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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파 공녀님 (37)화 (37/123)

#37.

아이작의 북부 설한과도 같은 추궁에 란슬롯은 검을 검집에 바로 밀어 넣었다.

그는 더 이상 뭐라고 해야 할지도 생각이 안 나서, 마치 부모님께 혼나는 어린아이처럼 눈을 내리깔고 샬롯이 집어 던진 나뭇가지만 멍하니 쏘아보았다.

솔직히 이 모든 상황이 황당하고 억울했다.

아이작이 소 닭 보듯 보던 저를 이렇게 샬롯 때문에 몰아붙이는 것도 무섭기보단 황당하기 짝이 없었다.

게다가 그 와중에 샬롯과 아이들이 제가 이리 면박당하는 장면을 보고 있는 것도 짜증이 났다.

따지고 보면 이 모든 일의 발단은, 쓸데없이 샬롯이 제게 대들어서 생긴 일이다.

대들다니, 샬롯이.

그래, 그때부터 뭔가 믿는 구석이 있다고 생각했어야 했다.

란슬롯은 고개를 들어 아직도 제 대답을 기다리고 선 아이작을 슬쩍 바라보곤 그 옆의 샬롯을 바라보았다.

아이작의 한쪽 팔에 쏙 안겨 있는 그녀는, 저를 다치게 할 뻔했던 란슬롯에게도 관심은 없다는 듯 아이작의 어깨 너머로 요제프 황자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 모습이 정말 짜증이 났다.

그래 봤자 칼그림자의 날이 지나면 쫓겨날 게 뻔하면서, 같잖게 잘난 듯 구는 게.

그는 속에서 드글드글 끓는 마음을 가라앉히려 애를 쓰며 입을 열었다.

“대련은 아니었지만, 샬롯을 어떻게 할 의도는 없었습니다.”

란슬롯은 목소리를 낮게 깔고 그렇게만 말했다. 할 수 있는 말이라곤 고작 이것 하나뿐이었다.

다만 ‘샬롯을 어떻게 할 의도는 없었다.’라고 말하는 게 너무 이상해서, 그 말이 입 밖으로 튀어나오는 순간 란슬롯은 제 귀가 이상해지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갑자기 끼어든 건 샬롯입니다. 저와 요제프 황자의 대련이었습니다.”

아이작은 그 말에 더 이상 란슬롯을 추궁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샬롯이 제 판단으로 끼어들어 다친 거라면, 그가 굳이 나서서 뭐라고 할 일은 아니라는 판단이 선 거다.

아이작이 란슬롯에게 볼일이 끝났다는 듯 샬롯에게 고개를 돌리자, 다른 아이들도 슬금슬금 그의 눈치를 살피곤 란슬롯에게 다가왔다.

“란슬롯, 아무래도 우리는 그냥 가 보는 게 좋겠다.”

“아니, 근데 진검은 위험하긴 했다. 샬롯 아니었으면 완전 큰일 났어.”

“야, 너 눈치 없냐. 지금 란슬롯 기분 안 좋은 거 안 보여?”

“내가 없는 말 했어?”

“됐어, 우린 수련이나 하러 가자. 기사단 승급 시험도, 칼그림자의 날도 곧인데.”

아이들이 웅성거리며 란슬롯의 손을 이끌었다.

란슬롯은 그 자리에 우뚝 서 있다가, 문득 샬롯이 서 있던 쪽으로 다가가 허리를 굽혔다. 그러곤 샬롯이 들고 있던 나뭇가지를 줍더니 마지못해 아이들에게 이끌려 그 자리를 떴다.

그러면서도 뭔가 할 말이 남은 사람처럼 몇 번이고 샬롯을 뒤돌아봤지만 그게 다였다.

란슬롯과 아이들이 우르르 떠나가고 나자, 너른 공터는 꽤 고요해졌다.

아이작은 턱짓으로 시종을 불러 샬롯의 주치의를 불렀고, 샬롯은 아이작을 올려다보았다.

“뭐야, 왜 온 거예요?”

“우리 막내 보러 왔지.”

