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파 공녀님 (25)화 (25/123)

#25.

“그래도 되겠어?”

비야키의 행동에, 러슬이 슬쩍 제지하려 했지만 비야키는 강경했다.

“에이, 러슬. 굳이 말리지 말고 한번 그냥 내버려 둬 보자.”

“……글쎄.”

대답을 흐린 러슬이 인상을 찌푸리며 황곰 기사단 연병장을 바라보았다.

분홍색 머리의 여자아이는 찾아보기 어려웠다. 멀리에서 척 보기에도, 제 가문의 수치인 막냇동생이라는 것을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러슬은 반사적으로 말리려고 하다가, 목검을 야무지게 틀어쥔 샬롯을 보고 고개를 저었다.

재능이 없다고 해서, 제 동생을 언제까지 누가 돌봐 줄 수는 없었다.

‘여기까지 나온 것만 해도, 샬롯으로서는 뭔가 단단히 결심한 모양인데…….’

검사라면 무릇, 언제가 되었든 누군가와 검을 마주할 줄 알아야 한다. 그리고 그 첫 대련에서 조금쯤 넘어지거나 다치더라도, 그게 그렇게 대단한 일은 아니었다.

“그래, 뭐 그러든지.”

러슬이 제가 참견할 일이 아니라는 듯 한숨을 섞어 대답하자, 비야키는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비야키는 요즘 샬롯이 눈엣가시였다.

자신들의 말은 들은 척도 안 하는 아이작이 요즘 그렇게 감싸고도는 게 마음에 안 들었던 데다, 이제는 떡하니 연병장까지 나와 있는데 그 모습이 보기 좋을 리가 없었다.

게다가 일부러 제 가문에 유배된 3황자와 자꾸 붙어 다니는 꼴이 더 꼴사나웠다.

실력이 없으면 눈치라도 있어야지, 요즘의 샬롯은 이상하리만큼 기세등등했다. 그나마 남의 눈치를 보고 바짝 엎드려 지내던 그 최소한의 눈치조차 없어진 것처럼.

그런데 란슬롯 녀석이 대신 본때를 보여 준다면, 나쁠 것은 없었다.

“란슬롯 저 녀석이 방계 주제에 나대고 다니는 꼴도 그리 썩 보기 좋진 않았는데 쓸모가 다 있군.”

요즘 샬롯을 이상하게 감싸고도는 아이작이 옆에 없을 때, 세티야 가문의 수치인 주제에 기가 살아난 샬롯의 콧대를 한 번 꺾어 줄 때도 되었다.

“뭐, 구경이나 하지.”

러슬도 고개를 끄덕였다.

란슬롯의 성정을 너무 잘 알고, 샬롯과 란슬롯이 굳이 대련을 할 차례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는 교관만 둘 사이에서 안절부절못하고 서 있었다.

그 순간, 하인이 뿔피리를 불었다. 대련의 시작 신호였다.

샤를로테의 기백이 일변했다.

란슬롯의 반쯤 들리던 손이 허공에서 멎었다.

절대로 질 것을 예상하지 않는 눈빛. 순간 그런 것을, 틀림없이 본 것 같았다.

뿔피리 소리가 채 끝나기도 전에 그녀의 작은 몸이 튀어 나갔다.

샤를로테는 제 앞에 선 남자, 란슬롯을 꼼꼼히 살폈다. 장기전으로 간다면 절대로 승산이 없었다. 체력, 근력, 지구력, 민첩성, 심지어는 체구까지. 뭐 하나 눈앞에 선 남자보다 제가 유리한 게 없었다.

아직 그녀는 내공만 수련했을 뿐, 검 한 번을 제대로 쥐어 본 적이 없었다. 근육이나 손아귀 힘을 제대로 단련하지 못한 것은 치명적이었다. 그가 자신을 우습게 보는 시선만 아니었더라면 절대 이기지 못할 대련이었다.

몇 주, 몇 달 후면 또 모를까.

하지만 그가 자신을 우습게 보는 정도가, 이 대련의 승패를 좌우할 것이다.

그녀는 검에 익지 않은 부드러운 손바닥으로 잘 길든 검 손잡이를 꽉 밀어 잡았다.

복잡한 초식은 안 된다. 몸이 이겨 내질 못한다.

“매화노방(梅花路傍).”

