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파 공녀님 (28)화 (28/123)

#28.

“……으그므슨.”

러슬이 옆을 돌아보자, 테이블 반대쪽에 앉아 있던 샬롯이 어느새 옆자리로 다가와 입에 빵을 밀어 넣어 주고 있었다.

“……샬롯!”

“눈치 없이 왜 그래요, 오라버니는? 그리고 식탁은 왜 부숴요? 이런 테이블을 결 맞춰서 만드는 데 얼마나 많은 수고가 드는지 알아요?”

“……므르그?”

마치, 품이 많이 드는 목수 일을 직접 해 보기라도 했다는 듯한 말에 러슬이 황당해서 반문했다.

샬롯은 러슬의 발음이 명료해지기도 전에 얼른 흰 빵을 뜯어 입에 더 밀어 넣어 주었다.

“요제프 전하가 날 따라다니는 게 아니라, 내가 요제프한테 먼저 친하게 지내자고 한 거니까 그렇게 알아요. 도대체 왜 그래요, 갑자기. 관심이 너무 지나치네요.”

‘잘 지내면…… 혹시 알아? 나중에 요제프가 황제가 되었을 때 목숨이라도 한 명 더 부지할 수 있을지?’

샬롯은 눈치 없는 제 오라비를 향해서 하고 싶은 말을 속으로 중얼거렸다.

러슬은 생전 본 적 없는 샬롯의 눈치가 보여서 어쩔 수 없이 꽉 움켜쥐었던 주먹을 풀었다.

그 와중에 샬롯이 제게 가까이 다가와서 빵을 먹여 주는 게, 어딘가 묘하게 감동적이어서 그런 것도 있었다.

러슬은 요제프에게 더 이상 말을 거는 대신 등을 등받이에 붙였다.

‘요제프 황자와 이렇게 대면하고 밥을 먹는 상황 따윈 상상도 못 한 것이었지만, 샬롯이 지금 저렇게까지 홀려 있으니 내 잘못이라고 생각하고 받아들이는 수밖에.’

러슬은 부지런히 빵을 씹어 간신히 삼키고선 겨우 입을 열었다.

“샬롯.”

“네?”

“이 오라비가 잘못했다. 제발 그런 말투는 그만둬 다오.”

러슬은 이젠 요제프 황자의 앞이고 뭐고, 위신을 지키는 것도 포기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샬롯이 저리 냉랭하게 존대를 하는 게, 속이 너무 불편했다.

샬롯은 눈을 깜박이며 제 오라비를 바라보았다.

제법 아름다운 푸른 눈동자에는 기가 죽은 강아지 같은 기색이 숨어 있었다.

팔과 다리는 곰도 때려잡을 것처럼 생겨서는, 제 여동생이라고 저렇게 절절매는 모습이 어딘가 귀엽고 웃겼다.

그리고 제가 말린다고 요제프에게 그리 좋은 감정이 있어 보이지도 않는데 어떻게 동석을 한 것도 고마웠고.

‘뭐, 대충 받아 줄까.’

샬롯은 눈을 느리게 깜박이곤 픽 웃었다.

“생각 좀 해 볼게요.”

“뭐……?”

“생각 좀 해 보겠다고요. 일단, 밥 좀 먹죠?”

생각해 보겠다는 말을 다른 누가 했다면 러슬은 당장 의자를 집어 던지고 그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을 터였다.

그럴 만큼 그건 고압적인 말이었다.

그런데 제 여동생이 그렇게 말하니까, 왜 이렇게 기분이 살살 풀리는지 모를 일이었다.

‘생각해 보겠다는 건, 마음이 좀 풀렸다는 뜻인 것 같은데? 완전히 기분 상했으면 그런 말도 안 할 것 아냐?’

러슬은 샬롯이 시키는 대로 순순히 수저를 들었다.

샬롯은 그제야 속으로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모처럼의 즐거운 외식 시간을 쓸데없는 분쟁으로 망치기 싫은 게 본심이었다.

외식은 처음이었으니까.

뭐…… 솔직하게 말해서, 전생까지 통틀어도 처음 있는 외식이었다.

게다가 이 세계에는 그런 속담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지만, 밥상머리에서는 개도 안 건드린다고 했다.

그러니 이런 식으로 말도 안 되는 싸움을 듣고 싶지가 않았다.

합.

두 명 다 설전을 그만두고 입을 다문 것을 보며, 샬롯은 얼른 수프를 한 입 떠 입으로 가져갔다.

양파와 버터, 감자가 들어간 간단한 수프마저도, 매일 먹던 음식과 달리 아주 달고 맛있게 느껴졌다. 청어도 비리지 않고 담백하고 촉촉해서 입에서 살살 녹는 듯했고, 과일과 채소도 모두 신선해서 즐겁게 먹을 수 있었다.

싱글벙글 웃으며 먹던 그녀는, 문득 요제프가 아직 수저에 손조차 대지 않았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고개를 들었다.

“오라버니는? 요제프는? 안 먹어?”

살롯이 막 맞은편에 앉은 인형같이 아름다운 남자 주인공과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턱을 괴고 앉아 그녀를 바라보기만 하던 요제프가 문득 입을 열었다.

“나랑 같이 사는 건 어때?”

풉.

모처럼 수저를 들었던 러슬의 입에서 야채수프가 튀어나올 뻔한 걸 아는지 모르는지, 요제프는 아름다운 얼굴로 뻔뻔하게 말을 이었다.

“그대가 지내는 별관이 꽤 비좁아 보이던데, 내가 지내는 곳은 건물 하나를 통째로 쓰고 있으니 넓고, 공터며 훈련장도 있으니 안성맞춤이지.”

