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파 공녀님 (19)화 (19/123)

#19.

아까 둘을 두고 나온 곳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3황자 요제프가 축 늘어져서 의식이 없는 샬롯을 안고 나타났을 때부터 이 소란이 일었다.

평소의 짜증 나는 그 무표정과는 조금 다른, 안절부절못하는 기색마저 띠고서.

제일 어이없는 건 리카르도와 만나서 막 이야기를 시작하려던 제롬과 아이작이 그 소식을 듣자마자 제게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하고 샬롯을 향해 달려가 버렸다는 거였다.

그나마 예의를 차리려는 건지 뭔지, 비야키 세티야와 러슬 세티야를 두고 갔지만 그 둘이 실세와는 거리가 멀다는 것쯤 충분히 알고 있었다.

‘도대체 뭐냐고.’

마치 촌극이라도 보는 것 같았다.

“어떻게 된 거예요?”

“요제프 황자님께서 샬롯을 안고 나타나셨다니까요? 못 보셨어요?”

“아니…… 요제프 황자님께서는 샬롯이 죽겠다고 해도 거들떠도 안 보실 분 아니에요?”

“그러니까 말이에요.”

“그래서 쭉정이 샬롯이 쓰러졌다고 해서 저 대단한 면면들이 저렇게까지 난리가 났단 말이에요?”

리카르도는 주변에서 수런거리는 귀족들의 목소리에 고개를 끄덕였다.

‘내 말이 그 말이다.’

거기다 세티야 가 방계 출신의 란슬롯이란 꼬맹이까지 달려들어서, 황궁에 참여한 인물 중에 꽤 주요한 인물들이 한자리에 모여서는 그동안 그 어느 누구도 신경 써 본 적 없는 조그마한 계집애 한 명에게 매달린 꼴이라니.

계집애들은 원래 잘 아프다.

‘게다가 황실이라는 대단한 곳에 와서 긴장하다 보면 한둘 쓰러질 수도 있지, 게다가 지체 높으신 나를 만나서 얼마나 긴장했겠어.’

고작 그런 일로.

아이작이 샬롯을 덥석 안아 들고 연회 홀을 빠져나가는 뒤로, 제롬과 란슬롯, 게다가 제 동생 요제프까지 줄줄이 따라가는 어이없는 꼴을 바라보고 있는데, 다시 한번 귀족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런데 이번 기회에 샬롯 님 완전 재평가받는 거네요.”

“어머, 부인. 벌써 샬롯 님이라고 부르시는 거예요?”

“하지만 제가 볼 때 가문 내 입지가 완전히 달라지신 것 같아서요.”

“그러게나 말이에요. 아이작 님께서 그런 공식 사과를 하시질 않나…… 제 생각엔 후계자 구도에 뭔가 변동이 있었던 것 아닐까요?”

“세상에, 설마요.”

“아무튼, 지금껏 쳐다도 안 보던 제롬 님까지 저렇게 안달하는 걸 좀 봐요. 틀림없이 뭐가 있다니까요. 뭔가가.”

술렁이는 목소리들을 멍하니 듣고 있던 리카르도는 제 의자의 손잡이를 콱 움켜쥐었다.

도대체가, 이야기만 들어서는 제가 아니라 샬롯이 이 거대한 황실 연회의 주인공 같았다.

그냥 지나가 버리고 말면 되는 이야기일 뿐이지만, 여기서도 샬롯, 저기서도 샬롯거리고만 있으니 대번에 짜증이 치솟았다.

‘무슨 방법이 없을까? 이 기분을 풀 만한.’

리카르도의 눈에 막 연회 홀의 안쪽에서는 더 이상 안 보이는 곳으로 사라지고 있는 붉은색 드레스의 자락이 다시 들어왔다.

그리고 답지 않게 그 뒤를 따르고 있는 요제프의 모습도.

‘뭐야, 오늘 지켜 줬다고 갑자기 샤를로테에게 반하기라도 한 건가?’

