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파 공녀님 (29)화 (29/123)

#29.

요제프가 차라리 제가 황족임을 들먹이거나, 샬롯에게 호감이 있다는 식으로 우겼다면 제가 할 말이 있었을 거다.

그런데 샬롯이 지금 지내고 있는 방이 정말 형편없는 꼴인 것은 누가 봐도 맞았다.

게다가 세티야 가 직계의 막내딸이 수련할 공간 하나 없어서 기사단 연병장까지 나왔다는 것도, 남이 지적하고 들면 당당한 부분은 아니었다.

지금까지야 샬롯 본인이 재능도 없고 수련에 흥미가 없었던지라, 이내 가문에서 내쫓길 거라는 명분이라도 있었는데.

샬롯이 도대체 어디서, 어떻게 수련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란슬롯을 잠깐이나마 상대해서 이길 정도로 실력을 쌓아 온 이상 그런 핑계는 더 이상 먹히지도 않았다.

“……그 부분은, 저희 가문이 알아서 할 일이니 전하께서 신경 쓰실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요제프가 느릿하게 시선을 옮겨, 샬롯을 눈에 담았다.

샬롯은 저를 바라보는 조용한 시선에서, 요제프가 제 의견을 묻는다는 것을 알아챘다.

물론 요제프의 제안이 몹시 끌렸지만, 러슬이 이렇게까지 나오는데 지금 당장 방을 옮기겠다고 해 봐야 씨알도 안 먹히겠다는 계산이 섰다.

게다가 러슬만 설득하면 될 문제도 아니었다.

아마 설득해야 하는 상대 중 가장 쉬운 상대인 베티조차 설득이 안 될 것 같았다.

“그러면…… 자주 놀러 가는 정도로 할 테니까. 그 정도는 괜찮지?”

하지만 러슬은 샬롯이 한발 뒤로 물러나서 새로 한 제안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요제프가 버려진 인형처럼 기운 없이 굴 때도 그의 근처에 샬롯이 가는 것 자체가 탐탁잖았는데, 요제프가 저렇게 흥미진진한 눈으로 제 동생을 보는 데에야.

“샬롯.”

“왜요?”

“너는 왜 하고많은 친구를 두고 하필 황자님과 그렇게 친하게 지내려고 하는지 모르겠구나.”

러슬이 강압적인 태도를 모두 버리고, 살살 달래듯 하는 말에 샬롯은 피식 기운 없이 웃었다.

문득 샬롯이 정말 외로웠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내가 친구가 어딨어? 오라버니는 정말 나한테 관심이라곤 없다.”

러슬은 뒤늦게 혼자 속으로 아차, 하고 중얼거렸다.

샬롯이 가문에서 무시당하는 처지라, 주변 가문의 아이들이나 같은 가문의 방계 아이들에게도 당연히 괄시당하며 지냈다는 이야기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샬롯에게 신경을 꺼 버린 뒤로 거기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지 못했던 거다.

어쩐지 말을 하면 할수록 사과할 일만 늘어나는 기분이었다.

“이 오라비가 미안하다. 괜히 황자님과 친하게 지내다가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어떻게 하려고 그러나 걱정이 되어서 그랬다.”

러슬이 변명하듯 주워섬긴 말을 뭐라고 해석했는지, 샬롯이 조금쯤 시선에 경멸을 섞어 제 오빠를 쏘아보았다.

“지금 사람을 앞에 두고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요제프 황자님은 고작해야 열두 살이야. 진짜 오라버니, 제정신이야?”

러슬은 입을 꾹 다물었다.

고작해야 열두 살이라니. 아홉 살인 샬롯이 할 소린 아닌 것 같지만, 정말이지 하는 말마다 족족 샬롯의 화를 돋우기만 하는 제가 미웠다.

그사이를 틈타 샬롯은 흥분해서 말을 이었다.

