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샬롯은 갑자기 제 앞을 가리고 선 보라색 망토를 바라보았다. 거기에는 황실의 문양인 세 개의 검과 두 개의 방패가 그려져 있었다.
그게 아니더라도, 부드럽게 바람에 흩날리는 흑발만 봐도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요제프? 여긴 어떻게……?”
그녀의 목소리에 요제프가 흘끗 뒤를 돌아보았다.
마주친 눈은, 언제나처럼 탁하고 빛을 잃은 검정이 아니었다. 희미하나마 빛이 일렁이는 눈동자였다.
요제프가 다시 란슬롯에게로 고개를 돌리는 것을 본 샬롯은, 얼떨떨하게 웃었다.
‘내 몸 상태를 이미 다 알고 있는 모양이네.’
더 이상 상대하기 어려운 게 사실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누가 감싸 줄 줄은 몰랐는데.
그것도, 란슬롯에게 매일같이 괴롭힘을 당하고 있는 3황자가.
‘하지만 이건 내 대련인데. 괜히 요제프가 끼어들었다가 나중에 더 보복당하는 거 아냐? 지금도 몸이 성할 일이 없는데.’
“뭐야, 지금? 요제프 황자님께서 감히 어딜 나선 거야?”
“정원에만 맨날 널브러져 있더니. 이런 곳도 올 줄 알아?”
“킬킬, 요 며칠 교육을 덜 받으셨나 본데?”
요제프를 향한 비웃음 섞인 웅성거림이 들렸다.
샬롯이 막 요제프를 말리려 하는 순간이었다.
“아니, 란슬롯은 우리 가문 사람이니, 내가 상대하지.”
새로운 목소리가 머리 위에서 뚝 떨어졌다.
아직 몸이 여리여리하고 누가 봐도 소년 같은 요제프의 앞에, 소년이라는 호칭보다는 청년이라는 호칭이 더 잘 어울리는 남자아이가 가로막아 섰다.
란슬롯은 샬롯의 앞에 3황자가 나타났을 때도 어이없어했지만, 이번에야말로 당황해서 몸을 굳혔다.
“러슬 형님?”
“그래. 내가 상대해 주지.”
러슬은 아직 열다섯으로 꽤 어리지만, 실력을 인정받아 황곰 기사단의 부단장 중 하나의 자리를 꿰차고 있었다.
게다가 세티야 가문의 직계 후계자 중에서도 단연 이인자로 꼽히는 자였다. 아이작을 빼고서는 그를 직접 상대할 수 있는 이는 비야키 정도였는데, 둔중한 무기를 수월하게 다루는 러슬의 우위를 점치는 사람이 많았다.
‘……형님이 갑자기 왜? 샬롯을 감싸고도는 것처럼 보이는데…… 아니지?’
란슬롯이 목검을 똑바로 들지 못하고 어정쩡하게 눈치만 보는데, 러슬이 그를 다시 다그쳤다.
“분명히 내가 지켜본 바로는 샬롯이 이미 이겼는데, 내 눈이 잘못됐나?”
“형님의 눈이 잘못되다뇨. 아니, 그런 게 아닙니다.”
“대련 결과에 승복하지도 못하는 멍청한 녀석이 있다니. 심지어 그자가 우리 가문의 이름을 달고 있다니. 내가 그 비열한 정신머리를 고쳐 주겠다.”
란슬롯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자신을 지켜보고 있을 아이들을 생각하니, 뭐라고 한마디 변명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러슬의 앞에서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승부는 신성한 것.
제가 승복하지 못한 게 나빴다.
하지만 역시 머리로는 그렇게 생각해도, 가슴으로 인정이 안 됐다.
“……러, 러슬 형님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평소였다면 란슬롯의 말에 동조해 줬을 러슬이, 이번에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난 명예에 대해 말하고 있다. 네가 훈련생으로 남고자 한다면 황곰 기사단의 명예를 더럽히지 마라.”
“……알겠습니다.”
툭.
