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샬롯은 괜히 관심도 없는 창밖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다가 문득 눈이 휘둥그레졌다.
“……와.”
아찔할 정도로 넓게 펼쳐져 있는 광장과 잘 정비된 도로.
넓게 펼쳐진 마차로의 끝에 서 있는 반짝이는 새하얀 왕궁의 모습.
왕성 앞까지 꽤 질서 있게 늘어선 사람들, 그 사람들의 손에 들려 있는 황금색 깃발, 그 수백 수천 개는 될 듯한 깃발마다 새겨져 있는 황실의 문양인 세 개의 검과 두 개의 방패.
“……진짜 멋있다.”
침상에 내도록 누워 지내던 그녀에게 <서방환상연애소설전집11-순애보 공주님은 사랑받고 싶어!>는 훌륭한 친구였다. 그래서인지, 한두 줄 묘사로만 듣던 장면을 직접 제 눈으로 본 것에는 꽤 큰 감회가 있었다.
아이작은 그녀가 감탄사를 연발하는 모습을 등 뒤에서 흘끗 바라보았다.
‘정말로 신나 보이는군.’
조막만 한 양손으로 마차의 창틀을 꼭 움켜쥐고 고개까지 내밀어 가며 밖을 구경하는 모습은, 정말 천진한 아홉 살 아이 그 자체였다.
아이작은 그 모습을 보며 샬롯이 보이는 모습의 어디까지가 연기이고 어디까지가 진실인지를 가늠해 보았다.
‘꽤 여우 같은 면이 있는지도 모르지.’
아이작은 팔짱을 끼고 소파에 몸을 푹 기댔다.
그와 샬롯은 8살 차이가 나는 사촌지간이었다.
나이 차가 많이 나는 데다, 능력이라곤 없는 샬롯에게 관심이 없어서 워낙 평소에 교류가 없었다. 하지만 확실한 건, 지금까지 샬롯은 누군가가 관심을 가져 주고 말만 걸어 줘도 말도 안 되는 허영심을 늘어놓으며 신나 하는 아이였다.
그러니까 같은 마차에 탄 거다.
제롬이 없는 곳에서 추궁할 기회가 필요했으니까.
‘하지만 우리와 말을 섞을 수 있기만 하다면 뭐든 말하던 그 아이는 이제 없나 본데.’
샬롯의 생각 밖의 반응에 얻어 낸 정보는 결국 하나도 없었다.
참 묘하지.
샬롯이 제 눈치를 살살 보면서 말 한번 걸어 주길 그렇게 기다릴 때는 길에 굴러다니는 돌멩이보다 거슬리고 귀찮기만 했는데.
막상 샬롯이 제 말을 귓등으로도 안 듣고, 심지어는 일이 주에 한 번꼴로 오게 되는 대광장에 한눈파는 척하는 모습이 얼마나 웃기고 요망한지 몰랐다.
지금까지의 샬롯이 연기였을까? 아니면 지금의 샬롯이?
‘아니, 내가 말하는데 이렇게 무시해?’
순간 그런 생각이 불쑥불쑥 치솟다가도, 문득 샬롯의 모습이 눈에 들어오면 자꾸만 히죽히죽 웃음이 새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마차 소파 위에 무릎을 올리고 반쯤 선 자세로 창밖 구경이 한참인 꼬마 아가씨를 보며, 아이작은 앞으로의 계획을 구상해 보았다.
입장이 반대일 때는 몰랐는데 이제 와서 샬롯이 제 말을 무시하니까, 대답을 듣고 싶은 열의가 샘솟는 게 참 묘했다.
무료하기 짝이 없는 후계자 지명에 찾아온 한 줄기 재미가 아닌가.
결국에는 제 손에 꺾여 버릴 어린 꽃이지만, 그래도 탐구하는 재미가 쏠쏠할 거다.
“거의 다 왔는데. 더 구경할 건가?”
“……네?”
“내 말, 언제까지 무시할 거냐고.”
그렇게 나오자 샬롯은 제법 진지한 얼굴로 저를 들여다보는 아이작의 시선을 더 이상 무시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등까지 돌리고 신나게 구경하는 제 모습이 이상해 보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어서, 머쓱하게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소파에 올라가느라 벗어 두었던 둥근 코의 메리제인 구두를 다시 신고 고개를 든 그녀가 아이작을 빤히 바라보았다.
“저랑 얘기할 마음이 갑자기 왜 드셨는지 모르겠어요.”
샬롯에게서 들어 본 적이라곤 없는 제법 정중한 말투에, 아이작은 입꼬리를 당겨 웃었다.
알쏭달쏭하게 구는 게, 지금까지 느껴 본 적 없는 재미를 자극했다.
“내가 어떻게 하면 내 질문에 대답해 줄 거지?”
샬롯은 조금 놀라서 아이작을 돌아보았다.
원래도 세티야 가문에 피바람을 불러일으킬, 정신이상자인 그였으니까 이번에도 그냥 변덕을 부린 거라고 생각했는데.
제법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 모양이긴 한 것 같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냉큼 받아 주기도 그렇고…….
‘……마냥 무시했다간 저 반짝이다 못해 번쩍거리는 시선에 등에 구멍이 나게 생겼어.’
샬롯은 속으로 한숨을 쉬며 궁리했다.
‘뭐, 적당히 절대 못 들어줄 조건을 달면 되는 거 아니겠어?’
지금까지 후계자가 되기 위한 길을 줄곧 걸어왔던 아이작이니만큼, 제 명성이나 권위가 추락하는 것만은 못 참는다고 했겠다……?
