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파 공녀님 (22)화 (22/123)

#22.

샬롯은 요제프가 제 뒷말을 기다리듯 고요히 침묵하자, 나지막한 음성으로 천천히 말을 이었다.

“물론 내가 말했지. 황자님을 돌봐 주고 싶다고. 뜸이든 침이든 구해서, 내 몸도 좀 회복되면 황자님 몸도 돌봐 주고 싶다고 말했지. 황자님이 아프면, 내 마음이 아프니까.”

“하, 지금…….”

“맞아. 유세 떠는 거야.”

다른 이들이었다면, 샬롯이 이렇게 말하면 즉각 화를 냈을 터였다.

하지만 요제프는 샬롯이 하고자 하는 말을 잘 알아들었는지 더 대꾸하지 않고 입을 꾹 다물어 버렸다.

샬롯은 사나운 기세가 한풀 꺾인 요제프를 똑바로 바라보며 생긋 웃어 보였다.

“왜? 황자님은 그냥 나한테 맹목적으로 고마워해야 하는 입장 아냐? 내가 의심을 받는 게, 지금 상황에서 맞아?”

지금까지 그렇게 따져 물었던 요제프였다.

샬롯은 솔직히 제가 뭐라고 해도, 요제프가 계속해서 저를 추궁할 줄 알았다.

그런데 요제프의 기세는 순식간에 꺾일 대로 꺾였다.

그는 눈 마주치면 어떤 식으로든 큰일이 날 것 같던 그 사나운 눈빛도 거두었고, 소파에서 곧 튀어나올 듯 몸을 앞으로 기울이고 있던 것도 그만두고 천천히 몸을 뒤로 기댔다.

그러고는 제 발치를 쳐다보며 한참 동안 앉아 있다가, 아주 오랜 침묵 끝에야 겨우 입을 열어 중얼거렸다.

“……내가 말하는 방식이 나빴던 건, 미안하게 됐다.”

첫마디는 사과였다.

작중에서 자존심이 퍽 세다 못해 이국의 황녀 샬레스의 그렇게 지극정성인 사랑에도 설득되는 기색이 없던 요제프였기에, 사과를 들을 줄은 몰랐다.

샬롯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너무…… 너무 절박하게 궁금해서 그랬다. 이해가 안 되니까. 네가 내게 해 준 일이…… 고맙지만, 이해가 안 되니까.”

그 중얼거림들은, 분명히 샬롯을 향해 있는 것이었지만, 그냥 요제프의 혼잣말같이 들렸다.

샬롯은 요제프가 적반하장으로 더 화를 낼 줄 알고 마음의 준비를 단단하게 하고 있다가, 돌연히 그가 그렇게 사과를 해 오자 뭐라 할 말이 없어서 입을 다물었다.

몸을 웅크리고 제 발끝을 내려다보고 있는 열두 살짜리 소년은, 너무나 외롭고 어려 보였다.

‘……난 이해할 수 있어.’

샬롯은 정말이지, 요제프를 이해할 수 있었다.

자신은 더 많은 것들을 보여 줄 수 있는데, 그것들을 보여 줄 수 있는 길이 꽉 막혀 있는 상황을.

제 몸이 따라 주지 않아서, 제가 가진 기량을 다 펼쳐 보이지 못하는 상황을.

아마, 그 누구보다 잘 이해할 거다.

간절한 거다.

그냥, 숨만 쉬고 목숨만 연명하기에는 지금도 아무런 지장이 없지만, 그렇게 살고 싶지 않으니까. 더 높은 곳을 향하고 싶으니까.

그러니까, 간절한 거다.

샬롯은 괜히 무거워진 분위기를 환기하기 위해 애써 밝게 말을 걸었다.

“됐어. 장차 큰일 할 사람인데, 이렇게 함부로 사과하고 그러면 어떻게 해?”

“……나 때문에 쓰러져서 오래 앓은 사람에게, 내가 말을 함부로 한 건 맞다. 잘못했다.”

“요제프 황자님.”

