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파 공녀님 (17)화 (17/123)

#17.

어떻게 지난번에 만났을 때는 몰랐을까?

아무리 제가 내공이라곤 없고, 운기조식도 한번 해 본 적 없는 샬롯의 몸에 막 들어온 처지였다고 해도.

이렇게까지 엉망인 기의 흐름인데.

몸이 안 좋은 정도가 아닐 거다.

매일매일, 망가지는 자신을 겨우 붙들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녀의 생각과는 달리, 황후는 더 지독하게 요제프를 몰아붙였다.

“몸이 안 좋긴. 네가 매일 지껄이는 그 꾀병 때문에 황제 폐하께서 얼마나 걱정하시는 줄 알아? 널 진찰한 모든 의사를 붙들고 몇 번이고 물어보신다.”

“하지만 전 거짓말을 한 적이 없습니다.”

기운 없는 목소리가 침착하게 대답했다.

“아니. 넌 그저 입만 열면 거짓말이잖아. 네 아바마마는 속여도 나는 못 속이지.”

“……그래서 하고 싶은 얘기가 뭡니까.”

“이번 칼그림자 날의 대회에서는, 네 그 아프다는 병을 입증해 보였으면 좋겠다.”

잠깐 동안 대답이 없었다.

요제프가 말을 고르는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바닥을 쏘아보았다가 천천히 고개를 들고 가만히 서 있는 덩치 큰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러곤 입을 열었다.

“지금 리카르도 형님을 일부러 봐드리라는 겁니까? 그 하찮은 실력을?”

덩치 큰 사내가, 2황자인 리카르도 형님이었던 모양이었다.

그자가 요제프의 얼굴만 한 손을 높이 들었다.

“……이게 어디서 건방지게!”

퍽.

척 듣기에도, 진심을 담아 사람을 후려치는 소리가 들렸고, 제 몸을 가누기조차 힘들어 보이던 요제프의 몸뚱이가 반쯤 허공을 날아 풀더미에 처박혔다.

샬롯은 너무 놀라서, 제가 숨어 있었다는 생각 같은 건 할 겨를도 없이 자리를 박차고 튀어 나갔다.

샬롯이 수풀을 벗어나는 순간, 2황자 리카르도가 쓰러진 요제프를 향해 발길질을 하려는 것이 보였다.

‘직접 닿기엔 너무 멀어!’

샬롯은 높이 솟아 있는 놈의 왼발 대신 바닥을 지탱하고 있는 쪽 발을 향해 살짝 기를 쏘아 보냈다.

탄지공이라고 하는, 무림인이라면 어렵지 않게 쓰는 보편적인 기술이었다. 무기가 없어도 손끝에서 작은 기의 덩어리를 쏘아 보낼 수 있다.

“……악!”

탄지공은 2황자의 오른발에 정확히 적중했다.

누군가 발이라도 건 것처럼, 리카르도가 중심을 잃고 비틀거렸다.

샬롯은 그사이에 재빨리 요제프의 앞으로 달려가 두 팔을 넓게 펼치고 그를 비호하는 쪽에 섰다.

“누구냐!”

“무슨 일이냐!”

스릉-.

갑작스러운 샬롯의 등장에 여기저기서 호위 기사들이 검집에서 칼을 뽑아 샬롯을 향해 겨눠 들었다.

귀에 너무나 익은 그 무거운 쇳소리마저 반갑게 느껴지는 것에 샬롯은 저도 모르게 웃었다.

귀족가의 아이라는 것을 확인한 호위 기사들은 섣부르게 샬롯을 제압하는 대신 황후 폐하에게 눈짓을 보내며 어떻게 할지 분부를 기다리고 있었다.

샬롯은 그 짧은 대치 상황을 이용해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보았다.

거기에는 풀 바닥에 웅크리고 있는 흑발의 소년이 있었다.

바로 그녀가 찾던 이 소설의 주인공이.

