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파 공녀님 (34)화 (34/123)

#34.

그리고 그 순간, 제롬의 시야에 샬롯이 입고 있는 무복이 들어왔다. 그것도, 그의 속내에 자라고 있는 급조된 측은함을 재촉하기엔 충분했다.

도대체 앞뒤가 어떻게 된 이야기인지는 모르겠지만 카밀라 가주와 함께 있을 때 샬롯이 란슬롯과 대련을 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났다.

‘손을 놓고 있는 건 아닌 거야. 그래도 어떻게든 칼그림자의 날을 대비해서, 이 가문에 남아 있어 보려고 노력하는 모양이군.’

이제 와서 뒤늦은 노력을 한다고 해서, 뭘 얼마나 따라잡을 수 있을까.

‘……하지만 가주님 말대로, 너무 정을 줘서 될 일도 아니야. 샬롯이 알아서 할 일이지. 나는 그저 지켜볼 뿐. 다만 내가 도울 수 있는 게 있다면……’

“정말로 뭐든지라고 하셨어요?”

“그렇다니까.”

샬롯은 제롬이 몇 번이고 확답하고서야, 얼른 제가 숨겨 온 용건을 입에 담았다.

“그럼, 제가 수련을 좀 하게 허락해 주셨으면 해요.”

“……수련?”

“뭐든 좋다고 하셨잖아요. 요제프 황자와 함께 수련하고 싶어요. 황자가 거처하고 있는 제6 별관 앞에서요.”

제롬은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찡그렸다.

요즘의 샬롯은 하여튼, 제가 생각하는 범주 안에서 뭔가를 행동하는 일이 없었다.

갑자기 정중하고 얌전하게 굴질 않나, 또 갑자기 관심도 없던 일들을 시작하질 않나…….

하지만 이렇게까지 예상을 벗어나는 일은 사양이었다.

“말이 되는 소릴 해야 허락해 줄 것이 아니냐.”

제롬이 엄하게 목소리를 낮춰 꾸짖었다.

“네가 아플 때, 3황자님이 자꾸 너를 찾기에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가 의아하게 생각하긴 했다만, 부디 네게 도움이 되는 친분을 쌓거라.”

샬롯은 제롬을 똑바로 올려다보았다. 반대할 걸 예상 못 하고 꺼낸 이야기는 아니었다.

“뭐든, 허락해 주신다고 하셨잖아요.”

“그래도 이것과 그건 다르지.”

“전…… 아버지만은 이해해 주실 줄 알았어요. 제 마음을……”

샬롯이 대뜸, 슬픈 척 눈을 내리깔았다.

스스로 생각해도 정말 적성에 안 맞는 연기였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때그때 기분에 따라 움직이는 제롬을 설득하려면 이 방법밖에 없었다.

“그게 대체 무슨 소리냐?”

“저는…… 쫓겨나기 싫어요.”

“……샬롯. 지금, 이 상황과 관계없는 이야기는……”

“아버지도 아실 거예요. 3황자 요제프가 대단한 검의 재능을 가졌다는 거 말이에요. 물론 뭐, 몸이 안 좋다나 그래서 제대로 실력 발휘는 못 하는 것 같지만. 혹시 못 들어 보셨나요?”

3황자 요제프의 재능에 대한 건, 아는 사람이 많지 않은 이야기였다.

샬롯이 안다는데, 제가 모른다고 할 수는 없었다.

제롬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기야 알지. 천부적인 재능이 있다는 건.”

“거봐요. 그런 요제프 황자님이 재능이라고는 없는 저랑 같이 검 수련을 해 주고 있었어요, 사실.”

“……뭐?”

“그게 아니면, 제가 어떻게 란슬롯을 이겼겠어요?”

“……그건.”

제롬은 그제야 모든 게 이해됐다.

요즘 들어 샬롯이 마치 새로운 선생님이라도 들인 듯, 태도도 바뀌고 검 실력도 늘어난 것을.

도대체 어떻게 된 영문인가 했더니, 요제프 황자에게 배운 모양이었다.

좀 놀란 제롬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제롬은 황곰 기사단의 단장직을 맡고 있으니만큼, 황족 아이들의 검술 교관 노릇을 했던 시절도 있었다.

요제프 황자가 재능이 있는 것은 틀림없었고, 검의 발전에 욕심이 있는 것도 맞지만…… 그 아이는 절대로 크게 될 수가 없었다.