“그리고 필요할 때 사과하지 않는 건, 그가 황족이든 귀족이든, 잘못된 거라고 생각한다.”

성질도 더럽고 지기 싫어서 몸이 저 꼴이 되었을 정도로 고집이 세면서, 쓸데없이 올곧단 말이지.

‘그래야 내가 아는 요제프지.’

샬롯은 저도 모르게, 저보다 세 살 많은 황자님을 향해 엄마 미소를 지어 보였다.

“됐어. 이 누나만 믿어.”

“……이 틈을 타서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군.”

샬롯은 피식피식 웃다가 손뼉을 짝, 쳤다.

그렇지 않아도 아까부터 마음에 걸리던 게 하나 있었다.

“아, 그럼 나한테 고마우면 대가로 뭐 하나 해 달라고 해도 돼?”

“……대가?”

“그럼. 나한테 고맙다며.”

“고맙지.”

“그리고 앞으로 더 고마워질 예정이잖아? 뭐, 백 퍼센트 보장은 못 하지만.”

“……그것참, 신뢰가 가는군. 좋아, 말해도 된다. 뭐지?”

생각보다 요제프는 수월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돈인가? 아니면, 보석?”

추궁하듯 캐묻는 말에 샬롯의 연두색 눈동자가 휘둥그레졌다.

‘돈? 보석?’

열두 살 꼬맹이의 입에서 튀어나오리라곤 생각지도 못한 단어였다.

“재물? 돈? 하하, 이 누님이 꼬맹이 주머니까지 털 사람으로 보여?”

샬롯이 말도 안 된다는 듯 손을 내젓자 요제프가 묘한 눈으로 그녀를 쳐다봤다.

샬롯이 툭하면 방에 갇히다시피 지내고, 용돈도 끊기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샬롯은 귀족이라면 다들 부리는 정도의 사치를 부리기도 어려워서, 종종 다른 귀족 아이들이 보석을 주겠다고 유혹해서 무모한 장난을 시키곤 했을 정도였다.

그런데 샬롯은 요제프보다 세 살이나 어린 주제에 마치 정말로 무슨 큰누나라도 된다는 것처럼, 손사래까지 치면서 그의 호의를 거절해 댔다.

“……누님이라는 단어를 잘못 배운 모양인데.”

“하하, 무슨 소리야. 그보다 내가 원하는 건 따로 있다니까?”

“……뭔데.”

“반말하는 거.”

요제프가 기가 막힌단 눈으로 그녀를 쳐다봤다. 뭔가 발끈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지금도 하고 있잖아, 반말.”

“이건 나 혼자만의 내적인 친밀감 때문에 얼결에 시작했더니, 나도 모르게 자꾸 황자님이 귀여워서 반말이 나온 거고. 정식으로 허락받고 하면 죄책감도 없지 않을까?”

“……귀엽…….”

평생에 처음 듣는 단어라도 된다는 듯 요제프가 오만상을 찌푸리더니, 다시 열이 오른 듯 와다다다 말을 뱉었다.

“내가 3황자라서, 해 줄 수 있는 게 없다고 생각하는 건가?”

“응? 아니, 그런 게 아닌데?”

“네가 아직 어려서 잘 모르나 본데, 대가에 대해 서로 합의할 때는 잘 생각해서 조율해야 한단 말이다.”

“……풋.”

진지하게 철부지 어린아이를 향해 조언하듯 말하는 모습은, 정말로 귀여웠다.

샬롯은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눈가에 눈물마저 맺힐 듯 시원하게 웃는 샬롯을 요제프는 한참을 지켜보았다. 샬롯은 한참 동안 웃고서야 겨우 진정했다.

“아, 못살아. 정말, 보기보다 귀여운 구석이 있다, 황자님.”

요제프는 거기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제가 원하는 어떤 것의 대답도 듣지 못한 뒤로, 아무래도 맥이 탁 풀린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게 기분이 나빠 보이지도 않았다.

오히려, 흥미가 생긴 듯 보였다.

“……정말 다른 사람 같군, 지금까지 내가 알던 샤를로테와는.”