“……흐음. 글쎄요. 왕성 연회장에서, 남들 다 보는 데서 제게 그동안의 태도에 대해 공식적으로 사과하면 질문 세 개까진 받을게요.”
샬롯은 제가 그렇게 말하면, 아이작이 코웃음을 칠 줄 알았다.
그런데, 아이작은 골똘히 생각하는 표정이더니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네가 바라는 게 그거라면.”
‘……뭐야 저 흔쾌한 대답은? ……농담이겠지?’
샬롯은 광기마저 느껴지는 아이작의 금빛 눈동자에서 얼른 시선을 돌렸다.
도대체 어쩌다가 저 피바람을 몰고 올 큰 오라버니의 관심을 듬뿍 받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떻게든 빨리 탈출하지 않으면 앞날이 귀찮아질 것 같다는 진한 예감이 들었다.
* * *
“세티야 가문의 입장이 있겠습니다. 제롬 세티야 입장하십니다!”
제롬을 선두로, 각기 다른 파트너를 데려온 러슬과 비야키가 안으로 들어섰다. 이어서 샬롯과 아이작이 함께 입장했다.
“샬롯 세티야, 아이작 세티야 함께 입장하십니다!”
큰 안내 소리와 함께, 연회 홀 안의 공기가 술렁였다.
본 적도 없는 화려하고 반짝거리는 조명, 금박 은박으로 번쩍거리는 벽, 온갖 보석들이 주렁주렁 걸려 있는 귀족들의 옷차림, 멀리까지 풍겨 오는 달콤한 과일주의 냄새…….
과연 향락의 중심지라 할 만한 거대한 연회 홀은 그야말로 볼만한 것이었지만, 샬롯은 저와 아이작을 보고 떠드는 사람들의 목소리 때문에 그 무엇에도 집중할 수가 없었다.
“……세상에.”
“지금 내가 뭘 보고 있는 거지? 내가 벌써 눈이 잘못됐나?”
“자네, 나도 같은 걸 보고 있는 것 같은데…….”
“아이작 님이…… 샬롯이랑 같이 서 있는 거 맞아?”
놀라서 입이 굳었던 사람들까지 합류하면서 연회 홀은 점점 더 크게 술렁였다.
“하지만 샬롯은 지금까지 거의 공식적으로 유령이었던 거 아니야……? 이제 와서……?”
“심지어 지금, 샬롯에게 눈높이를 맞춰 주고 계시다고.”
“아이작 님이 웃는 거 맞아?”
샬롯은 시선이 몰리는 와중에 아이작이 더 짙게 웃어 보이자 어딘가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그녀의 심정을 아랑곳 않고, 아이작은 오히려 이 소란을 즐기는 듯 오히려 제 키의 반절쯤 오는 자그마한 사촌 동생을 품에 안아 들었다.
마치 좋은 사이를 과시하기라도 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객관적으로만 보면, 공작가의 우수한 피를 이어받은 두 사촌이 나란히 서 있는 것은 꽤 그림이 되었다.
보는 것만으로 사람을 설레게 하는 새하얀 피부와 큰 눈, 볼록한 이마, 날렵한 얼굴선. 세티야 가 특유의 귀족적이고 인형 같은 외형은 크게 눈을 사로잡는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그 기묘한 동작으로 인해 연회 홀의 사람들은 더더구나 서로 경쟁하듯 이게 도대체 어떻게 돌아가는 일인지 입방아를 찧어 댔다.
“뭔가 잘못됐어. 아마 아이작 님이 잘못되셨을 리는 없으니까, 우리 눈알이 잘못된 것 같은데.”
“내 말이 그 말이야.”
이 모든 소란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아이작은 그야말로 검과 같은 아이였다.
그리고 청소년이 된 지금은, 그 누구도 얕잡아볼 수 없을 만큼 차가운 카리스마를 가진 이였다.
흠이 있다면 누군가를 가엾이 여길 줄도 모르고, 그저 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라면 누구든 이용해 먹는 잔인한 성정이 있는 것인데…….
그런 아이작이 웃는 모습을 보는 게 처음인 사람들이 다 뒤집어지듯 놀라는 건 정말 당연한 일이었다.
샬롯은 점점 소란이 커지는 것 같자, 저를 안아 올린 아이작의 팔을 밀어냈다.
‘3황자만 만나서 이야기를 좀 하고 얼른 돌아가서 수련이나 하고 싶단 말이야. 이런 소란은 사양이야.’
아이작이 버둥거리는 샬롯을 흘끗 내려다보더니 다시 한번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이렇게 연회장에 모여 주신 여러분들께,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카랑카랑하고 큰, 절로 주의를 끌어모으는 아이작의 목소리가 이미 모여 있던 이목을 더욱 집중시켰다.
‘……아니, 이 자식 설마.’
샬롯이 말도 안 되는 생각에 저도 모르게 아이작의 팔을 밀어내다가 멈칫하는 순간, 아이작이 더욱 짙어진 미소를 입에 매달고 입을 열었다.
“저는 그간, 세티야 가문의 막내. 저희 사랑스러운 샤를로테 세티야에게 함부로 대하는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오랜 시간 동안 막내의 가슴에 박힌 못, 제가 단번에 치유해 줄 수는 없겠지만 이 아이작, 깊게 반성하고 고쳐 나갈 것을 여러분 앞에 맹세드립니다.”
이번에야말로 연회장이 얼어붙었다.
너무 놀라서, 누구 하나 말을 꺼낼 수조차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