아이작은 샬롯을 한쪽 팔에 안아 든 채로 주변을 한 바퀴 둘러보곤, 마땅히 앉을 곳도 없는 허름한 공터 귀퉁이의 벤치로 다가갔다. 그가 가까이 다가가기도 전에 시종이 미리 작은 망토를 깔아 주었고, 아이작은 거기에 샬롯을 먼저 앉히고 저는 그 앞 바닥에 아무렇지도 않게 주저앉았다.

샬롯은 눈살을 작게 찌푸렸다.

같은 높이에서 시선을 맞출 줄 아는 오라버니라니, 언뜻 들으면 상냥해 보였지만 상대는 아이작이다.

너무 중요한 인물이고, 너무 잔혹한 성정의 인물이라 일대일로 말을 섞을 때마다 솔직히 신경 쓰였다.

게다가 방금처럼, 제가 한 어떤 행동이 미래를 완전히 바꿔 놓을 수 있다는 것을 본 직후에는 더.

‘내가 아는 책의 내용에는, 란슬롯과 요제프 황자가 진검 대련을 하는 내용 같은 건 없었어. 만약 있었더라면 요제프 황자가 치명적인 검상을 입었다는 내용이 있었을 거야.’

그녀는 오러에 휩싸인 채의 검 조각이 요제프의 가슴에 가서 박히는 광경을 쉽게 그릴 수 있었다.

사실을 냉정하게 직시하자면, 글쎄, 이곳의 의료 기술에 따라 달린 일이지만, 요제프의 평소 몸 상태가 지극히 안 좋다는 점을 고려해 본다면 어쩌면 목숨까지 위험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 일은 명백히 제가 란슬롯을 도발했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었다.

‘……책의 내용대로만 진행되지 않을 거라는 건, 어떻게 생각하면 장점이긴 하지. 간당간당한 내 목숨도 살릴 여지가 있다는 거니까.’

샬롯은 슬쩍 아이작의 어깨 너머로 저 멀리에 멍하니 서 있기만 한 요제프 황자를 바라보곤 아이작에게 시선을 옮겼다.

‘그렇다면 아이작도 마냥 싫어할 일이 아니야. 아직 일어나지 않았고, 바뀔 수 있는 일이라고 확정된 이상.’

게다가 오늘따라 어쩐지 그가 그렇게 얄밉게만 느껴지진 않았다.

자신이 섭섭한 부분이 있다고 말하자마자 즉각 원하는 대로 사과를 해 주기까지 했으니까.

무엇보다 샬롯은 제가 다쳤다고 해서 누군가에게 화를 내주는 존재 자체를 가져 본 적이 없었다.

‘……샬롯을 무시하기만 했던 주제에, 이렇게 갑자기 잘해 주는 것도 이상하지만…… 그래도 이게 싫진 않아.’

깊게 생각하면, 귓불이 붉어질 것 같았다.

샬롯은 벤치 위에 앉아서 바닥에서 뜬 발을 번갈아 흔들며 생각을 떨쳐 냈다.

그녀가 마치 다 큰 아이처럼 표정을 티 내지 않으려고 하는 게, 아이작은 또 재밌는 모양이었다. 뭐가 그렇게 우스운지 빙글빙글 광인같이 웃었다.

“그런데 어떻게 된 거야? 란슬롯을 상대로 다치다니. 내 기대와는 다른데.”

“……네?”

“란슬롯 정도인데.”

아이작은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지만, 란슬롯도 세티야 가의 후계자 후보 중에선 꽤 잘난 인물이었다.

그래서 란슬롯 정도라고 깎아내리는 게, 자신에 대한 기대를 말해 주는 것 같아서 샬롯은 조금 웃겼다.

샬롯은 아이작이 저를 높게 쳐주는 것은 고마웠지만, 제 실력은 아직 백 퍼센트 회복하지 못한 상태였다.

‘아직 이 몸으로 검도 제대로 안 잡아 봤다고. 수련 첫날도 아직이라고.’

하지만, 흥미가 가득한 그의 얼굴을 보면서 사실을 고백할 수는 없었다.

