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파 공녀님 (16)화 (16/123)

#16.

“……뭐?”

“란슬롯, 무슨 말이야?”

“내가, 직접 알아봐 준다고. 샬롯의 재능이 발현한 건지, 뭔지.”

아이들이 뒤에서 수런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란슬롯은 인파를 헤치고 샬롯을 향해 똑바로 나아갔다.

란슬롯이 샬롯 앞에 도착하는 과정은 꽤 험난했다.

생각보다 인파가 두텁게 서 있는 데다, 그들이 모두 시선을 떼지 않고 샬롯 쪽을 바라보고 있었으니까.

“에잇, 비켜!”

겨우 사람 사이를 헤집고 나가 샬롯에게 도착했을 때, 샬롯은 아직 아이작과 함께 있었다. 그리고 그 둘의 앞에는 아직도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하는 인파 무리가 서 있었다.

그거야 여기까지 오면서 충분히 봤으니 놀랄 일도 아니었다. 다만 정말 괴상한 것은, 샬롯의 아버지인 제롬 세티야도 그 인파에 껴서 같이 눈을 끔벅거리고 있다는 거였다.

‘……정말, 이게 뭐야. 한심하긴. 연극이라도 하자는 건가.’

란슬롯은 속으로 짜증을 부리며 앞으로 나섰다.

짜증이 머리끝까지 치솟았던 란슬롯은 샬롯이 보이는 곳에서 문득 멈춰 섰다.

제 오라버니에게 폭 안겨서 뭔가를 종알대고 있는 샬롯의 모습은, 지금까지 봐 왔던 모습과는 전혀 달라 보였다.

초라해 보이지도 않았고, 기가 죽어 보이지도 않았고, 온갖 말썽을 다 부리고 다녀서 뒷말을 듣던 모습과도 달라 보였다.

그냥…….

‘……대체 뭐야.’

마치 평범한 다른 귀족 여자아이들 같았다.

마음대로 막 대해도 괜찮은, 쭉정이 샬롯이 아니라.

게다가 샬롯의 분홍색 머리카락과 연두색 눈동자는, 세티야 가문의 다른 후계자 후보들과는 전혀 다른 색이었다.

금발이 되지 못한 그 색은, 그동안은 굴욕의 상징처럼 보였었는데.

당당하게 어깨를 펴고 있는 샬롯에겐 그 색이 그저 잘 어울려 보였고, 심지어는 우아해 보이기까지 했다.

‘……지금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란슬롯은 어깨를 움찔 떨었다.

스스로 절대 인정할 수 없는 생각이었다.

“샬롯!”

란슬롯은 언제나처럼 샬롯을 향해 고함쳤다.

하지만 언제나처럼 기가 죽어서 샬롯이 달려오는 대신, 그녀를 안고 있는 아이작이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돌아볼 뿐이었다.

그 금색의 눈은, 지독하게 서늘했다.

아이작이 항상 보여 왔던, 후계자의 지위와 검 외에는 그 무엇에도 관심이라곤 없는 냉혈한의 눈이었다.

“무슨 용건이지?”

절대 제 이름을 불러 주는 법이 없는 아이작과 말을 섞는 것만으로도 기가 죽었다.

게다가, 마치 사촌 동생을 싸고도는 것처럼 말을 하는 게 기가 막혔다.

‘……언제부터 그렇게 사이좋은 남매였다고 저러는 거야?’

란슬롯이 혀를 차며 말했다.

“샬롯이 황궁에야 여러 번 왔어도, 연회장에 온 건 처음이질 않습니까. 모처럼 여기까지 왔으니 제가 안내를 해 주려고 합니다.”

아이작이 이맛살을 가볍게 찌푸렸다.

지금 막, 흥미진진하기 짝이 없는 사촌 동생이 뭔가를 털어놓을 기색이었는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이며 끼어든 이 꼬맹이가 마음에 들 리 없었다.

게다가 안내?

