제프는 발치로 한 방울씩 떨어지는 빗방울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언제 벗었는지 모를 보라색 망토를 샬롯의 어깨에 걸쳐 주었다.

땀이 막 식어서 으슬으슬 추워지던 몸이 그것 하나로 퍽 포근해졌다.

샬롯은 큰 망토의 한쪽을 열어 요제프를 안으로 들어오게 했지만, 그는 그녀의 옆에 몸을 딱 붙이는 게 거북하다는 듯 고개를 가로젓기만 했다.

샬롯은 기가 막혀서 억지로 그의 어깨에 망토를 둘러 주고 그 옆에 몸을 찰싹 붙였다.

“야, 넌 뭐 이런 걸 신경 쓰고 그러냐? 무도인들끼리는 성별 같은 거 없다, 너? 다 벗고 옷 갈아입고 그런다고.”

“……누가 그러는데.”

샬롯은 어이없다는 듯한 목소리에 눈을 도르륵 굴렸다.

“아무튼, 이 누님이 네 건강을 얼마나 챙기는데. 감기라도 들면, 어? 내가 얼마나 걱정하겠어?”

요제프는 몸을 붙이고 앉은 게 여전히 불편한 듯 어깨를 슬쩍 움츠렸지만, 그뿐 망토에서 빠져나가진 않았다.

그냥, “또, 누님은 무슨.” 하고 혼잣말인 듯 중얼거리며 절레절레 고개를 저을 뿐.

쏴아아아.

갑작스레 시작된 소나기는 그리 쉽게 멎을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샬롯과 요제프는 나란히 기대 어깨로 체온을 나누며 그것을 한참 바라보았다.

평소와는 달리, 그 긴 침묵을 먼저 깬 것은 요제프였다.

“샤를로테.”

샬롯은 저도 모르게 요제프에게 고개를 돌렸다.

어깨를 붙이고 앉아 있어서, 아주 가까운 곳에 그의 얼굴이 있었다.

저를 바라보고 있는, 아름다운 까만 눈동자가.

“왜?”

요제프는 샬롯의 눈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다가, 다시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고 있는 공터로 시선을 돌렸다.

그 동작이 워낙 자연스러웠기 때문에, 시선을 피한 건지 아니면 그냥 다른 곳에 관심을 준 건지는 알 까닭이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대회 전에 해 둘 말이 있었어.”

묘하게 진지한 목소리에, 샬롯의 귀가 쫑긋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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