란슬롯의 손에서 목검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는 여전히 웅성거리고 있는 귀족 아이들 무리로 돌아가질 못하고, 훈련장 벤치 쪽으로 터덜터덜 걸어갔다. 아무래도 오늘의 단판 승부가 어지간히 치욕스러웠던 모양이었다.
샬롯은 란슬롯의 반응보다는 러슬의 반응에 놀라 그를 바라보았다.
지난번엔 대충 훑어만 봤던 러슬은, 다시 자세히 바라보니 호감형으로 잘생긴 소년이었다.
러슬은 샬롯보다는 제롬을 많이 닮아 있었다.
세티야 가 특유의 백금발을 짧게 자른 얼굴은 시원시원해 보였고, 상체와 허벅지가 꽤 두툼하고 다부졌다. 드러난 팔다리가 햇빛에 건강하게 타 있는 것도 인상적이었다.
허리에 찬 검 손잡이에 미끄러지지 않도록 덧대 놓은 가죽끈이 닳아 있는 것이나, 장갑을 끼지 않고 있는 맨손의 손아귀에 단단하게 굳은살이 박여 있는 것들도 눈에 들어왔다.
‘어지간히 열심히 수련을 하고 있는 사람이네.’
샬롯은 러슬의 다부진 근육을 보며 부러움의 한숨을 쉬면서도, 그와 언젠가 한번 싸워 보고 싶다는 생각에 손이 근질근질했다.
‘아마 러슬을 상대로는 지금은 질 거야. 저렇게 꾸준한 자들은 방심도 하지 않는 법이거든.’
그녀가 그렇게 멍하니 보고 있는 사이에, 러슬이 샬롯에게 다가와 무릎을 굽혀 눈을 맞췄다.
“샬롯.”
러슬은 열다섯.
전생의 도화의 마지막 나이와 같았다.
“……어?”
잠깐 망설인 끝에 반말로 대답하는데, 러슬은 그 대답이 마음에 드는지 눈을 접으며 웃어 보였다.
“지난번 가주님과의 식사 자리에서는 미안했다.”
“왜 갑자기 사과하는 거야?”
샬롯이 눈을 껌벅거리며 러슬을 빤히 들여다보는데, 러슬이 어색하게 웃으며 그녀를 휙 안아 올렸다.
샬롯은 아이작의 경우를 이미 겪어서 놀라진 않았다. 그냥 당황스러운 눈으로 러슬을 바라보았을 뿐이었다.
아무래도 러슬은 아이작만큼 뻔뻔하지는 못한 모양이었다.
샬롯이 하도 그를 빤히 바라보자 러슬은 그 어색함을 무마하려는 듯 흠흠, 헛기침을 하더니 다른 곳을 보다가 입을 뗐다.
“먹고 싶은 건 없니?”
“어? 먹고 싶은 거?”
“그래. 배도 출출하고, 오랜만에 바깥에서 식사하는 것도 괜찮겠다 싶구나. 할 이야기도 있고.”
샬롯에게 식사를 제안하는 러슬의 어딘가 어색한 목소리에, 이미 어수선할 대로 어수선해진 수련장에 웅성거림이 퍼져 나갔다.
“지금 들었어……?”
“러슬 형님이 샬롯한테 왜 저러는 거야?”
“모르겠어. 저번에 아이작 형님도 그러셨잖아. 뭔가 샬롯이 상속이라도 받기로 했나?”
“세티야 가는 가주가 될 직계 후보 한 명에게만 모든 걸 몰아주는 거 몰라? 그럴 리가 있겠냐?”
“게다가 요제프 황자님이 끼어든 거 봤어? 난 황자님이 어디에 나서는 걸 처음 봤어.”
하지만 러슬도 아이작만큼이나 신경 줄이 두꺼웠다. 세티야 가쯤 되면, 이미 어린 시절부터 타인의 기대와 소문 속에서 사는 것에 익숙해지기 마련이라 더욱 그럴 터였다.
러슬은 누가 떠들든 말든 신경도 쓰지 않고 샬롯에게 다시 한번 물었다.