요제프는 도대체 얼마나 세게 얻어맞은 건지, 바로 일어나지도 못하고 끙끙거리고 있었다.

‘……애를. 저렇게 어리고 여린 애를 때리다니. 아무리 이복 형제라지만, 남보다도 못하잖아. 미치광이.’

샬롯은 저도 모르게 이를 악다물었다.

무림인이라서, 불의를 참을 수 없었기 때문이 아니다.

도화가 죽기 전 일 년이라는 시간 동안, 그녀의 지루하디지루한 침상을 채워 준 소설 속에서, 3황자 요제프는 항상 반짝반짝 빛이 났었다.

제 형님과 새로운 세티야 가주가 말아먹다시피 한 체이커 국을 혼자서 정상화시키려 애를 쓰고, 동동거리고, 인재를 끌어모으고.

소설에서는 나라가 정상화된 것이 너무 늦어서, 국력이 소모된 것을 극복하지 못하고 주변 국에게 집어삼켜지면서 공주님의 포로가 되어 버리지만…….

그래도, 전장에서 쓰러지면서까지 끝내 애를 쓰던 그 모습은, 침상에 누워 있던 그녀에게 정말 큰 위로가 되었었다.

그래서 그럴 거다.

아무것도 모르는 놈들이 요제프를 때리는 게 이렇게 속에서 천불이 나는 걸 보면.

심지어는 그 나라를 말아먹은 장본인인, 2황자가.

“저 여식은…….”

“세티야 가의 막내입니다.”

“아, 그…… 세티야 가문의 사고뭉치 말인가. 무서운 게 없는 아이인 모양이군. 끼어들 곳, 끼어들면 안 되는 곳도 구분하지 못하는 걸 보니.”

황후 가 샬롯을 알아봤는지, 한심하다는 눈으로 샬롯을 바라보며 가볍게 손을 들었다.

호위 기사들이 일제히 검을 거두는 것을 보며, 리카르도가 눈살을 찌푸리며 제 발을 털었다.

갑자기 발에 돌이라도 맞은 듯 저릿했는데, 착각일까?

황후는 갑자기 제 발을 주물럭거려 보는 리카르도를 흘끗 돌아보고 샬롯을 노려보았다.

“네가 아무리 어리고, 세티야 공작가가 나라를 위해 많은 헌신을 하고 있다고는 하나, 이런 식으로 천방지축 함부로 굴면 큰코다치는 날이 올 게다.”

리카르도가 인상을 찌푸렸다.

“어마마마, 샤를로테 저 계집애가 저렇게 버릇없이 구는데…….”

보랏빛 머리카락이 인상적인 황후가 손을 들어 리카르도의 말을 끊었다.

샬롯이 아주 당돌하게 요제프의 앞을 지키고 있는 꼴이, 아주 우스웠다.

‘세티야 가문이 우리 편인 줄도 모를 정도로 멍청한 바보 같은 계집을 상대해 봤자지. 저렇게 눈치 없이 굴 정도로 아는 게 없는 걸 보니, 가문에서도 곧 내칠 생각인가 보군.’

황후는 속으로 혀를 차며 몸을 돌렸다.

“됐다. 저 계집이 누구에게 가서 뭘 떠들겠느냐. 가자, 황제 폐하께서 기다리시겠구나. 네가 오늘 연회의 주인공인데 보이질 않으니.”

“……하지만!”

“리카르도.”

리카르도는 아무래도 요제프를 더 괴롭혀 놓지 못해서 안달이 난 눈치였지만, 나직하고 강렬한 황후의 말에는 꼼짝을 못 하는 모양이었다.

“너. 당분간은 내 눈에 띄면 요제프와 같은 꼴이 될 테니까. 조심해. 나는 가문 봐서 봐주고 그런 것도 없어.”

바닥에 침을 탁 뱉은 그는 샬롯을 향해 경고를 내뱉고 몸을 돌렸다.

