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
아이작은 야욕을 갖지 못한 자에게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정말 길거리에 나뒹구는 돌과 같을 정도로.
‘그런데, 지금 이 상황은 뭘까.’
단 한 번도 야욕을 드러낸 적이 없이, 맞으면 맞는 대로 웅크릴 줄만 알던 3황자의 눈에 지금 보이는 감정은 틀림없이 분노였다.
‘그건 야욕으로 발전하기 퍽 좋은 동력이지.’
그리고 아마 그 감정을 만들어 낸 건 제 앞에서 아무것도 모른다는 얼굴을 하고 있는 귀여운 여동생일까.
아이작은 피식, 바람 빠지는 웃음소리를 내었다.
아무런 바람조차 불지 않고, 평온하게 흘러가는 매일매일이 좋기도 했지만 지겹기도 하던 참이었다.
샬롯이 등장한 뒤로, 제 주위에 온통 새로운 바람이 부는 기분이었다.
샬롯은 아이작이 몸을 일으키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문득 물었다.
“안 물어봐요? 물어본다면서요.”
아깐 당장이라도 추궁할 것처럼 굴었던 아이작은, 뭐가 그렇게 재밌는지 빙글빙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물어봐야지. 대국민 사과까지 했는데. 그런데 없던 실력이 갑자기 어디서 튀어나왔다라……. 글쎄. 다시 생각해 보면 정당하고 좋은 방법은 아닐 거란 말이야.”
“그래서, 듣고 싶지 않아요?”
“아니. 오히려 더 궁금해졌어.”
“그럼 물어봐요.”
“대회가 끝난 다음에 물어보지. 지금 그걸 듣는다면, 이후 내가 네 대회 참가를 허락할지 솔직히 모르겠으니까.”
지금 당장이라도 캐물을 듯하던 아이작은 의외로 선뜻 몸을 돌리곤 손을 저어 보였다. 샬롯의 머리카락을 흩트려 놓고서.
‘요제프를 의식한 건가?’
뭐, 그렇게 대단히 사악한 비밀은 없는데.
‘……아니, 어쩌면 너무 대단한 비밀이 있긴 하지.’
샬롯은 혼자 멀어지는 아이작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시선을 내려 웃었다. 손끝에, 제가 깔고 앉아 있는 아이작의 망토가 닿았다.
‘진짜 미치광이긴 한데 좋은 사람은 맞는 것 같아.’
별거 아닌 대화였는데, 이상하리만큼 가슴이 따뜻해졌다.
* * *
“그래서 어떻게 된 겁니까, 이게?”
벤은 샬롯의 여린 손아귀가 엉망이 된 것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검을 한 번도 제대로 쥐어 본 적 없는 티가 확 나는 보들보들한 피부 위로 무슨 짓을 했는지, 솜 같은 손바닥이 피범벅이었다.
샬롯은 벤이 워낙 심각하다는 듯 눈을 찌푸리자, 그제야 제 손을 자세히 내려다보았다.
손이 까진 건 정말이지 별것도 아닌데. 두 명의 걱정을 듣고.
‘참, 오래 살고 볼 일도 다 있어.’
샬롯이 베슬베슬 웃으며 바지를 탁탁 털고 일어났다.
벤은 샬롯이 깔고 앉아 있던 망토가 아이작의 것이라는 걸 그제야 눈치채곤 놀란 눈을 했지만, 그런 것보다는 샬롯이 제 손에 아무렇지도 않게 물을 들이붓고 있는 것을 발견하곤 더 놀랐다.
“아니, 지금 뭘 하시는 겁니까?”
“……어? 상처를 깨끗하게 씻어야지.”
“그거야 그렇습니다만…… 따끔하지도 않으십니까?”
원래 깊게 베인 상처도 아프지만, 넓게 쓸린 상처는 지독히 따가운 법이었다.
그런 곳에 저렇게 물을 콸콸 부어 대다니.
샬롯은 아무렇지도 않게 손에 묻은 물을 허공에 털었다.
“별거 아니야. 수련하다 보면 별일 다 있잖아.”
“그야 그렇습니다만……”
“하하. 할아범, 이 정도 상처에는 감사하고 살아야지.”
“……마치 세상 다 살아 보신 노인네처럼 말씀하십니다.”
벤은 약을 바르고 붕대를 감는 동안 한 번 신음조차 흘리지 않는 샬롯을 퍽 독하다고 생각하며 살래살래 고개를 저었다.
그가 발라 준 약은 성수가 섞여 효과는 좋았지만, 성인이 된 기사들조차도 따갑다며 제 머리칼을 쥐어뜯을 정도로 고통이 있었다.
하지만 샬롯은 태연하게 치료를 받은 거로도 모자라서 붕대를 막 감은 손으로 손뼉을 쳤다.
“아…… 배고프다.”
“……네?”
“맞다, 내 도시락.”
“네?”
“도시락, 싸 왔거든. 마차에 있는데…… 벤이 좀 갖다 줄래?”
“……알겠습니다. 이 와중에 시장하신 걸 보니, 정말 상처는 아주 괜찮으신 모양입니다.”
샬롯이 방긋 웃으며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두 팔을 높이 들어 올려 보이자, 벤은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쉬며 마차를 향해 터덜터덜 걸어갔다.
사람 말이 닿지 않을 만큼 벤이 멀찍이 멀어졌을 때쯤, 샬롯은 흘끗 요제프에게 시선을 돌렸다.