대련에서는 초식의 이름을 외치는 것이 무림의 원칙이자 예의다. 그녀는 초식 이름을 읊으며 뛰쳐나갔다. 이십사수매화검법의 제1 초식. 그녀의 검이 초라하게 떨리며 뻗어 나갔다.

란슬롯은 저 계집아이가 뭘 중얼거리나 싶었다. 맥도 못 추는 목검은 쳐내기에 너무 쉬워 보였다. 그가 쉽사리 목검을 휘둘렀다.

화산파의 검법은 아름답고 허수가 많다. 샬롯의 검은 란슬롯의 검과 닿기 직전에 아슬아슬하게 경로를 틀었다.

“매화접무(梅花蝶舞).”

매화가 나비처럼 춤춘다는 뜻이다. 샬롯의 검이 다시 두 개의 허수를 섞으며 꺾어 들어갔다.

검기나 검강을 쓸 수 없어 비교적 단조롭기 짝이 없었지만, 방심해 있는 수련생의 목에 검을 들이미는 데에는 2까지의 고작 두 초식이면 충분했다.

란슬롯은 제 목에 검이 들어왔다는 걸 믿을 수가 없는지, 눈을 껌벅껌벅했다. 어느새 둘의 간격이 이리도 좁혀졌는지, 어느새 승부가 이렇게 판가름이 나 버렸는지 모를 노릇이었다.

“나의 승리다. 인정해?”

란슬롯도, 그 바로 옆에서 안절부절못하는 얼굴로 서 있던 교관도 말을 잃은 채였다. 이 대련의 시작부터 발을 동동 구르고 있던 베티도. 이 대련을 말리지도 않았던 비야키와 러슬도.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지금 란슬롯이…….”

“진 거야……?”

아이들 사이에서도 술렁임이 지나갔다.

샬롯은 란슬롯으로부터 대답이 돌아오질 않는 것이 재밌다는 듯 어딘가 비웃는 듯한 미소를 보냈다.

란슬롯의 녹색 눈동자가 날카롭게 빛났다. 그는 뒤늦게 신경질적으로 그녀를 노려보았다.

“무슨 짓을 한 거지?”

“무슨 짓이냐니.”

“사술을 쓴 게 틀림없다. 그게 아니라면 내가, 이런 허영심에 빠져서 매일 놀고만 다니는 철부지 아가씨에게 질 리가 없잖아! 난 인정 못 해. 다시 하지? 어? 다시 해 보라고?”

왈가왈부하는 말이 오가는 가운데, 그 자리에 서 있는 사람 중 가장 놀란 것은 러슬 세티야였다.

“지금 내가 뭘 본 거지, 비야키?”

하지만 비야키도 제대로 대답을 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이런 말 하고 싶진 않지만, 나도 같은 걸 본 것 같은데.”

한참 뒤에 다 기어들어 가는 대답을 듣고서야, 러슬은 제가 본 게 맞다는 걸 알았다.

“세상에.”

란슬롯이 지다니.

물론, 란슬롯이 방심한 것 때문인 것처럼 보였지만, 그래도 란슬롯은 방계라고 믿어지지 않을 정도의 재능의 소유자였다.

제가 도대체 방금 뭘 본 거였을까?

고작 두 번의 움직임.

그것을 가지고 이렇게까지 놀랄 일이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그 검술을 펼친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닌, 그 샤를로테 세티야다.

분명, 제 여동생은 겁쟁이였다.

재능이 발현하지 않는 것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선천적으로 무인이 될 그릇이 아니었다.

툭하면 울기 일쑤에, 매사에 집중하지 못했고, 모든 것을 회피하려고만 했다.

세티야 가의 이름에 어울리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세티야 가라는 이름이 부끄러울 정도였다.

그래도 제 여동생이니까. 어느 정도는 감싸 주려고 노력한 시절도 있었다.

검술이 아니면 안 된다는 세티야 가문의 분위기에 적응하지 못하나 해서, 재능이 없는 여동생을 가엾이 여겨 감싸 주려 했다.

하지만 검술이 아니어도 그 무엇에도 샤를로테는 노력하지 않았다.

그저 변명뿐이었다.

항상.

늘 얼렁뚱땅 거짓말에, 그저 허영뿐이었다.

노력한다는 것 자체를 싫어했다. 말 몇 마디로 제 허물을 감추려 들 뿐이었다.

