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그러고 보면, 아까도 저 까칠한 황자님이 저보고 같이 살자고 하지 않았던가?
저야 책에서 요제프 황자에 대한 이야기를 하도 많이 접해서 내적인 친밀감이 있지만, 황자가 갑자기 이렇게까지 제게 친하게 구는 건 좀 이상하긴 했다.
“내가 좋아서?”
샬롯이 저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묻자, 황자가 느릿하게 턱을 괴곤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대답은 한참 늦게 튀어나왔다.
“그렇다고 해 두지.”
“……어? 그렇다고 해 두는 게 뭔데? 맞으면 맞고, 아니면 아닌 거지.”
“네 말대로, 내가 네게 이것저것을 추궁할 수도 없는 처지니까. 나는 내 식대로 그대를 관찰하겠어.”
“……관찰?”
관찰이라니.
샬롯의 머릿속에는 화산파 장로님 중 한 명이 토끼를 잡아다 우리에 가둬 두고 관찰 일지를 쓰던 장면이 스쳐 지나갔다.
‘보통 인간 대 인간으로는 관찰이라는 말을 잘 안 쓰지 않나?’
“그보다, 오늘 여기까지 나온 걸 보니, 수련이라도 할 생각이었나 본데.”
그녀는 요제프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말을 돌린다고 생각했지만, 수련이라는 말에 귀가 솔깃했다.
“너는?”
“뭐가?”
“너, 저번에 들으니까 대회 나갈 거라며. 칼그림자의 날에.”
“그래.”
“너도 수련해야 되잖아. 내가 상대가 되어 주면 되겠네.”
“이거, 갈수록 속을 더 모르겠군.”
요제프는 묘한 미소를 흘리며 냅킨을 접었다.
샬롯은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요제프에게 황급히 손바닥을 펴 보였다.
“아니, 아니. 잠깐만.”
“왜?”
“아니……”
당장이라도 수련을 하러 가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순간적으로 헐렁한 소매 사이로 보이는 깡마른 황자의 팔이 눈에 들어온 거다.
‘……지금도 포크를 손에 들지도 않았지. 그런데 그렇게 증오하는 황가에 있을 때는 뭘 제대로 먹기나 했겠어? 세티야 가에 있을 때도 그래.’
그렇게 생각하니까, 더욱더 요제프에게 자주 놀러 가서 밥이라도 챙겨 먹여야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아무튼 잘 먹어야 잘 크고, 사람이 건강하고 괴롭힘을 덜 당해야 폭군으로 자라지 않는 법이다.
“다 먹어. 다 먹고 일어나자.”
요제프는 식탁 위에 차려진 음식들을 흘끗 바라봤다.
“배는 별로 안 고픈데. 그보다……”
“아니, 나 어디 도망 안 가잖아. 그러니까, 먹자.”
“……그래.”
샬롯은 요제프가 느릿한 손으로 포크를 집어 드는 것을 보곤 저도 중단했던 식사를 계속했다.
식어 있는 수프를 데워 달라고 주문까지 해 가며, 샬롯은 요제프에게 좀 많이 먹으라고 종용해 댔다.
요제프는 몇 번 포크질을 하고 수저를 내려놓을 듯하더니, 샬롯이 자꾸만 음식을 많이 먹으라고 잔소리를 해 대자 내키지 않는 얼굴로도 꽤 오래 식사를 했다.
달칵.
“이젠 더 못 먹어.”
“아, 이젠 나도 배불러서 못 먹겠다. 너 먹이느라 나까지 많이 먹었어.”
요제프는 부른 배를 쓰다듬으며 테이블 위에 푹 엎드리는 샬롯을 빤히 보다가 문득 물었다.
“동생이라도 있나?”
“어?”
“아니, 습관적으로 그렇게 굴기에. 말을 놓는 걸 편해하는 것부터가.”
샬롯은 ‘원래 이 몸이 너보다 세 살 누님이라서 그렇단다.’라는 말을 꾸역꾸역 참으며 머쓱하게 웃었다.
“……아. 아니, 그런 건 아니고. 그냥 네가 귀여워서.”
