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파 공녀님 (27)화 (27/123)

#27.

샬롯과 요제프, 러슬은 나란히 걸어 마구간으로 향했다.

마차를 타고 다니지 않는 러슬이 제 말에 샬롯을 안아 올리려는데, 요제프가 너무 당연하게 자신의 말을 끌고 다가왔다. 시종이 다루지 못하는 말이라나 뭐라나.

러슬은 문득 요제프가 샬롯의 주변에 얼쩡거리는 게 아주 마음에 안 들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남매간에 오붓하게 식사하러 가려는데…… 황자님께서는 세티야 가로 돌아가셔서 수련에 정진하시면 좋겠습니다.”

러슬의 말에는 겉에만 예의가 발려 있었다.

으르렁거리는 말투에는, 권유의 뉘앙스가 강하다 못해 협박의 냄새가 났다.

세티야 가에서 요제프 황자의 교육을 빌미로 호되게 기를 꺾어 놓고 있는 상황이었고, 요제프 황자가 단 한 번도 기를 펴지 못하고 당하고만 있는 상황이니 어쩌면 당연했다.

하지만 평소 같으면 이런 곳에 나올 일도 없었을 요제프는, 오늘따라 이상한 행동을 보였다. 란슬롯이 때리면 때리는 대로 맞을 정도로 반항이라는 것을 모르고 순순하게 굴기만 하던 3황자였는데, 러슬의 눈을 똑바로 올려다보며 말대답을 한 거다.

“샬롯과 선약을 한 건 난데. 지금까지 샬롯에게 신경조차 쓴 적 없던 주제에 퍽 친한 척 구는군.”

러슬은 묘한 충격을 받았다.

마치, 인형이 말을 하는 걸 본 것 같은.

지금까지 그렇게 짓밟혔는데도, 황자의 심지가 조금도 꺾이지 않았으리라곤 생각조차 못 했다.

그도 그럴 게 황자가 직접 저렇게 나서서 이야기한 적은 없었으니까.

“지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내 말이 틀렸나?”

어디까지나 존대와 하대는 형식에 불과했다.

대부분 무인이 다 그렇지만, 러슬도 성미가 급한 편이었다.

3황자 요제프가 갑자기 제게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뻔뻔하게 구는데, 그걸 참아 넘길 성질은 못 되었다.

“아니, 황자님께서 오늘…… 어쩐 일로 외출까지 하셨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이리 바깥에서 위신이 상하시길 자처하시는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진심이 짙게 섞인 협박이었다.

이야기를 듣고만 있던 샬롯이 슬쩍 요제프를 가리듯이 앞으로 나선 건 그 순간이었다.

오늘따라 러슬이 제게 잘해 주려 하는 건 고마운 일이었지만, 하는 행동이나 말 어디에도 기꺼운 부분이 하나도 없었다. 요제프에게 함부로 대하는 것까지도.

‘아니, 요제프가 크면 황족만 죽이는 게 아니라 세티야 가도 멸족시켜 버리게 생겼는데. 원작에서도 아이작이 이미 다 죽여 버리다시피 해서 못 죽인 것 같았지만…….’

그녀는 얼른 둘의 사이에 끼어들며 까치발을 하곤 양팔을 쫙 폈다.

“러슬 오라버니, 요제프 전하한테 뭐라고 하지 마세요.”

“……뭐?”

“요제프 전하가 뭘 잘못했어요? 그냥 나 보러 온 거잖아요. 아까도 나 때문에 나서 준 거 못 봤어요?”

“아니. 그게 뭐 그리 대단한 일이라고.”

“대단한 일이죠! 아무튼, 요제프 전하한테 뭐라고 하지 마요. 얼마나 귀엽고 기특해요?”

샬롯이 마치 귀여운 동생 대하듯 요제프 황자를 대하자 러슬은 기가 막힐 뿐이었다.

‘나한테 화나서 일부러 내가 기분 상할 만한 행동을 하는 건가?’

이전까지 보아 온 샬롯은 실력도 없고 노력도 하지 않았지만 눈치 하나는 빨랐다.

3황자를 대하는 세티야 가문 사람들의 태도가 어떤지 잘 알았기 때문에, 샬롯은 요제프의 근처에도 가지 않으려 했다.

