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파 공녀님 (35)화 (35/123)

#35.

메이드장은 빵과 치즈에 신선한 과일과 따뜻한 날씨에도 잘 상하지 않는 말린 햄, 병에 담은 산양 우유 등을 피크닉 바구니에 담고 식기류와 바닥에 깔 돗자리까지 챙겨 내어 왔다.

“우와, 너무 예쁘다. 메이드장은 꼼꼼하구나.”

샬롯이 눈을 반짝이며 감탄하자 메이드들은 어딘가 으쓱한 기분이 되었다.

“그럼 조심해서 다녀오세요. 내일 또 필요하시면 언제든 말씀하시고요.”

“정말? 정말 그래도 돼?”

“그럼요.”

샬롯이 신이 나서 방긋 웃고선 메이드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잘 먹을게, 고마워.”

정말로 기쁜지, 식당을 나서는 작은 아이의 발걸음이 제법 가벼웠다.

메이드들은 서로를 마주 보며, 샬롯 님께서 정말 다른 사람처럼 변했다고 속닥이며 입을 모았다.

* * *

도시락까지 챙긴 샬롯은 도보로 가기는 조금 먼 길을 마차를 타고 이동했다.

말이나 망아지를 빌려 타도 좋을 것 같았지만, 도시락이 망가질 것을 염려한 탓이었다.

제롬에게 붙잡혔던 것에다 도시락을 부탁하는 것까지 해서, 샬롯이 요제프와 약속한 공터에 도착했을 때는 시간이 제법 늦은 아침이 되어 있었다.

“이래도? 이래도, 네가 그렇게 잘났어?”

챙!

“우리 황자님께서 그렇게 제 주제를 모르니까, 2황자님께서 교육을 특별히 부탁한 것 아냐. 어?”

챙!

샬롯은 마차에서 내리기 직전부터 들려오는 소란스러운 소리에 깜짝 놀라 고개를 내밀었다.

저 멀리, 원래 가려던 공터에 아이들이 제법 몰려들어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그중에는 란슬롯과 요제프도 섞여 있는 것 같았다.

‘……아침부터 도대체 뭘 하는 거야? 내가 그렇게 숨어 있으라고 했는데.’

샬롯은 요제프를 탓할 일이 아닌 줄 알면서도 저도 모르게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사실은 요제프가 다른 아이들에게 붙들려 있다는 것도 모르고 아침부터 제롬과 말씨름을 하느라고, 또 도시락을 싸 오겠다며 허비한 시간이 있음에도 느긋하게 온 스스로에게 화가 났다.

마차가 멈춰 서는 것을 기다리는 것조차 초조해서, 마차 바퀴가 완전히 멎기도 전에 그녀는 이미 마차에서 뛰어내렸다.

마차를 몰던 마부가 기겁해서 급히 말을 멈춰 세웠을 때는, 샬롯은 이미 아이들 곁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너른 공터를 뛰듯이 지나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아이들이 우르르 모여 있었다. 그리고 그 틈으로 란슬롯과 요제프가 검을 맞대고 있는 게 얼핏얼핏 보였다.

그래도 일방적으로 나무에 묶이거나 돌을 맞는 것보다는, 차라리 대련이 낫다.

챙!

저도 모르게 안도하려는 순간, 날카롭게 검이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샬롯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다시 한번 아이들 틈바구니에 끼어들자, 샬롯인 걸 알아챈 아이들이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르고 어어, 하면서 길을 열어 주었다.

제대로 다시 살피자 두 아이의 손에 들려 있는 게 흔히들 대련에서 사용하는 목검이 아니라 날이 바짝 살아 있는 진검이라는 게 보였다.

그녀는 심장이 다 덜컹거렸다.

혹시라도 둘 중 하나가 실수할까 봐 고함을 지를 수도 없을 정도로 놀랐다.

‘누가 진검을 대련할 때 써? 진검을 꺼낸다는 건, 둘 중 하나의 생사를 결정짓겠다는 뜻 아냐?’