“그리고 저렇게 귀엽고 착한 어린애한테 말 함부로 하는 거 아니야. 애가 뭘 듣고 배우겠어? 그리고 정 불만이면, 오라버니도 매일 와서 감시하든가. 그럼 됐잖아. 이 이야긴 더 이상 안 할래.”

러슬은 샬롯이 아예 말을 딱 잘라 버리자, 저와 샬롯의 사이에 대해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요제프 황자보다도 저는 샬롯을 몰랐다.

제가 모르는 사이에 샬롯은 제법 제 의견이 생겨 있었고, 제가 관철하고자 하는 것이 뚜렷해져 있었다.

오빠들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같이 놀자고 떼만 쓰던 그 아이는 이제 없었다.

그러니 요제프 황자에 대해서도 괜히 더 뭐라고 이야기를 꺼내 봐야, 반항조로 요제프와 더 붙어 지낼 것 같았다.

저번에 가주님과 대화하던 자리에서부터 느꼈지만, 샬롯은 제가 제대로 관심을 주지 않은 사이에 완전 다른 사람처럼 변해 있었다.

아랫사람들 앞에서는 폭군처럼 굴면서, 저보다 조금이라도 높은 사람 앞에선 벌벌 떨며 말도 못 하던 아이였는데.

언제 이렇게 똑 부러지게 제 의사를 표현하게 됐을까?

그녀가 다른 친구도 없는 것을 제대로 돌봐 주지 못하고, 방이나 집기도 제대로 갖춰 주지 못한 것은 원인을 찾자면 저와 아버지의 탓이 맞았다.

그러니까, 지금 당장 샬롯을 다그칠 명분이 어디 있겠는가.

‘……돌아가면, 당장 샬롯의 방부터 어떻게 해야겠어. 아니, 나야 그렇다 치지만 아버님은 샬롯에게 그간 신경을 좀 썼어야 하는 것 아냐?’

“샬롯.”

“왜!”

“이 오라비가 다 잘못했다.”

샬롯은 요제프의 앞이라고 꽤 의식하는 듯하던 러슬이 문득 진심을 다해 사과를 해 오자 조금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제 위신을 챙기는 게 우선인 줄 알았는데.

“됐어, 이제 와서.”

“그래도, 네가 다시 말을 놔줘서 기쁘단다.”

“……아.”

‘흥분해서, 그만.’

샬롯이 눈을 깜박거리다가, 그만 저도 모르게 입꼬리를 허물고 웃어 버렸다.

제가 반말을 하는 게 대체 뭐라고.

그것 하나에 러슬이 진심으로 기뻐하는 얼굴을 하는 게 너무 웃겼다.

‘정말이지, 못살아.’

좀 반칙이라는 생각은 들었다.

화산파에도 꽤 수려한 도사들이 즐비하다고 생각했는데, 소설의 주연 격인 인물들의 얼굴은 정말이지 남다르게 아름다웠다.

특히 세티야 가와 황족들의 얼굴은.

그 대단한 얼굴로 저렇게 강아지처럼 풀이 죽어 있으니까 언제까지 화를 낼 수도 없었다.

샬롯은 웃음을 흘리며 어쩔 수 없다는 듯 눈을 접어 웃었다.

그 뒤로, 꽤 조용한 식사가 이어졌다.

러슬은 샬롯이 꽤 마음이 풀린 듯하자 더 이상 그녀의 심기를 건드리고 싶지 않았는지 요제프에 대해서는 그냥 무시로 일관했고, 샬롯은 외식을 마음껏 즐겼다.

그런 식사가 막 끝날 무렵, 시종이 찾아와 러슬을 다급하게 찾았다.

러슬은 요제프와 샬롯만 남기고 자리를 뜨는 것이 도저히 내키지 않는 것 같았지만 아무래도 기사단의 부단장이라는 자리가, 편안하게 자리를 비울 수 있는 자리는 아니었다.