요제프 황자에 관해서는 차라리 그때가 나았다.

“아니, 샬롯. 나한테 기분이 상했으면 그냥 나한테 풀지, 요제프 황자님을 끌어들이지 마.”

샬롯은 전혀 알아듣지 못했다는 듯 고개를 모로 꺾었다.

그러곤 어깨를 으쓱하며 버젓이 앞에 서 있는 러슬의 말을 지나 요제프의 백마로 다가갔다.

“오라버니보다는 황자님이랑 내가 같이 타는 게 낫겠네요. 오라버니는 덩치가 크잖아요.”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는 거냐? 전투마로 훈련된 말에 성인 남자도 잘만 타는데, 내가 무슨 덩치가 크다는 거지?”

기가 막힌 러슬이 제 가슴을 치며 요제프 황자를 쏘아보곤 다시 샬롯에게 말을 붙이려는 순간이었다.

‘……샬롯이 말을 탈 줄 알던가?’

눈을 잠깐 떼었다가 다시 바라봤을 때, 샬롯의 그 작은 몸이 도대체 어떻게 한 건지 키가 큰 백마 위로 훌쩍 올라가 있었다.

말의 안장이라는 것은, 일반인들이 생각하는 것보다도 훨씬 높은 곳에 있다.

특히나 다 자란 군마들의 경우에는, 키가 큰 성인이 손을 위로 뻗어야 간신히 안장에 손이 닿을 정도이기까지 했다.

그리고 요제프 황자의 군마는 제법 품종이 좋아 거대한 축에 속했고.

그러니 보통은 말을 탈 줄 모르기도 했거니와, 저렇게 큰 말은 아이가 혼자 탈 수도 없었다. 시종이 고삐를 잡아 주고 발 받침을 해 주어야 간신히 타곤 했다.

‘게다가 분명히 시종조차 못 다루는 성질 사나운 말이라고 했었는데……?’

깜박, 깜박.

러슬이 눈을 깜박이는 사이에 샬롯이 뒤를 흘끗 바라봤다.

정확히 맞닥뜨린 시선에, 러슬은 저도 모르게 입을 꾹 다물었다.

샬롯이 어떤 의도로 저를 바라봤는지는 모르겠지만, 긴 속눈썹 그늘 아래로 냉정한 풀빛 눈동자를 바라보는 순간 아무런 할 말이 없어졌다.

마치…….

‘자신이 말을 탈 줄 아는 것조차 몰랐으면서, 왜 이제 와서 친한 척하려느냐는 것 같잖아.’

틀린 말은 아니었다.

실제로 제가 여동생을 멀리 두었던 것도 맞으니까.

여동생에게 너무 실망했던 것도 맞았고, 어느 순간부터는 기대하지 않게 된 것도 맞았다.

바뀌지 않을 줄 알았으니까.

“아무튼, 앞장서세요. 배고프니까.”

툭 떨어진 샬롯의 말에 러슬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고삐를 움켜쥐었다.

어느새 식사 자리에 동행하는 것이 확정된 듯한 요제프 황자가 제 여동생의 뒷자리를 차지하고 백마에 올라타 있는 꼴이 보였지만, 이제 와서 뭐라고 더 훈계할 수도 없었다.

러슬은 어쩔 도리 없이 튀어나오려는 한숨을 집어삼키며 등자에 발을 끼우고, 훌쩍 제 말에 올라탔다.

* * *

샬롯은 고기 스튜, 신선한 산양 치즈와 청어 요리, 꿀 절임 체리와 자두가 차려진 식탁 앞에서 신이 나서 다리를 흔들었다.

샬롯이 쓰러졌던 것을 걱정한 베티가 요 며칠 내내 묽디묽은 수프만 대령했기 때문에, 오랜만에 먹는 제대로 된 음식들이 반가웠다.

“와, 맛있겠다.”

하지만 김이 모락모락 나는 만찬을 앞에 두고도 신이 난 사람은 그녀 하나뿐이었다.

러슬과 요제프는 말 한마디 하지 않고 묵묵히 식탁을 지키고 있었다.

특히, 모처럼 제 여동생에게 말을 붙였다가 꽤 차갑게 거절당한 러슬은 안절부절못하고 그녀의 기색만 살피고 있었다.