크게 관심이 없긴 했지만, 란슬롯을 비롯한 아이들과 샬롯이 어떤 사이인지 대충은 알고 있었다.

“둘이 대단히 사이좋은 관계는 아니지 않나?”

“형님,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런 게 아니라…….”

“내가 안내를 해도 괜찮으니, 가 봐.”

아이작이 란슬롯에게 그렇게 대꾸하고 샬롯을 안은 채로 몸을 돌리는 순간, 샬롯의 눈에 다시 한번 저 멀리 지나가는 흑발의 소년이 들어왔다.

워낙 키가 큰 어른들 사이에 섞여 있기도 했기에 금방이라도 사람들 사이에 묻혀서 다시 보이지 않게 될 것 같았다.

‘이러다 놓치겠어.’

샬롯은 제 오라버니의 어깨를 당겼다.

“……오라버니! 저 잠깐 만나고 올 사람이 있어서 다녀올게요.”

“흠?”

아이작은 샬롯이 갑자기 몸을 버둥거리자, 길게 이유를 묻지 않고 그녀를 순순히 땅에 내려놔 주었다.

제 여동생이 어리긴 어린지 앙증맞은 구두가 딱, 소리를 내며 땅을 딛는 게 묘하게 귀여웠다.

어차피 공개 사과까지 한 마당이었다.

샬롯에게서 들을 이야기들은 천천히 들어도 상관없었고, 샬롯이 무엇에 관심을 가지고 저러는지가 오히려 더 궁금했다.

“그래.”

란슬롯은 샬롯이 눈치 있게 제 말에 장단을 맞춰 주는 거라 생각했지만, 샬롯은 그를 신경조차 쓰지 않고 인파 사이를 지나 앞으로 나아갔다.

“샬롯! 야, 같이 가!”

생각한 것과는 달리 거의 달음질 치듯 앞장서서 달려가는 샬롯 때문에, 란슬롯은 꼴사납게도 샬롯의 뒤꽁무니를 쫓아 뛰어가야 했다.

란슬롯은 순식간에 정원 입구에 도착한 샬롯을 쏘아보며, 숨을 몰아쉬었다.

“방에 처박혀서 근신한 주제에…… 무슨 체력이 이렇게, 헉, 좋아, 헉.”

수련과는 담을 쌓고 사는 샬롯과는 달리, 저는 어엿한 황곰 기사단의 수련생이었다. 운동장을 뛰는 정도의 수련은 매일매일 하고 있었다.

그러니, 불평이 나와도 크게 떠들 수가 없이 속으로 조용히 삭일 수밖에.

샬롯이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정원을 둘러보는 것을 보며, 란슬롯은 제 친구 무리를 눈으로 좇았다.

제가 데려온 건 아니지만, 어쨌든 원했던 방향으로 데려온 거다.

아이들은 테라스 근처에 모여서 저를 기다리고 있었다.

테라스 앞은 조명이 둥글게 만들어져 있어서, 거기에서 공연을 하기도 하고 대련을 하기도 하는 곳이었다.

하지만 란슬롯의 계획대로 그녀가 테라스 앞의 공터에 도착하는 순간, 샬롯의 눈이 반짝였다.

아까 느꼈던 요제프의 탁한 기운이 덤불 너머에서 일렁이고 있었다.

‘저긴가……?’

샬롯은 가볍게 난간을 박차고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암향표라는 이름의 화산검파의 경공이었다.

테라스 위쪽 자리에서 란슬롯과 샬롯을 흥미진진하게 지켜보던 아이들의 입에서 얼빠진 신음이 흘러나왔다.

“……어어?”

화산파는 본디 깊고 험한 산지에 자리 잡은 만큼 경공에 조예가 깊었다.

내공이 깊지 않기에 오래 지속할 수는 없지만, 높은 이해를 바탕으로 짧게 펼치는 것에는 무리가 없었다.

정말로 허공을 밟은 것은 아니고, 그저 남들보다 조금 더 빨리 달리는 정도에 불과했지만 워낙 어두운 곳에서 밝은 곳으로 갑자기 속도를 높여 이동한 것이라 마치 사라진 것처럼 보였다.