샬롯은 요제프의 의외의 제안에 눈을 깜박였다.

요제프가 그런 제안을 하리라곤 생각지도 못한 게 사실이었다.

지금까지 요제프는 물에 빠진 놈을 구해 주니 보따리를 내놓으라고 한다고, 기껏 있는 기, 없는 기 끌어모아서 그나마 그의 몸 상태를 조금 더 낫게 만들어 줬더니 오히려 그녀를 추궁해 대느라 바쁘기만 했으니까.

‘근데…… 나쁘지 않은데?’

오늘 자신이 황곰 기사단의 훈련장에 나간 게 제가 혼자 수련할 공간이 없기 때문이라는 걸 알아보고 제안을 해 주는 것도 고마웠고, 실제로 제 방이 비좁고 초라한 것도 사실이었으니까.

아무리 샬롯과 요제프가 둘 다 버림받다시피 한 신세라고는 하지만, 그나마 요제프는 손님이라는 미명하에 와 있는 거니 지내는 공간 하나는 봐 줄 만할 거다.

꼬맹이 두 명 정도는 너끈히 수용할 만한 곳이겠지.

게다가 요제프와 함께 지내면, 요제프의 몸을 돌봐 주기 편할 거라는 점이 무엇보다 끌렸다.

‘작중에서 요제프는 칼그림자의 날, 출전해서도 우승을 차지하지 못해. 그건 실력은 둘째 치고 몸 상태 때문인 것 같은데…… 그 점을 내가 어떻게 해 줄 수 있다면…….’

그리고 요제프는 적국 황녀가 탐낼 정도의, 대단한 검의 귀재였다.

뭐, 몸 상태가 좋을 때 한정이긴 했지만.

그 정도라면 제가 수련을 할 때 적당한 상대가 되어 줄 수도 있을 터였다.

슬슬 외공의 수련도 해야 할 터인데, 아무래도 대련을 해 줄 상대가 있는 편이 좋으니까.

황곰 기사단에 매번 나오는 것도 좋지만, 아무래도 나올 때마다 이렇게 소란이 이는 것도 귀찮기도 했고.

“너무 좋은……”

샬롯이 막 긍정의 대답을 입에 올리려는 순간이었다.

쾅!

식탁을 내려친 러슬의 주먹을, 샬롯이 빤히 바라보았다.

러슬은 뭔가 고함을 치려고 입을 벙긋 열었다가, 그 시선과 눈이 맞닥뜨리고선 제 왼손으로 얼굴을 마구 쓸어내렸다.

“아무것도 아니야. 아무것도 아닌데, 그냥, 뭐냐, 그……. 파리가, 있었다. 하하.”

“파리를 그렇게 요란스레 잡으세요?”

“허허. 그런데, 황자 전하께서는 왜 그런 생각을 갑자기 하셨을까, 허허.”

러슬은 대놓고 반대는 하지 못하고, 제 동생의 시선을 피해 요제프 황자를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하지만 요제프 황자는 그 시선을 피하지도 않고,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고요하게 그를 마주 보았다.

러슬은 요제프 황자에 대해서 세간의 사람들이 떠드는 만큼만 알았다.

란슬롯 같은 세티야 가 방계 아이들이 장난감을 삼아도 좋을 만큼, 2황자에게 철저히 짓밟혀지고 있는 황자.

어린 시절 검에 대한 재능은 있었지만, 그것을 받쳐 줄 만한 체력은 없는 황자.

제 어머니인 아렌느가 총애를 잃으면서 모든 것을 잃은 황자.

뭐, 대략 그 정도였다.

그 뒤로 마주칠 때마다 황자의 텅 빈 눈을 보고 있자면, 그 소문이 모두 맞다는 생각만 들었었다.

그냥 예쁘장하게 생긴 인형 같았다.

검술에 관심이 있다는 것만은 사실인 모양이었지만 재능이 있다느니 하는 말도, 그냥 으레 황족의 어린 시절은 좋게 포장되기 마련이니 그런 이야기겠거니 하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말았다.

그런데, 저 고요한 눈동자 속에 숨어 있는 호전적인 색깔은 무엇일까?

항상 죽어 있는 동태 눈 같던, 그 허무만이 그득 들어차 있던 그 눈은 어디로 간 걸까?

러슬은 저도 모르게 요제프를 오래 마주하고 있는 스스로를 깨닫고, 고개를 가볍게 털었다.

애초에 이 테이블에 같이 앉아 있다는 것 자체가 이상할 정도로 버리는 패 아닌가. 샬롯 때문에 이 자리에 황자가 함께 자리한 것 때문에 황자가 갑자기 주제넘게 구는 거다.

러슬은 이 기이한 상황을 탈출하자고만 생각하며, 일단 부드러운 어조로 을렀다.

“……황자 전하, 상황을 잘 생각하시고 말씀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저는 샬롯의 말이라면 찬성이니 굳이 여기서 반대하진 않겠습니다만, 전하께서 어떤 연유로 저희 가문에 와 계신지는 당사자인 전하께서 누구보다 잘 알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쓸데없이 샬롯에게 이상한 소리 하지 말고 조용히 지내라.’는 말을 러슬이 마치기가 무섭게, 요제프가 눈썹을 슬쩍 치켰다.

“글쎄.”

“……하?”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라. 글쎄, 나는 잘 모르겠는데.”

“황자 전하.”

“세티야 가의 군식구인 내가 이런 제안을 해도 괜찮을 정도로, 샬롯이 열악하게 지내는 게 애초에 문제 아닌가? 그 방은, 황성의 시녀…… 아니, 하녀의 방만도 못할 텐데.”

러슬은 말문이 턱 막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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