요제프 황자는 어느 순간부터, 검을 무리하게 쓰고 나면 털썩 쓰러져 버리기가 일쑤였다. 게다가 남에게는 밝히지 않고 황제 폐하께만 말씀드렸던 이야기지만, 가끔은 그러다가 간질이라도 앓듯이 눈이 뒤집히거나 경련하는 모습까지 보였다.

검을 쓰는 아이들을 지켜보다 보면, 재능과 노력이 있다고 해서 반드시 강자가 되는 건 아니라는 걸 알게 된다.

몸에 깊은 병이 깃들어 있는 데야 별도리가 없지.

그런 요제프 황자의 다른 단점은, 맹목적이라는 거였다.

사람이 뭘 하다가 안 되면 다른 길을 찾아야 했는데, 무엇을 권해도 관심조차 보이지 않았다.

되든 안 되든, 그저 검뿐이었다.

수련을 하면 할수록 더 몸이 망가진다면, 두려워서라도 검을 쥐지 않아야 맞는데. 요제프 황자는 겁도 모르는 사람처럼 굴었다.

그런 요제프 황자가 샬롯을 가르쳤다?

그럴 만한 친분이 있었단 말인가?

아니, 애초에 그렇게 누굴 가르칠 만큼 의욕이 있는 편이 아닌데.

게다가 최근 들어선 줄곧 방에 처박혀 있기만 했던 샬롯인데, 꽤 오래된 이야기일까?

하지만 샬롯은 이 어설픈 거짓말에 대해 제롬이 깊게 생각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고 얼른 재촉하듯 말을 이었다.

“아버지는 저에 대해 뭐든 잘 아시니까 전혀 모르셨던 건 아니죠?”

“……어? 어…… 그렇지.”

“역시 아버지세요. 그것 보세요, 지금으로선 제가 검술이 빨리 늘 길은 요제프 황자의 도움을 받는 방법밖엔 없어요. 물론, 아버지께서 꺼림칙하게 여기시는 것도 이해하지만 제가 알아서 잘 처신할게요.”

자신이 신경 쓰고 있는 부분을 콕 집어서 그 부분은 알아서 잘하겠다고 하는 샬롯의 말은, 제롬의 가려운 부분을 긁어 주는 말이었다.

제롬은 잠깐 망설였지만, 더 이상 반대할 명분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제 와서 반대해 봤자, 지금까지 계속 수련을 해 왔다는데…… 너무 늦은 반대일 테다.

게다가 칼그림자의 날은 정말 얼마 남지도 않았다. 수련하는 게 그날을 위한 거라면, 어차피 버릴 패인 3황자를 정말 잠깐만 이용하는 것뿐이니 그리 나쁜 일도 아닐 거다.

기왕 이렇게 된 거, 쪼잔하지 않게 허락해 주는 수밖에.

제롬은 제게 주어진 유일한 답변을 등 떠밀리듯 입에 올렸다.

“……뭐든 들어준다고 했으니 어쩔 수 없구나. 알겠다.”

“정말이에요?”

“……그래.”

“정말, 아빠밖에 없어요.”

샬롯이 신이 나서 방긋 웃었다.

제롬은 어딘가 찝찝한 기분을 떨칠 수 없었지만, 제 딸이 제자리를 돌며 신나 하는 모습이 전에 없이 보기 좋았다.

지금까지는 샬롯은 뭔가를 해 줘도, 해 줘도 부족한 듯 구는 아이였다. 그런데 이렇게 별것 아닐 수도 있는 것들에 일일이 감동하는 게, 묘하게 재밌어지는 거다.

지금도, 평소 같았으면 허락할 만한 일이 아니었는데도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을 정도로.

제롬은 마음속에 흐뭇함과 찝찝함을 가득 담은 채로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래, 또 필요한 게 생각나면 베티에게 말해 두거라.”

“네. 알겠습니다, 아버지.”

“그래, 몸 성히 지내고.”

샬롯은 정중히 몸을 굽혀 인사하며 대답했다.

“네. 아버지께서도 시하초하지절(時下初夏之節)에 기체후일향만강(氣體候一向萬康)하옵소서.”

제롬은 당최 알아듣지 못할 말을 중얼거리는 딸을 흘끗 바라보곤 고개를 돌려 계단을 내려갔다.

‘……내가 요제프와 샬롯이 함께 수련하도록 허락해 줬다는 이야길 들으면 러슬이 한바탕 난리를 칠 텐데. 거기서 끝나면 다행이지만, 가주님께서도 아시면 뭐라고 하실지…….’