경공에 대해 알 리 없는 아이들은 넋이 나간 듯 허공을 응시하기만 했다.

“지금 뭘 본 거지?”

“어디…… 간 거야?”

“……뭐지?”

하지만 이 상황이 가장 당황스러운 건 란슬롯이었다.

‘설마.’

있을 수 없는 의혹이 란슬롯의 속에 싹을 틔웠다.

샬롯이 제대로 된 검술도 모르고, 재능도 없는 게 당연하다는 걸 입증하기 위해 그 계집아이를 데리고 여기까지 온 건데…….

만에 하나라도 정말로 재능이 뒤늦게 꽃을 피웠나?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야?’

“아티팩트라도 썼나 보지. 비겁한 샬롯.”

왕성 연회 홀 바로 옆에서 마법을 쓰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런 사실도 모르고 맹목적으로 샬롯을 비난하는 란슬롯의 말에, 아이들은 그제야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란슬롯이야.”

“우린 정말 놀랄 뻔했잖아.”

란슬롯은 아이들의 말을 한 귀로 흘렸다. 그는 허리춤에 손을 얹고 샬롯의 잔영이 마지막으로 없어진 모습을 다시 한번 생각했다.

그 모습은 아무리 생각해도…….

‘……아티팩트를 쓰는 모습처럼 보이지는 않았는데.’

찝찝하기 짝이 없는 기분으로, 란슬롯이 멍하니 빈 공터를 노려보았다.

‘3황자다.’

샬롯은 방금 느꼈던 기운의 출처를 찾아 다가가다가, 3황자를 발견하고 얼른 덤불 뒤에 숨었다.

풀 소리를 거의 내지 않고 다가간 덤불 너머에는, 3황자 요제프와 두 명의 사람이 함께 서 있었다.

한 명은 척 보기에도 지체 높아 보이는 여인이었고, 또 한 명은 꽤 덩치가 있는 청년이었는데 화려한 의복으로 보아 역시 신분이 높아 보였다.

그리고 주변을 에워싸고 있는 경호기사들.

샬롯은 덤불 뒤에 숨어서 속으로 혀를 찼다.

‘정확히 누가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내가 끼어들 분위기는 아닌데.’

갑자기 인기척을 내지 않고 근접 거리까지 접근한 것을 들키면, 오히려 몰매라도 맞을 듯한 분위기였다.

‘……그냥 조용히 다시 물러가는 게 낫겠어.’

샬롯이 그렇게 멍하니 생각하는 순간,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가 그래, 나를 무시해?”

“……제가 매일 아침 문안 인사라도 드리길 바라는 겁니까? 제 얼굴을 보는 것조차 싫어하면서.”

요제프의 목소리.

아까의 날 선 목소리는 어디로 갔는지, 지치다 못해 바닥으로 꺼져 드는 목소리였다.

‘황후가 맞는 모양이군. 그런데 이렇게 날 선 상황이라니?’

샬롯은 슬쩍 덤불 사이에 코를 박고 상황을 지켜보았다.

“아니, 말대꾸하는 것 좀 봐? 아직 제정신이 안 들었구나.”

“……몸이 안 좋아서, 그렇습니다.”

몸이 안 좋을 수밖에.

‘그렇게 여기저기 멍이 들어 있었는걸.’

샬롯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다가 문득 그대로 멈췄다.

아니, 그냥 멍이 든 게 문제가 아니었다.

아까 느꼈던 대로였다.

십수 척이 떨어져 있는 거리에서도, 요제프의 기가 엉망으로 흐트러져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역시 따라오길 잘했어. 멀리서부터 느껴졌던 그 수상한 기운이 착각이 아니었어.’

이러다간 주화입마에라도 걸리겠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주화입마는 무림인들이 자신의 강력한 내공을 통제하지 못할 때 겪는 현상으로, 심하면 죽음을 맞이할 수도 있는 심각한 현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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