그는 심드렁하게 오늘 봤던 샤를로테의 모습을 떠올렸다.

붉은 머리에, 붉은 드레스가 꽤 깜찍하게 잘 어울리는 여자아이였다.

그동안 샬롯의 모습을 몇 번은 더 보았지만, 그동안에는 그저 귀찮기만 하다고 생각했는데.

요제프가 흥미를 보이는 대상이라고 하니 문득 짜증 대신 흥미가 동했다. 그것도 저렇게 안절부절못하는 걸 보니, 더욱.

‘샬롯을 빼앗아 오는 건 어떨까?’

표정 한번 변하는 법이 없는, 그 검바보 동생 요제프가 저리 졸졸 따라가는 걸 보라지.

아무리 샬롯이 세티야 가에서 내놓은 자식이라곤 하지만, 세티야 공작가와 요제프는 물과 기름처럼 섞일 일이 없는 사이였다.

그런데도 저리 애틋하게 여기는 멍청한 얼굴을 보니 썩 재밌었다.

만약 다른 모든 것들과 함께 샬롯마저 뺏기면, 어떤 표정을 할지. 그것도 재밌을 것 같았다.

리카르도는 제 생각에 크게 만족하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 * *

베티는 깜짝 놀라 마차를 맞았다.

본래 황실 연회라는 것은 점심쯤에 시작되어, 깊은 밤이 되어야 비로소 무르익게 마련이었다.

어린 샬롯이 함께 갔기 때문에 한 대쯤은 일찍 귀가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두 대의 마차가 이렇게 이른 시간에 돌아올 줄은 몰랐다.

베티를 비롯한 식솔들은 서둘러 작은 가주님과 도련님, 아가씨를 맞이하기 위해 입구에 정렬했다.

그 앞으로 사두마차 두 대가 급한 기색으로 멈춰 섰다.

“다녀오셨습니까?”

깍듯하게 인사하는 식솔들의 앞으로, 마차 문이 열리고 제롬이 서둘러 내렸다.

“그래. 샬롯이 몸이 아프니, 침대에 눕힐 준비를 하고 벤을 불러 진찰을 보도록 해. 황성에서 진찰을 본 바로는 그냥 피곤한 거라고 하던데…….”

제롬은 마차에서 몸을 다 빼내기도 전에 급하게 말을 쏟아내었다.

베티가 다급하게 다가와 샬롯 아가씨를 살피려는데, 제롬이 다시 한번 말을 덧붙였다.

“아, 그리고 샬롯에게 손님이 있다.”

“손님이라면……?”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굳이 들을 필요도 없었다.

제롬에 이어 마차에서 내린 이는 흑발에, 값진 옷을 입은 소년이었다. 한눈에 보기에도 고귀한 혈통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수려하디수려한 인형 같은 얼굴에는 불만과 비슷한 감정이 언뜻 엿보였다.

‘……연회가 진행 중이실 텐데, 3황자님께서 여기까지는 어떤 행차시지?’

베티는 놀람을 감추려 애쓰며 뒤로 물러났다.

연회에서 도중에 나왔다고 생각해봐도, 역시 이상했다. 따로 머무는 공간이 있는 3황자 요제프는 제가 머무는 뚝 떨어진 별관에서 나오는 법이 없었다.

그리고 작은 주인님께서 제게 말한 건, 실수일지도 몰랐다.

요제프 황자님께서 무슨 볼일로 오셨는지는 몰라도, 샬롯 아가씨와는 관련 없는 일일 테니까.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황자님은 내가 담당할 일이 아니니까 괜찮겠지. 아가씨나 얼른 모시자. 어디가 아프시다는 거지?’

베티가 샬롯 아가씨를 찾아 기웃거리는데, 다른 한 대의 마차에서 샬롯을 품에 안은 아이작이 내렸다.

‘……아이작 님께서?’