요제프의 밤톨 같은 까만 머리통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게,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바닥에 있는 돌만 바라보고 있었다.
아이작이 도착했다가 사라지는 동안에도, 그저 목석처럼 그러고 서 있기만 하던 요제프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궁금했다.
“너, 그렇게 봐서 돌이 쪼개지겠어?”
요제프의 말간 시선이, 천천히 샬롯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는 다시 아래로 시선을 떨어트리고선 느리게 입을 열었다.
“왜냐고 내가 분명히 물었지.”
“……어?”
“나한테 왜 이렇게 하냐고, 내가 분명히 물었지.”
고맙다는 말도 아니고, 왜 막아섰냐는 원망도 아니었다.
샬롯은 당황해서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 그랬지……”
“그땐 궁금했는데, 이젠 안 궁금해.”
“……어?”
앞뒤 맥락 없는 요제프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어서 샬롯이 고개를 옆으로 길게 기울였다.
그렇게 고개를 잔뜩 기울이고서야 바닥을 바라보고 있는 요제프의 표정이 보였다.
뭔가가 답답해 죽을 것 같다는, 한심해 죽을 것 같다는 표정이었다.
그건 증오심과도 닮아 있었고, 또 어떻게 보면 지쳐 있는 것처럼도 보였다.
“나는 잃을 게 없었어.”
아이의 입에서 나오기에는 지나치게 무거운 말이 불쑥 튀어나왔다.
샬롯은 심장이 두근두근 뛰었다.
요제프가, 제 이야기를 늘어놓으려는 것이 반가워서가 아니었다.
그녀 자신에게 슬픈 사정이 있는 것은 이제 너무 익숙해서 그러려니 했지만, 요제프가 제가 가진 슬픈 이야기들을 늘어놓으면 너무 마음이 아플 것 같아서.
“요제프……”
“아무도 내게 뭔가를 기대하지도 않고, 나조차도 내게 뭘 기대하지 않으니까.”
“하지만 너…… 대회에 나가서 제대로 2황자의 콧대를 꺾어 줄 거라고 그랬잖아. 그때, 그 정원에서……”
“해 본 말이야.”
“그래?”
“이길 자신은 있지만…… 글쎄. 이 몸으로, 어디까지 할 수 있을지 모르겠으니까.”
사실이다.
원작에서 대회의 승리는 결국 요제프의 것이 아니었다.
“……요제프.”
“난 네가 정신병이 있다고 생각해.”
“지금 이렇게 분위기를 잡은 게 나를 욕하려던 거였어?”
샬롯이 기가 막혀서 눈썹을 찡그리는데, 요제프가 입술을 깨물었다가 말을 어렵사리 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갑자기 끼어들 이유가 없지. 핏줄이 이어진 아바마마마저도 저버린 3황자를 구하겠다고.”
샬롯의 시선이, 말소리가 들리지 않을 만큼 멀찍이 서 있는 두 명의 호위 기사에게 가 닿았다.
저 망할 호위 기사들이 나서지 않은 것은, 정말 한심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황제도 저버렸다는 말이 딱 맞았다.
요제프가 고개를 들어 샬롯을 바라보았다.
그 순간 그녀는 감정을 쉽게 읽기 힘든 새까만 눈동자 속에서, 작은 불꽃 같은 것이 일렁이고 있음을 봤다. 적어도 샬롯은 봤다고 생각했다.
“네가 나를 지켜 준다고 했던가?”
“……그래.”
“그 말은 오만하다고 생각했다. 내 목은 항상 달랑달랑하게 교수대에 반쯤 걸쳐진 거나 다름없으니까.”
“요제프.”
쉬이 열리지 않던 요제프의 입은, 한 번 말을 쏟아 내놓기 시작하자 주체할 수가 없다는 듯 쉴 새 없이 움직였다.
“샤를로테. 나는 비루먹은 말같이 굴어야 살 수 있는데, 그게 내가 유일하게 이 비루한 목숨을 연명하는 방법인데…… 그게 내 어마마마보다 먼저 죽지 않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했는데…… 너 때문에 생각이 바뀌었다.”
“어?”
“계속 내가 그렇게 살았다가는, 샤를로테, 너부터 죽어 나가게 생겼으니까. 멍청하긴.”
대화는 거기서 끝이 났다.
“도시락 가져왔습니다.”
벤이 크게 소리치며 다가오는 소리를 들으며, 요제프가 입을 다물었기 때문에.
‘그래서, 생각이 정확히 어떻게 바뀌었다는 건데? 결국, 날 욕한 것뿐이잖아.’
샬롯은 눈살을 팍 찌푸렸지만, 영혼이 없는 것처럼 텅 비어만 있던 요제프의 눈동자에 서린 어떤 단단한 의지 같은 게 보기가 좋아서 그만 픽 웃어 버렸다.
“……왜 웃지?”
“귀여워서.”
샬롯이 손을 뻗어 요제프의 앞머리를 살살 쓸어 주자, 그가 기분 나쁘다는 얼굴로 그 손을 쳐냈다.
“……아, 아야. 손 건드리면 아까 다친 곳이 아픈 것 같아. 아야.”
하지만 샬롯이 엄살까지 부려 가며 손을 계속 뻗자, 요제프는 오만상을 다 찌푸리면서도 손을 더 이상 쳐내지 않고 가만히 두었다.
“아이, 착하다. 귀엽기도 하지.”
하지만 샬롯이 제멋대로 속삭이며 흐뭇한 미소를 지을 때마다 요제프의 미간은 점점 더 구겨지기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