샤를로테가 재능을 발현하지 못한 뒤로, 제 어머니가 얼마나 마음의 짐을 가졌었는지 샬롯은 모를 거다. 그런 줄도 모르고 철없는 샤를로테는 그저 놀러 다니기에 바빴고, 귀족 아이들과 어떻게든 어울려 보겠다고 쓸모도 없는 짓거리만 하고 다녔다.

그러다 보니 러슬도 더 이상 그녀를 감싸 주지 않게 되었다. 최소한의 노력조차 하지 않는 것을 보곤, 그만뒀었다.

그런데 지금 제가 보고 있는 여동생은 달랐다.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한순간에 뭔가를 얻고 싶어 하는 사람의 눈이 아니라, 제가 노력해서 얻어 낸 성취에 대해 자부심이 있는 사람의 눈이었다.

“야, 러슬. 어떻게 할 거야?”

비야키가 당황스러운 목소리로 물어 왔다.

“어? 뭘?”

“뭐긴 뭐야. 샬롯에게 본때를 보여 줘야 할 거 아냐? 내가 볼 때 본때를 본 건 저 멍청한 란슬롯인데?”

러슬은 습관적으로 허리에 찬 굵은 검집을 꽉 움켜쥐었다 놓았다.

언제 한번 본때를 보여 주고 싶다고 생각한 건 맞았다.

하지만 그건, 샬롯이 말도 안 되는 이상한 술수를 부려서 아이작과 자신들을 속였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지금 다시 돌이켜 생각해 보면 요즘의 샬롯은 가주님 앞에서도 묘하게 당당했다. 연회장에서도 남들에게 잘 보이려고 비굴하게 굴지도 않았다.

‘샬롯이 남몰래 노력해 오고 있었다면, 그리고 그걸 내가 몰랐을 뿐이라면? 그래서 란슬롯도 이길 실력이 된 거라면? 그렇다면…… 내가 샬롯을 싫어할 이유가 없잖아.’

러슬이 멍하니 검집을 다시 움켜쥐었다 놓았다.

“어이, 러슬?”

비야키가 그의 어깨를 툭 치는 순간, 러슬은 고개를 똑바로 들고 비야키를 바라보았다.

“난 여기까지. 여기까지만 할게.”

“……뭐?”

“네가 뭘 하든 간섭하진 않겠다만, 난 여기까지. 샬롯에게 내가 뭘 더 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아서.”

러슬이 그렇게 말하고 몸을 돌리자, 비야키가 황당한 눈으로 우람한 그의 뒷모습을 쫓았다.

비야키는 요 며칠, 온 세티야 가문 사람들이 샬롯에게 유하게 굴기 시작한 게 당최 이해가 안 되었다.

“야, 러슬. 너까지 이러기야? 다들 왜 이래?”

하지만 러슬뿐만 아니라 교관도 샬롯의 대련에 꽤 감명을 받은 얼굴로 멍하니 인사를 하고 떠나가 버렸다.

비야키는 제 말을 들어 줄 사람을 찾지 못해 혼자 인상을 쓰다가 도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건지를 몰라 고뇌에 빠졌다.

그러는 중에도, 란슬롯은 아직도 샬롯에게 소리를 질러 대고 있었다.

“도대체 무슨 사술을 쓴 거지? 아티팩트라도 썼나? 난 절대 인정 못 해. 어?”

탁.

샬롯은 란슬롯이 하는 말에 화가 난 게 틀림없었다.

원래라면 로테이션을 돌게 되어 있었지만 한 번 더 붙을 기세였다.

하나 뒤로 물러나던 샤를로테의 손에서 목검이 떨어져 바닥 위를 뒹굴었다. 그녀의 팔은 갑작스러운 긴장과 전에 없던 빠른 동작에 근육에 경련이 일어나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샤를로테는 쓰게 웃으며 제 팔을 문질렀다. 그러곤 다시 검을 집으려고 했지만, 손이 지나치게 달달 떨리고 있어서 주먹도 제대로 쥐어지지 않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녀는 목검을 바닥에 두고 물러나지는 않았다. 왼손으로 그것을 움켜쥐고 몸을 일으켰다.

“굳이 더 하겠다면…….”

“……어?”

무슨 말이 들린 듯하여 몸을 돌린 란슬롯의 앞으로, 다른 그림자가 끼어들었다.

“내가 상대해 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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