요제프는 표정을 읽기 힘든 얼굴로 눈을 꾹 눌러 감았다 뜨고선,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고 냅킨을 접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지.”
“어? 어, 가자.”
* * *
둘이 오랜 식사를 마치고 식당에서 나왔을 때는 꽤 시간이 흘러 있었다.
‘쌀쌀하던 이른 아침에 나왔는데, 벌써 점심이 지나 있네.’
샬롯은 혀를 차며 마차를 찾다가, 제 마차는 황곰 기사단 앞에 있다는 것을 뒤늦게 떠올렸다.
“……아, 어쩌지? 잠깐 기사단 쪽으로 들렀다 돌아가야겠는데?”
그러자 요제프가 제가 타고 온 백마 쪽을 흘끗 눈짓했다.
“아까처럼 아슬란을 타면 될 것 같은데.”
“아, 이름이 아슬란이야?”
무림에서도 말은 중요한 이동 수단이었다.
화산파에 아무리 경공이 발달했다지만, 모든 이동을 경공으로 할 수도 없었고 무림인이 아닌 사람들도 꽤 드나들었기 때문에 말을 접할 일은 많았다.
샬롯은 익숙하게 아슬란에게 다가갔다.
아까는 정신이 없어 제대로 알아보지 못했지만 아슬란은 아름다운 백마였다.
화산파 근처에는 주로 갈색 품종의 말이 많았기 때문에 백마를 보는 건 드물었다.
과연 아무리 대접이 나쁜 황족이라지만, 황족이 쓰는 특유의 색들이 있긴 했다.
“쉬, 예쁜 말이네.”
처음 샬롯을 태웠을 때는 순식간에 등을 내주고 말았던 아슬란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처음에는 경계하는 기색이었지만 샬롯이 왼쪽에서 천천히 다가서면서 목을 쓰다듬어 주자 그녀가 마음에 들었는지 부드럽게 고개를 부볐다.
샬롯이 제 키에는 어림도 없는 안장을 흘끗 바라보곤, 아슬란이 고개를 숙일 수 있도록 유도했다.
아슬란은 별다른 반항 없이 샬롯이 이끄는 대로 목을 낮추고 앞발을 살짝 구부렸다.
요제프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제법 고집이 센 말이라 어지간한 사람의 말은 안 듣는데…… 말을 썩 잘 다루는군.”
“아까도 탔잖아. 뭘 이 정도로.”
샬롯이 웃으며 말에 먼저 올랐고, 요제프는 혼자 고개를 저으며 그녀의 뒤에 올라탔다.
* * *
황곰 기사단 수련장에서 있었던 일은 빠르게 입에서 입을 타고 세티야 가주 카밀라의 귀까지 들어갔다.
카밀라는 의외라는 얼굴을 했지만, 대단히 놀란 얼굴은 아니었다.
그녀는 찻잔을 기울이며 아무렇지도 않게 제롬에게 물었다.
“어떻게 된 거지? 지난번에 직접 만났을 때부터 조금 달라진 구석이 있다는 생각은 했는데.”
제롬이 눈을 깜박였다.
그것을 시원하게 대답할 수 있는 재량이 있으면 얼마나 좋겠냐마는, 저 본인으로서도 샬롯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 없었다.
카밀라는 제롬의 얼굴을 오래 바라보다가 붉은 입술을 길게 접으며 미소를 지었다.
“그래, 뭐. 사소한 사건일 뿐, 큰 이변은 없겠지만. 조금이라도 재밌는 게 좋지.”
제롬도 알고 있었다.
어차피 무도 대회의 결과는 정해진 거고, 칼그림자의 날에 샬롯은 쫓겨나게 될 거라는 걸.
제롬은 복잡한 머리로 고개를 숙였다.
* * *
샬롯과 요제프가 다시 세티야 가로 돌아왔을 때는 꽤 시간이 흘러 이미 오후가 되어 있었다.
세티야 가의 앞마당은 어딘가 시끌벅적했다.
“이건 어디에 놓습니까?”
“부양 마법을 쓸 수 있는 마법사님이 필요합니다.”