“오랜만에 남매끼리 점심을 함께하고 싶은 것뿐이야. 그리고 이런 수련장에 나올 필요 없이, 수련할 공간이 필요하다면 이 오라비가 빌려줄게.”
오라비라니.
샬롯은 러슬이 그녀의 친오빠라는 건 알았지만, 아빠와 그녀의 관계만큼이나 오빠와의 관계도 그저 소원하겠구나, 하고 생각하고 말았었다.
그래서 러슬이 이런 식으로 나오는 게 어딘가 어색하고 낯설었다.
겨우 대련 한 번 해 보고 훈련장을 떠날 생각이 없었는데, 제 의지와는 달리 러슬에게 안긴 채로 훈련장을 나서게 된 샬롯은 볼을 긁으며 러슬에게 종알거렸다.
“오빠가 신경 써 주지 않아도 괜찮아.”
“음?”
“내가 오빠한테 뭘 해 줄 수 있는 것도 아닌데……. 굳이 신경 써 주지 않아도 된다고.”
어딘가 간지럽기도 하고, 사실 작중에서도 샬롯과 러슬은 마지막까지 친해진 적이 없으니까 조금 갑작스럽고 불편하기도 해서 한 말인데, 그게 러슬에겐 신경에 거슬렸던 모양이었다.
러슬이 살짝 흥분해서 받아쳤다.
“네가 나한테 뭘 해 준다고? 내가 뭘 뜯어먹자고 이런단 말이냐?”
“그런 말이 아니잖아.”
“샬롯, 네게 정치적으로든 뭐든, 내가 얻어 낼 건 있고?”
그건 맞는 말이었다.
샬롯의 다락방만 봐도 답이 나왔다.
러슬보다 재물을 더 가지고 있길 하나, 정치적인 지지 세력이 더 있길 하나. 무엇 하나 가진 게 없는 게 맞았다.
하지만 샬롯은 러슬이 그렇게 말하는 게 어딘가 불편했다.
‘지금까진 그렇게 모른 척해 놓고, 인제 와서 왜 잘해 주는데? 뭘 얻어 내자고 하는 게 아니면, 그럼 뭔데?’
이런 생각이 드는 건 도화로 사는 동안 사형에게 배신당한 이후로 남을 의심하는 습관이 들어서 그럴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유 없이 잘해 주는 건 믿기 어려운 게 당연했다. 샬롯이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왔는데.
누군가의 아낌이나 보살핌 같은 것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살아온 지가 너무 오랜데.
“왜? 내가 밥 한 끼 먹자는 게 그렇게 이상해? 네가 이상한 사고만 안 치면, 내가 널 얼마든 예뻐해 주지. 안 그래?”
샬롯이 불퉁하게 대답도 안 하고 안겨만 있자, 러슬이 달래듯 말을 덧붙였다.
그녀는 머리로는 이해했다.
‘내가 동생이라서 그렇구나.’
샬롯은 러슬의 품에 안긴 채로 눈을 꾹 감았다 떴다.
하지만 동생이면, 손위 형제가 그렇게 저 내킬 때 무시했다가 또 저 내킬 때 잘해 주는 걸 당연히 받아 줘야 하나?
이해해 보려고 해도, 가슴속이 불편하고 답답한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제가 진짜 러슬에게 억울함이 남아 있는 샬롯이 아닌데도, 속에 응어리가 남아 있었다.
그녀는 조막만 한 손으로 러슬의 제법 단단한 손을 밀어냈다.
러슬이 좀 당황한 눈치로 손을 풀고 샬롯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왜 그래?”
샬롯은 러슬을 한 번 휙 돌아보고 제 무릎을 툭툭 털곤 허리를 곧게 폈다.
“오라버니와 제가 언제부터 이런 사이였는지 모르겠네요. 식사는 좋아요. 앞장서시죠.”
전에 없던 칼 같은 존댓말이 선을 분명하게 그었다.
러슬은 입을 딱 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