샬롯은 리카르도가 뒤를 돌고, 다른 경호기사들이 일제히 황후와 리카르도를 호위해 걸음을 떼어 놓기 시작했을 때에야 바짝 긴장해서 무기로 쓸 것을 찾고 있던 시선을 멈췄다.

‘그래도 세티야 공작가가 친2황자파라 이거지. 웃기는군.’

“……윽.”

그녀가 몸을 돌리는데, 요제프로부터 바닥에서 끙끙거리는 신음이 또 한 번 들려왔다.

샬롯은 다급하게 무릎을 꿇었다.

바닥에 쓰러져 있는 요제프가 무릎을 끌어안고 낑낑거리는 것을 보니, 불쌍하고 측은하기 짝이 없었다.

“괜찮아?”

샬롯이 얼른 묻자, 긴 앞머리 사이로 고통을 이기지 못하는 시선이 그녀를 슬쩍 노려보았다.

“……또 너야?”

“애써 도와줬더니만, 또 너냐니.”

“저번에 내가 한 말, 못 들었었나? 가까이 오지 말라고.”

돌아온 대답은, 대답이라기보다는 묘한 분노 같은 거였다.

하지만 샬롯은 그의 분노 섞인 말을 한 귀로 흘렸다.

그가 뭐라고 하든 고통에 신음하는 요제프를 그냥 둘 수가 없었다.

황후나 2황자의 눈에 찍히는 거?

그런 건 상관없었다.

그런 걸 신경 쓰느라 따돌림당하고 괴롭힘당하는 사람을 그대로 둘 거였다면, 처음부터 나서지도 않았다.

샬롯이 무릎을 꿇고 요제프를 당겨 안자 무릎까지 오는 새하얀 반스타킹과 모처럼 차려입은 붉은 드레스의 흰 레이스 아랫단에 풀물이 들었다.

“……뭐 하는…….”

요제프가 신음을 흘리면서도 불평을 늘어놓는 것을 보며, 샬롯은 혀를 찼다.

제 완력으로 요제프를 안아 올릴 수도 없으니, 그의 머리통을 제 무릎에 올리는 게 기껏이었다.

요제프의 호위 기사 두 명이 샬롯을 탐탁잖은 눈으로 쳐다보고 있는 시선이 느껴졌지만 딱히 누구도 그녀를 말리지는 않았다.

아마도 그건 다행인지 불행인지, 샤를로테 세티야가 무술에 대한 아무런 조예가 없다는 게 널리 알려진 덕분일 거다.

그렇지 않았다면 아무리 어린아이라 해도 충분히 제지받을 수 있는 상황이었는데.

‘……뭐, 리카르도가 요제프를 두들겨 패든 말든 그냥 지켜만 보고 있는 허수아비 같은 기사들인데, 제지할 생각조차 없을지도 모르지.’

모처럼 남자 주인공이나 되면서, 왜 이렇게 사는 거야.

샬롯은 속으로 혀를 여러 번 차며 소년의 등에 가볍게 손을 얹었다.

그 등은 손이 다 타 버릴 것처럼 뜨겁게 느껴졌다.

실제 온도가 뜨거운 게 아니라, 그 안에서 들끓고 있는 기운이 빠져나갈 구석을 찾아 엉망진창으로 역주행하고 있었다.

‘……저번에도, 어쩐지 도망도 안 가고 그냥 그 자리에 있다 했더니. 그럴 기운조차 없었던 거야.’

샬롯은 어쩔 줄 몰라 하며 요제프를 어루만져 주었다.

‘2황자의 등쌀 때문에 성한 피부가 없을 정도인 요제프니까 이해할 수 있어. 이렇게까지 해서 강해지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었겠지…….’

겉으로 봐서는 절대 알 수 없을 만큼, 기와 혈이 엉망으로 막혀 있는 것을 보며 샬롯은 연거푸 한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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