무림과 여기의 법도가 다를지도 모르겠지만, 아이들끼리 대련할 때 진검을 쓰는 게 말도 안 된다는 것 정도는 알았다.

샬롯은 얼른 고개를 돌려 요제프의 호위 기사 두 명을 찾았다.

하지만 이런 말도 안 되는 짓이 벌어지고 있는데도 그 둘은 그냥 이 상황을 지켜만 보고 있었다.

‘……어떻게 저래? 저럴 거면 계속 붙어 다닐 필요가 뭐가 있어?’

하긴, 요제프가 온몸이 멍이 들도록 얻어맞을 때도 그저 지켜만 보고 있던 이들이었다.

‘……호위 기사마저도, 2황자가 붙인 감시역이라는 건가.’

이렇게 된 이상, 이 상황을 뜯어말릴 사람은 그녀 자신밖에 없는 것 같았다.

챙, 챙!

날카로운 소리가 연달아 들렸다. 함부로 끼어들거나 시선을 끌기에는, 요제프와 란슬롯이 너무 가까이 붙어 있었다.

척 보기에도 란슬롯은 검을 잘 썼다.

샬롯은 눈을 가늘게 뜨고 둘이 떨어질 타이밍을 가늠했다.

조금이라도 떨어지는 순간, 끼어들어서 둘을 떼어 놓을 생각이었다.

챙!

다시 한번 란슬롯이 공세에 박차를 가했다. 그가 검을 위에서 아래로 크게 휘둘렀다가 방향을 바꿔 날카롭게 찔러 넣으며 요제프를 몰아붙였다.

요제프의 비어 있는 옆구리가 그대로 검에 노출되는 듯 보였다.

하지만 역시, 미래에 주인공이 될 인재라 그런지 요제프는 도저히 막아 낼 수도, 피해 낼 수도 없어 보이는 각도에서도 옆구리로 들어오는 검을 쳐냈다.

검날이 닿을 수 없는 각도에서, 폼멜로 밀어내듯 막아 낸 거다.

샬롯은 반사적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역시, 란슬롯도 검을 잘 썼지만 2황자를 뛰어넘는다는 요제프의 실력은 그보다 한 수 위일 터였다.

그때였다.

오랫동안 검을 맞댄 듯한 두 사람이 약간 지쳐 보인다는 생각을 하기가 무섭게, 낯선 소리가 들려왔다.

웅-

마치, 여러 마리의 벌 떼가 한꺼번에 날개를 움직이는 듯한 소리였다.

샬롯은 그 소리를 듣는 순간, 제 귀를 의심했다.

‘……미친 것 아냐?’

그 소리는, 요제프를 향한 공격이 수포가 되자 란슬롯이 이를 악다물고 검에 오러를 두르는 소리였다.

샬롯의 마음을 모르는 아이들 사이에서는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와, 역시 란슬롯.”

“세티야 가의 재능은 정말 대단하긴 하다.”

“오러 직접 보는 건 오랜만이야.”

란슬롯이 아이들의 목소리에 더 흥분한 듯 오러를 두른 검을 마구 휘둘렀다.

“왜, 그 잘난 재능, 보여 주시죠. 나를 상대로는 오러도 쓰기 싫다, 이건가? 그런 주제에 왜 그 대련장에선 날 상대하겠답시고 끼어들었지? 어, 황자님. 어?”

떨어지긴커녕 계속 점점 더 가까이만 붙는 둘 사이에 함부로 끼어드는 건 위험해 보였지만, 이제 슬슬 속이 타들어 갔다.

샬롯은 눈을 가늘게 뜨고 요제프를 살폈다. 요제프는 전혀 란슬롯의 오러에 대응하지 못하고 그저 이리저리 검을 피하고만 있었다.

‘……안 돼.’

샬롯은 그의 몸을 당장 어제 살폈기에 알았다. 요제프는 지금 오러를 쓸 수 있는 몸 상태가 아니었다.