샬롯은 테이블의 무거운 침묵을 모르지 않았지만, 눈앞에서 모락모락 김이 피어나는 음식을 안 먹는 이들의 심정을 헤아릴 마음은 없었다.

‘농부가 재배한 쌀 한 톨, 한 톨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고 했거늘, 도대체 밥상머리에서 왜들 저렇게 심각해?’

러슬은 테이블 맞은편에 앉은 샬롯이 조그마한 입으로 부지런히 오믈렛을 씹고 있는 것을 흘끗 바라보곤 그녀의 옆자리를 차지하고 앉은 요제프 황자를 바라보았다.

지금까진 제가 간섭할 일도 없었고, 가문에서도 요제프 황자를 잘 보이지 않는 사냥터 근처의 별관에 처박아 뒀으니 별로 마주칠 일도 없었다.

그래서 이렇게 직접 이야기를 나눌 일도 별로 없었는데.

끈이 떨어지다 못해 이미 위상이 추락할 대로 추락해서 써먹을 곳도 없는 3황자가, 감히 제 동생에게 관심이 있는 줄은 몰랐다.

게다가 제가 신경 쓰지 못하는 사이에 순진한 동생을 어떻게 꼬드겼기에 샬롯이 저렇게 연상의 요제프 황자를 상대로 귀엽다느니 하는 소리를 입에 달고 있단 말인지.

“……그래서. 황자님께선 여기에 어쩐 연유로 동행하신 건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결국 러슬이 먼저 입을 뗐다.

“밥 먹고 얘기하면 안 돼? 요제프 황자님이 뭘 잘못한 건 아니잖아.”

샬롯이 오믈렛을 꼴깍 삼키자마자 얼른 달래듯 말을 꺼냈지만, 러슬은 오히려 샬롯이 요제프를 감쌀수록 더 달갑지 않았다.

게다가 샬롯에게 이야기를 하며 좀 달래 보자니 아무래도 요제프 황자가 눈앞에 있으면 위신이 살지 않는다.

러슬은 식기에 손을 올리지도 않고 요제프를 향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제가 뭔가 오해를 하고 있는 것 같은데…… 황자 전하께선 샬롯에게 어떤 볼일이 있으신 건지요?”

요제프가 의자에 몸을 기대며, 러슬을 바라보았다.

“어떤 볼일이라……. 글쎄. 그대가 신경 쓸 일은 아닌 것 같은데.”

“황자 전하.”

“그래도 꼬박꼬박 내게 전하라 부르긴 하는 게 웃기군.”

“지금 뭐 하자는 겁니까?”

러슬이 기가 막혀서 눈을 가늘게 좁히는데, 요제프가 손을 뻗어 물잔을 들며 다시 한번 덧붙였다.

“샬롯에겐 지극히 관심이 있다. 아마, 앞으로도 그럴 테지. 그러니 내가 뭘 하든, 그대가 신경을 끄는 게 서로 좋을 것 같은데.”

러슬은 뒷골이 땅겨서 혀를 찼다.

샬롯의 얼굴을 봐서 다시 한번 식기를 집으려고 해 봤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요제프가 한 말이 머릿속에서 빙빙 돌아서 그럴 수가 없었다.

쾅.

더 이상 이 상황을 참을 수 없었던 러슬의 주먹이 식탁을 내려쳤다.

불쌍한 원목 식탁은, 그 가벼운 한 방에 한쪽 모서리가 완전히 파여 버렸다.

“……황자 전하, 제가 충언 한마디 드려도 괜찮겠습니까?”

“하지 말란다고 안 할 것 같진 않군.”

오늘따라, 황자는 겁을 집어먹지 않았다.

그게 러슬의 신경을 더 살살 긁었다.

샬롯을 그동안 제대로 돌보지 못했다는 죄책감 때문에라도, 요제프 황자와 샬롯을 어떻게든 이 자리에서 떼 놓고 싶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 찼다.

“샬롯은 이제 막 아홉 살이고 한창 검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아이입니다. 그러니 괜히 샬롯의 앞길을 막지 마…… 헙.”

‘네 곁에 있는 게 샬롯에겐 손해다. 샬롯을 위해서라도 꺼져라.’라는 말을 장황하게 돌려서 하던 러슬의 입에 갑자기 흰 빵이 들어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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