사실 아이작이 샬롯을 안고 있는 풍경만큼 기이한 것이 없었지만, 아이작 님께선 지난 일주일 동안 평소와 다른 모습을 조금씩 보여 주셨기 때문에 베티는 애써 놀라지 않을 수 있었다.

샬롯은 제롬의 말대로 그저 깊게 잠든 것처럼 보였다.

“제가 모시고 올라가도록 하겠습니다.”

“아니, 내가 직접 안고 간다.”

베티는 얼떨떨한 표정을 티 내지 않으려 애쓰며 고개를 끄덕이고 아이작의 뒤를 따랐다.

막 그 자리를 뜨려는 순간, 집사와 제롬의 대화가 귓전으로 들려왔다.

“3황자님께선 어쩐 일로 본관에…… 말씀을 나누러 오신 거라면 접대 준비를 따로 할까요?”

제롬은 아이작이 안고 올라가는 조그마한 제 딸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무슨 말을 하냐는 듯, 고개를 저었다.

“아니, 샬롯을 보러 오신 거다.”

“……네?”

거의 처음일 거다. 세티야 가의 집사가 평정을 잃고 작은 주인님의 말에 이렇게 말대꾸를 한 건.

그 말에 편안하게 잠든 것처럼 보이는 아가씨의 안색을 살피며 아이작의 뒤를 따르던 베티조차 순간 걸음을 멈췄다.

‘3황자님께서 샬롯 아가씨를……?’

베티가 말도 안 되는 기묘한 조합에 저도 모르게 뒤를 돌아보는데, 소란의 주인공인 3황자 요제프는 그 상황이 신경도 쓰이지 않는다는 듯 유유히 둘을 지나 다락으로 올라갔다.

* * *

샬롯의 방에 옹기종기 모인 제롬, 아이작, 요제프 3황자, 그리고 베티의 사이로 샬롯의 담당의 벤이 그녀를 오래도록 진찰했다.

샬롯은 갑자기 쓰러져서 실려 온 것치고는 큰 문제가 없어 보였다.

맥박과 입술 색이나 동공의 움직임 등을 한참 관찰한 벤은 신통찮은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그러니까, 과로로 쓰러지신 것 같습니다만.”

“과로라니……? 샬롯이?”

“과로……? 하…… 역시 뭔가 있어.”

제롬과 아이작의 반문이 동시에 튀어나왔다.

제롬은 아이작을 흘끗 바라봤다가, 침상에 누운 샬롯을 바라보았다.

샬롯은 오늘따라 자그마해 보였다.

베티가 급히 갈아입혀 준 흰 레이스 잠옷을 입고 누워 있는 모습은, 묘하게 낯설어 보였다.

워낙 말썽을 종류별로 치고 다니는 샬롯이라 일부러 더 관심을 주지 않으려 했는데…….

‘……요즘 들어 명상을 하질 않나, 이상하게 성숙하게 굴기까지 했고.’

제롬은 저도 모르게 손을 들어 샬롯의 손을 한번 쥐어 보았다.

정말 과로라는 말이 맞는지, 샬롯의 손은 기운 하나 없이 차가웠다.

‘그저 놀고먹는 게 일인 데다, 심지어 최근까지 방에서 나오지도 않고 줄곧 처박혀 있기만 했던 샬롯이 과로라니…… 칼그림자의 날 때문에 혼자 마음 앓이를 했던 걸까?’

하긴, 그것도 그럴 만했다.

겉으로 내색하지 않고, 며칠 동안 내내 밝게 지내서 그렇지…… 샬롯도 혼자 생각이 많았을 거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과로라니, 뭘 하기라도 했던 걸까?’

아이작이 뭔가를 아는 눈치로 말한 게 마음에 걸려서 다시 한번 바라봤지만, 아이작은 뭐가 그렇게 재밌는지 히죽히죽 웃으며 오히려 제롬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뭐지?’

그건 뭔가 꿍꿍이를 꾸미고 있다는 걸 다 안다는 듯한 시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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