러슬은 한숨을 길게 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란슬롯이 네게 뭔가 불만이 있는 것 같던데, 괜히 돌아다니다 마주치지 말고 오늘은 집으로 돌아가는 게 좋겠다.”

러슬의 참견은 참 어지간히도 뒷북이었다.

하지만, 오빠가 저를 걱정해 준다는 감정이 싫진 않았다.

샬롯은 러슬에게 면박을 주는 대신 그냥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으니까, 볼일 보러 가.”

그 말이 반말인 게 기쁜지, 러슬은 이를 드러내며 활짝 웃곤 자리를 떴다.

그는 식당에서 나와서부터 몇 번이고 한숨을 쉬다가, 말에 오르기 전 시종을 불러 몇 가지를 아버지에게 전달해 달라고 일렀다.

러슬이 나가고 나자, 식당에는 비로소 고요함이 찾아왔다.

샬롯은 그제야 주위를 둘러보았다.

워낙 러슬과 요제프가 벌이는 신경전에 저까지 신경이 곤두서 있어서, 제가 어디에 와 있는지 뭘 먹는지도 제대로 신경을 쓰지 못했다.

러슬이 한 층을 통째로 빌린 식당은 고급스럽고 아름다웠다.

밖이 잘 내다보이는 2층을 통째로 써서 만든 너른 식사 공간에, 새하얀 벽돌로 꾸며진 벽에는 넝쿨이 자라 있었다. 넓은 창으로 초여름의 바람이 오가는 게, 썩 기분이 좋았다.

“아…… 시원해.”

샬롯은 이런 것도, 정말 좋다고 생각했다.

이번 생에도 무술을 수련하고 싶긴 했다. 부지런히 노력하고 수련해야 성취를 이룰 수 있는 무술 수련에는 긴 인고의 시간이 드는 것은 맞았다.

하지만 전생처럼 수련에 모든 인생을 쏟아 넣고 싶지는 않았다.

한 번 살아 보니까, 생이 생각보다 짧아서.

동굴에서 벽곡단만 먹으며 수련하면 남들보다 조금 더 빨리 고수가 되기야 하겠지만, 그렇게까지 아등바등 살고 싶지는 않게 되었다.

‘외식 한 번 해 보지 못하고, 그렇게 살지 말고. 이번엔 사람들도 만나고, 이야기도 나누고, 그렇게 살아야지.’

그런 생각을 하니까, 문득 아까 황곰 기사단 수련장에서 있었던 장면이 떠올랐다.

란슬롯이 패배를 인정하지 못하고 다시 덤벼들 때, 요제프와 러슬이 차례로 그 앞을 막아서 줬던 모습이.

전생에는 무슨 일이 생기던, 하나부터 열까지 저 혼자서 감당하고 해결해야 했는데.

누군가가 참견하고 도와주려고 했다는 게 영 쑥스럽지만 싫지 않았다.

샬롯은 볼을 긁으며 저도 모르게 작게 웃다가 문득 요제프를 바라봤다.

요제프는 줄곧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는지, 고개를 돌리기만 했는데도 금방 시선이 맞닥뜨렸다.

“황자님.”

“왜?”

어쩜 저렇게 입도 예쁠까?

황자는 오물오물 말하는 모양도 참 귀엽고 예뻤다.

그 선연한 붉은빛 입술이며, 또렷하고 까만 눈동자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역시 사랑 놀음을 하는 소설의 남자 주인공이란 외모부터 남다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절로 후광이 비치는 듯한 그 귀여운 모습을 보며, 샬롯은 흐뭇하게 미소 짓느라 하마터면 질문을 까먹을 뻔했다.

“그런데 나는 왜 찾아온 거야? 나 찾으러 온 거 맞지? 보통 가문에서 안 나오잖아.”

요제프는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제 말했잖아. 오늘도 올 거라고.”

“……아니, 그거야 그렇지만.”

“내일도, 모레도 올 거야.”

샬롯은 눈을 깜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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