그를 상대로 싸우겠다는 생각만 해도, 지금으로서는 방심하고 있음에도 절대 승산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강한 아이작이었다.

칼그림자의 날에 정말 승리할 수 있을지 없을지는 모르겠지만, 아이작에게 형편없는 모습을 보였다간 결국 그가 가주가 되었을 때 비정한 칼날 앞에 허망하게 목을 내놓아야 할 수도 있었으니까.

샬롯은 그냥 불퉁하게 입술을 부풀렸다.

“상대는 진검이었다고요.”

“그럼 우리 막냇동생께서는 맨손이었나?”

“나뭇가지밖에 없었어요.”

아이작의 눈이 순식간에 흥미로 반짝였다.

“이거, 나무를 무척 잘 다루는 데 소질이 있군. 그쪽으로 재능이 발현한 건가?”

어떻게 봐도 농담인데, 아이작이 살벌하게 웃으며 말하니까 농담인지, 아닌지 구분하기도 어려웠다.

샬롯은 아이작의 눈을 빤히 들여다보다가, 그가 처음에 여기 등장했을 때 했던 말을 떠올렸다.

분명히 숙부가 허락해 준 일이 못마땅하다는 듯이 말했었다.

“설마, 요제프랑 같이 수련하는 걸 방해하러 온 건 아니죠?”

아이작의 시선이 공터 여기저기에 가 닿았다. 제대로 돌도 골라지지 않고 잡초가 무성한 바닥에 이렇다 할 시설도 없는 초라한 모습이었다.

“방해라…… 글쎄. 하지만 굳이 이런 열악한 곳에서 뭘 할 필요가 있나?”

“여기가 제 수련에 도움이 된다면요?”

한 번 써먹었던 카드를 다시 꺼내는 건 쉬웠다. 그리고 사실이기도 했고.

아이작은 재밌다는 듯 피식 웃었다.

“그 말을 믿으라고 하는 건가? 뭐, 숙부께서는 홀랑 넘어가신 것 같다만.”

“……믿든지, 말든지는 오라버니 마음대로 하세요.”

“좋은 환경에서 최선의 향상을 해도 모자란 상황에 굳이 시간을 낭비하겠다니, 말리진 않겠다.”

“……감사하네요.”

“다만 저번의 그거, 대답은 해 줘야지.”

샬롯은 아이작이 저를 빤히 쳐다보는 시선에, 그가 제게 정식으로 사과하면 그의 질문에 제대로 답변해 주겠다고 했던 말을 떠올렸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뭐든 물어보세요.”

아이작은 결연해 보이는 샬롯의 표정을 바라보곤 피식피식 웃으며 옆으로 손을 내밀었다. 그 손짓이 익숙한 듯, 시종이 얼른 다가와 그의 손에 물이 든 병을 쥐여 주었다.

아이작이 물병을 샬롯의 옆에 내려놓고서 머리를 부드럽게 쓸어 주었다.

“이거라도 손에 뿌리고 기다려. 벤이 곧 도착할 테니까.”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아이작의 눈이, 그늘져서 제대로 그 속이 들여다보이지 않았다.

아이작은 그 뜻 모를 시선으로 샬롯을 한참 내려다보다가 슬쩍 요제프를 살폈다.

아이작은 세티야 가의 다른 자들보다는 요제프 황자를 그리 싫어하지 않는 편이었다.

아이작이야말로, 관습적인 것을 가장 싫어하는 사람이었다.

황후가 대귀족가 출신이기 때문에, 그녀의 태생인 1, 2황자가 황제의 대를 이어야 한다? 솔직히, 아이작은 그렇게 하는 게 제가 공작가를 손에 넣는 데에 도움이 되기 때문에 찬성하는 것뿐이었다.

허약하기 짝이 없는 1황자도, 돌진하는 말처럼 옆을 볼 줄 모르는 2황자도 제 마음에는 들지 않았다.

그에 비해 3황자는, 그나마 볼 때마다 마치 다른 사람처럼 쑥쑥 자라나는 게 재밌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3황자에게 뭔가를 기대하는 것은 아니었다.

3황자에겐 결정적인 게 부족했다.

야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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