계단을 내려가던 제롬의 머릿속에 뒤늦게 골칫거리들이 하나둘 떠올랐지만, 새로 꾸민 방을 보고 얼굴이 빨개지도록 기뻐하는 샬롯의 얼굴을 생각하자니 이제 와서 없던 이야기로 돌릴 수도 없을 것 같았다.

‘……어쩌다가 갑자기 허락한 건지 나도 모르겠군.’

제롬은 혀를 차며 발을 재촉했다.

성미가 급한 제 아들이 쳐들어오기 전에 잠깐 본가를 비우고 다른 곳에 가 있든가, 뭔가 다른 수를 내야겠다고 생각하며.

* * *

샬롯은 방에서 나오면서 식당에 들렀다.

어제 깨달은 건데, 요제프는 이상할 정도로 식사를 잘 안 했다.

무슨 생각에서 그러는 건지는 몰라도 제가 억지로 앞에서 먹으라고 종용하면 또 전혀 안 먹지는 않았으니까. 오늘은 아예 도시락을 챙겨 가서 먹일 생각이었다.

그녀를 본 키친 메이드들은 깜짝 놀란 얼굴이었지만, 샬롯을 보고도 못 본 체하지는 않았다.

아이작이 황궁 연회에서 그녀에게 공식적으로 사과했다는 이야기는 세티야 가 사용인들 사이에서 한때 떠들썩한 화제였던 거다.

옛날이었으면 모를까, 지금은 샬롯을 보고도 대놓고 무시하는 사용인은 없었다.

“샬롯 아가씨, 어쩐 일로 아침부터 여길 찾아 주셨어요?”

샬롯은 난처한 얼굴로 메이드장 앞에서 쭈뼛거리다가 겨우 입을 뗐다.

“저기, 이런 부탁 해도 좋을지 모르겠는데…… 혹시 도시락 좀 싸 줄 수 있을까?”

“네? 도시락이요?”

“응. 오늘 아침이랑 점심은 수련하면서 먹으려고 하는데, 나 혼자 먹을 게 아니라서 2인분 도시락을 싸 줬으면 좋겠는데……”

메이드장은 눈을 깜박였다.

별것도 아닌 대수롭잖은 부탁이었다.

어차피 공작가 사람들이 먹을 음식이야 계속해서 준비해야 했고, 식솔들이 먹을 음식까지 만들어 내야 했기 때문에 주방은 항상 돌아가고 있었다.

도시락이라고 해 봐야 특별히 다른 메뉴를 주문하는 게 아니라면 기존에 있는 음식들을 담아내기만 하면 그만이었다.

하도 난처한 얼굴로 부탁이라고까지 하기에 뭐 대단한 일인 줄 알았는데.

“그런 건 베티에게 요청하시면 저희가 가져다 드리면 될 일인걸요.”

“응. 아는데…… 아침에 바쁠 텐데, 귀찮게 하는 것 같아서. 얼굴이라도 보고 부탁하려고.”

“……어머.”

메이드장뿐만 아니라 메이드장과 샬롯의 대화를 들은 다른 메이드들도 서로를 바라보며 놀란 눈빛을 교환했다.

베티가 요즘 안팎으로 다니면서 샬롯 님이 얼마나 달라지셨고, 얼마나 잘해 주는지를 시도 때도 없이 자랑하고 다녔지만 다들 한 귀로 흘려들었었다.

샬롯의 변덕이야 하루 이틀 있는 일이 아니었고, 그러다 보니 며칠 안 가 원래대로 돌아가겠지 싶었던 거다.

그런데 사용인들 알기를 아주 우습게 알던 샬롯이, 이렇게 저희를 생각해서 직접 부탁하러 나타났다니까 이건 또 무슨 일인가 싶었다.

“어디로 가시는지 말씀해 주시면, 도시락을 챙겨서 보내 드릴게요.”

“응. 그래 줄래? 아니면 내가 지금 가져가도 괜찮아.”

“아…… 그러면 잠깐만 기다려 주세요.”

메이드장은 즐겁게 키친 메이드들을 진두지휘해서 순식간에 두 개의 도시락을 싸 냈다.

원래 하는 일이었지만, 어쩐지 그런 부드러운 부탁을 듣고 나니까 도시락을 싸 주는 것도 왠지 기꺼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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