일꾼들이 웬 가구들을 옮기고 있는지, 요란하게 뭔가를 떠들며 별관과 본관 사이를 왔다 갔다 오가는 모습이 보였다. 게다가 새로 사들인 물건이 있는지, 장사치가 보낸 마차도 정원 앞에 여러 대 서 있었다.
“공작가란, 매일같이 시끄러운 법이네.”
샬롯은 세티야 가의 일을 남 일처럼 이야기하며 요제프가 머무는 별관으로 향했다.
* * *
다그닥, 다그닥.
요제프와 샬롯, 둘만이 탄 백마가 좁은 오솔길을 한가로이 가로질렀다.
두 아이가 백마를 타고 오솔길을 지나는 광경은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아홉 살, 열두 살이라는 비교적 어린 나이의 아이들이라 더 그랬다.
반 머리로 분홍색 머리를 위에는 땋아 올리고, 아래에는 풀어 내린 샬롯과 그녀의 몸에 팔을 두르듯 하여 고삐를 움켜쥔 요제프의 표정이 이 순간에 녹아들 듯 누그러져 있었기에 더욱 그랬다.
나이 차가 세 살이나 나서 그런지, 가느다란 요제프의 몸이 앉은 채로도 반 뼘은 더 컸다.
‘……고즈넉하네.’
요제프의 호위 기사 두 명이 둘을 따라온다고는 해도, 정말 고요하고 오붓한 시간이었다.
둘 다 다른 사람의 눈에 띄기만 해도 괴롭힘을 당하는 이였기 때문에 단둘만 보내는 시간이 더 조용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리고 둘 중에서 그나마 말이 많은 편인 샬롯이 아무런 말을 하지 않고 멍하니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샬롯은 숲을 좋아했다.
화산파가 깊은 산세에 자리 잡았던 것 때문일 수도 있고, 수련할 때마다 조용한 숲속을 찾아들곤 했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딱히 가족이나 친구가 없는 그녀에게 숲은 유일한 친구 같은 공간이었다.
그냥, 호젓하게 거기에 있어서, 그녀가 찾아가면 속이 탁 트이는 그런 곳.
그녀가 머리 위로 비치는, 높다란 나무들 틈새로 쏟아지는 햇빛 모양을 찾아 고개를 들고 있는데 문득 요제프가 툭 질문을 던졌다.
“근데 왜, 나한테 이렇게까지 하는 건지는 물어보면 대답을 들을 수 있나?”
“……어?”
다그닥, 다그닥.
샬롯은 위를 올려다보고 있던 시선을 더 꺾어, 제 뒤에 앉은 요제프를 바라보려다가 그만 그에게 풀썩 안겼다.
‘하마터면 떨어질 뻔했네.’
샬롯은 자꾸 전생의 저를 생각해서 몸을 함부로 쓰는 습관을 버려야겠다고 생각하며 자세를 다시 고쳐앉았다.
그러곤 제대로 고개를 옆으로 돌려 뒤를 바라보았다.
말고삐를 쥔 요제프의 조용한 시선이 그녀를 맞았다.
“지금 왜 잘해 주냐고 물은 거야?”
“그래.”
“내가 뭘 그렇게 잘해 줬나?”
“그래.”
덤덤한 대답이었다.
샬롯은 무심코 기억을 되짚어 보았다.
란슬롯과 다른 아이들이랑 싸울 때, 그녀가 덤벼들기도 했다. 그리고 황후의 앞에서 앞뒤 재지 않고 뛰어들어서 요제프를 감싸 주고, 또 그의 몸을 어떻게 치료해 주겠다고 설치다가 쓰러지기도 했고.
‘……내가 생각해도 좀 뜬금없이 잘해 주긴 했네.’
샬롯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거, 내가 너 좋아해서 그런 거잖아.”
“그게 무슨……”
“뭐라고 하지? 왜, 그……”
샬롯은 연애 소설들을 주로 빌려주곤 하던 서가 주인이 종종 하곤 하던 말을 떠올리곤 얼른 말을 이었다.
“엄마 마음?”
“……뭐?”
요제프가 얼빠진 소리를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