분명 요제프의 몸은 많이 나아져 있었지만…… 일상생활을 할 때 고통이 없다는 것뿐이었다.

역시 예상대로 오러를 전혀 쓸 생각조차 못 하고 있었다.

‘중지시켜야 해.’

“란슬롯, 미쳤어? 그만둬. 이런 식이면…….”

샬롯이 막 소리를 질러 대련을 중지시키려는 순간, 란슬롯이 든 검이 요제프가 든 검에 닿는 게 눈에 들어왔다.

* * *

란슬롯에게도 나름의 철칙이 있었다.

요제프 황자를 상대할 때는, 그래도 옷을 입으면 티가 나지 않을 정도로만 괴롭히는 것.

제아무리 2황자님께 밉보여서 세티야 가에 맡겨졌다고는 해도, 어쨌든 황자였으니까.

하지만 아이란 생각보다 잔인하게 마련이었고, 그 철칙 안에서 얼마든 다양한 짓거리로 황자를 괴롭힐 수 있었다.

그 결과 어제부터 머리끝까지 화가 나 있던 란슬롯이 오늘 선택한 분풀이는 진검 대련이었다.

굳이 진검을 선택한 이유는 별 게 아니었다.

이렇게까지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그는 다른 친구들 앞에서 오러를 과시하고 싶었던 거다.

진검이 아니면 오러를 감당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상식이었으니까.

아침 수련을 빌미로 모인 아이들과 란슬롯은 아침 이른 시간부터 진검을 준비해서 요제프 황자를 찾아갔다.

비겁한 대련은 아니었다.

상대도 오러를 쓸 수 있었으니까.

평소에는 시종을 불러 끌고 나와야 훈련장에 나오는 황자님은, 오늘따라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아침 이른 시간부터 훈련장 한가운데 나무 그루터기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마치 누구를 기다리는 사람처럼.

란슬롯과 아이들을 발견한 요제프 황자가 귀찮다는 듯 눈을 감아 버리는 게 그의 신경을 더 긁었다.

란슬롯은 시종을 시켜 요제프를 억지로 일으켜 세우곤, 그 발아래에 진검을 던져 줬다.

쨍그랑.

“황자님, 어제 기억나? 황자님이 어쨌든 나랑 직접 상대하겠다고 나섰잖아. 내가 우스워? 어? 그렇게 나랑 싸우고 싶다고 하니까, 그 소원 들어줄게. 어?”

요제프의 검고 고요한 시선이 그 진검을 아주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란슬롯은 요제프가 그렇게 여유 있게 구는 게 짜증이 났다.

사람이 맨날 맞고 맨날 혼나면, 기가 죽고 비굴한 구석이 있어야 하는데 요제프 황자에겐 그런 게 없었다.

맨날 저렇게 인형처럼 텅 빈 죽은 눈동자를 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게 참, 이유 없이 신경을 긁었다.

2황자님이 왜 3황자를 교육해 달라고 보냈는지 알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요제프 황자는 참 어떤 상황에서도 변함이 없었다.

그래서 란슬롯은 평소보다 더 흥분했을지도 모르겠다.

란슬롯이 비웃음을 흘리며 다시 한번 검을 오러로 감싸자, 아이들 사이에서 다시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그냥 적당히 과시하고 끝낼 생각이던 란슬롯은, 그 감탄사에 등을 떠밀리듯 몇 번 검을 더 휘둘렀다.

‘쯧, 여기까지군.’

슬슬 구경만 하던 호위 기사들이 불안한 표정으로 개입하려 드는 게 보였기 때문에, 란슬롯은 위협 삼아 마지막 한 번만 검을 휘두르고 검을 거둬들이려 했다.

그 순간이었다.

챙-!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란슬롯의 오러에 닿은 요제프의 검이 두 동강 나며 부러졌고, 미처 란슬롯이 어떻게 반응하기도 전에 분홍색 머리카락이 제 앞으로 뛰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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