“그래 보여?”

“그래.”

“뭐…… 그럴 수 있지.”

요제프는 샬롯이 생긋 웃는 것을 빤히 쳐다보다가 중얼거렸다.

“이번에는 그냥 넘어가지.”

“응? 뭘?”

샬롯이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고,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궁금한 게 많지만, 네 말대로 이번에는 넘어가겠다는 뜻이다.”

그 말은, 차차 모든 것을 알아내겠다는 것처럼 들리기도 했다.

하지만 샬롯은 묘하게 섬뜩한 그 선언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그 이후, 어쨌든 요제프는 이국의 황녀이자 소설의 여주인공인 샬레스와 가정을 이루게 되니까.

그의 결혼 생활이 결코 행복해 보이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다른 여자와 결혼할 예정까지 있는데. 이런저런 본인 가정사를 극복하는 것으로도 바빠 보였고.

잠시 자신에게 관심을 가진다고 해도, 그의 몸이 낫고 나면 그것도 끝일 테니까.

“그럼 그걸로 된 거지?”

“아니. 요구 사항은 제대로 말해라.”

“난 그거면 충분해. 정말로. 내가 무심코 반말했다가, 주위에서 이상하게 보면 황자님이 허락해 주셨다고 하면 되니까. 난 좋단 말이야.”

요제프는 눈살을 팍 찌푸렸다.

“내가 싫어.”

“어?”

“내가 싫다고. 의원들이 황족을 진료하는 대가로 받고 있는 재물이 얼만데, 그치들이 제대로 알아내지도 못한 걸……. 아무튼, 그딴 거 말고 제대로 원하는 걸 말해. 괜히 사람 빚지게 만들지 말고.”

이건, 자존심일까.

샬롯은 팔짱을 끼고 저를 노려보는 요제프를 가만히 들여다보다가 깊게 웃었다.

황자의 몸이 잠깐 좋아졌다 뿐이지, 아직 제대로 치료를 해 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황자에게 반말을 하겠다는 것도 꽤 대단한 요구이기도 하고.

하지만, 요제프는 익숙하지가 않은 거다.

누군가에게 뭔가를 받는다는 것에.

어쩌다 저렇게 되어 버린 걸까.

받고만 자라도 부족하다고 여기는 게 당연해야 하는 황자님인데.

‘정당한 대가를 치르고 싶어 하는 건 좋지만, 저렇게까지 나오면 마음이 아프다니까.’

샬롯은 속으로 고개를 저으며 일부러 무리한 제안을 떠올렸다. 요제프가 절대 들어주고 싶어 하지 않을 만한.

어쩌다 보니 빈약한 상상력 때문에 제롬이 그녀를 협박할 때 썼던 말이 떠올랐다.

“아, 그럼 우리 약혼할래?”

필요한 게 없다고 한사코 사양하던 샬롯이 문득 던진 말에 요제프의 얼굴이 기묘해졌다.

“……지금 뭐라고 한 거지?”

샬롯은 거보란 듯이 웃었다.

“거봐, 뭐든 들어주겠다는 말을 함부로 하면 안 된다니까? 아무튼, 난 반말이면 됐으니까.”

요제프는 그녀의 옅은 녹색 눈동자를 한참 동안 빤히 들여다보더니 이제 더 이상 말을 이을 의지조차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래.”

그러곤 어딘가 한숨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가나 보네.’

뭔가 요제프의 지친 표정을 보니 샬롯은 저 혼자만 즐거웠던 대화였던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샬롯은 요제프가 자연스럽게 움직이고, 낯에 고통의 기색이 없어 보이는 것으로 만족했다.

그녀는 방긋 웃으며 손을 흔들어 주었다.

“잘 가. 다음에 한번 연락해!”

요제프는 샬롯을 흘끗 돌아보곤 그 지친 얼굴로 덤덤하게 말했다.

“내일 또 들르지.”

‘……내일?’

내일?

왜?

샬롯은 그녀의 대답도 듣지 않고 멀어지는 까만 머리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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