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파 공녀님 (13)화 (13/123)

#13.

“너무 크게 말씀하지 마세요. 경을 치실 거랍니다.”

“왜?”

베티는 목소리를 잔뜩 죽여 속삭였다.

“세티야 가와 2황자님이 친하신 건 아시죠?”

“그렇지?”

“세티야 가문이 완전히 공식적인 입장을 표명한 적이야 없지만, 1, 2황자님의 어머니인 현 황후 폐하를 배출한 것이 바로 세티야 가문의 오랜 연맹 탄티누스 후작가잖아요.”

샬롯은 이미 아는 이야기였지만, 베티의 입으로 이야기를 한 번 더 들어 두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응.”

“3황자님의 어머니이신 아렌느 님께서 황비가 되기 전부터, 황후 폐하께서 아렌느 님을 지독히 미워하신 것도 아시죠?”

“……뭐, 그렇지.”

“그리고 요제프 황자님께서 최근 검술을 익히기 시작하면서부터 엄청…… 옛날보다 더 미움을 사고 계시고요.”

미움을 산다는 말 정도로 요제프 황자의 상태를 표현할 수 있을까? 공작가의 방계 아이들에게 나무에 묶여서 돌을 맞고 있던데.

샬롯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냥 가족 관계 때문에 미움을 받는다고 생각했는데, 그 와중에 요제프가 2황자인 리카르도보다 더 재능이 있어서 더 미움을 산 거구나.’

마치 전생의 자신 같다는 생각이 또 한 번 들었다.

괜히, 재능이 있고 그 재능으로 노력을 한다는 이유로 다른 사람의 질투와 시기를 사는 경험을 해 봤으니까.

‘……아렌느 황비가 잘했다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요제프가 괴롭힘을 당해야 할 이유는 아니라고 생각해. 요제프가 무슨 잘못이 있어?’

요제프에 대한 이야기를 더 알아낼수록 샬롯은 가슴이 꽉 막힌 기분이 들었다.

샬롯이 조용히 침묵하고 있자, 베티는 샬롯이 제대로 이해했나 싶어 조심스레 덧붙였다.

“그러니까, 3황자님 이야기를 막 꺼내시면 안 되는 거 이해하셨죠?”

“이해, 응, 이해는 했어.”

입장은 이해했다.

하지만…….

샬롯은 천천히 속에서부터 타오르는 분노를 섞어 또박또박 말했다.

“그럴 거면 낳지를 말았어야지.”

“……네?”

“아니, 그렇잖아. 어쨌든 어엿한 황자인데, 신세가 왜 그래? 그렇게 괴롭힘당하라고 낳았어? 사정이야 어찌 되었든 황제 폐하께서 사랑해서 아이를 낳았으면, 제대로 돌봐 줘야 하는 거 아냐?”

“샤, 샬롯 아가씨!”

베티가 허겁지겁 샬롯에게 조용히 하라고 신호를 보냈다.

샬롯은 따지고 들고 싶은 말이 더 많았지만, 베티에게 이러쿵저러쿵 떠들어 봤자 될 일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녀는 화를 가라앉히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알았어. 알았는데…… 어쨌든, 베티가 그렇게까지 말했으니까, 말조심해 볼게.”

“부디 부탁드려요, 아가씨.”

“응. 그런데 요제프는 세티야 가에서 교육하고 있다며? 오늘 연회에 가면 만날 수 있어?”

베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야, 당연히 만나시겠죠. 어찌 됐건 황자님이시니까 참여하실 테니까요.”

“그럼 됐어. 더 이상 얘기해서 괴롭히지 않을게.”

샬롯이 요제프를 만나겠다는 듯이 말하고서 갑자기 이야기를 끝내 버리자, 베티는 더 안절부절못했다.

‘만나서 어쩌시려는 걸까.’

지금까지의 샬롯이 쳤던 수많은 사고를 떠올리면, 베티가 불안해하는 것도 절대 무리는 아니었다.

베티는 샬롯의 긴 머리를 빗어 정돈해 주며 한참 동안 말을 고르다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제가 주제넘게 참견을 하려던 게 아니라…… 아니, 옛날에는 3황자님께 전혀 관심이라곤 없으셨으면서, 갑자기 어쩌다 관심이 생기신 거예요?”

샬롯은 거울을 통해 베티를 빤히 바라보다가, 툭 던지듯 대답했다.

“그냥, 나 같아서.”

“……아가씨.”

베티는 뭐라고 덧붙이려다가 입을 꾹 다물었다.

샬롯이 어떤 의미에서 ‘나 같다’고 말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버지가 멀쩡하게 살아 있는데도 집안에서 멸시받고 제대로 돌봄을 받지 못하는 모습이 같다고 말한 거라면 정말 그랬다.

베티는 괜히 속이 울컥했다. 눈물이 날 것 같은 기분을 참으며 더 이상 말을 붙이지 않고 일부러 더 동동거리며 연회 준비를 시작했다.

샬롯도 더 이상 3황자 이야기를 꺼내지 않고 얌전히 베티가 시키는 대로 세수를 하고 옷을 갈아입었다.

“어머, 어머. 너무 귀여우세요.”

어떻게 된 게 공작 가문의 아가씨라는데 무도회 참석을 위해 꾸미는 것을 도와주는 사람이 베티 한 명밖에 없었다.

베티는 그것이 안쓰러운지 연신 샬롯을 다독거리고 칭찬하며 머리와 얼굴을 단장해 주었다.

샬롯은 그런 것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어서, 멍하니 거울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아, 베티는 금세 샬롯의 머리를 땋아 올려 붉은 꽃이 달린 머리핀 장식을 달아 주었다.

마치 매화꽃처럼 보이는 그 장식이 마음에 들어서 샬롯은 작게 미소지었다.

마지막으로 얼굴 피부를 부드럽게 하는 크림을 바르고, 입술에 꽃 기름을 바르고 나자 단장이 끝났다.

베티는 손을 놓고 허리를 펴고서야, 샬롯을 바라보았다.

거울 너머로 시선을 맞닥뜨린 샬롯은, 아이답게 귀여우면서도 동시에 전혀 아이답지 않은 위풍당당함이 있었다.

‘……저번에도 느꼈지만 마치 다른 분 같아.’

허리를 펴고 계셔서? 아니면 은은하게 미소짓고 계셔서? 그것도 아니면…… 다른 사람을 홀대하지 않고, 욕도 하지 않으셔서일까……?

항상 짜증이 서려 있던 미간과 분노를 풀 대상을 찾아 헤매던 눈동자에 평온함이 깃들어서인지, 샬롯은 정말로 아름다워 보였다.

샬롯도 제가 꾸민 모습이 마음에 들었다.

드레스를 입는다니, 귀찮기만 한 행사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입어보니 이것도 가장무도회 같은 기분이 나서 재밌었다.

천방지축으로 검만 쓰고 다닌다고 해서, 매일 무복만 입으라는 법은 없으니까.

“베티, 솜씨가 좋네. 나도 이렇게 보니까 제법 그럴듯한 아가씨 같아.”

샬롯이 기분 좋게 웃으며 제자리에서 빙글 돌아 보이자, 베티가 작게 웃었다.

요즘의 샬롯은 칭찬에 후했다.

아가씨를 꾸며 주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고, 평소 같으면 전문가를 왜 모셔 오지 않았냐고 떼쓰는 샬롯을 달래느라 한두 시간은 훌쩍 지났을 터였다.

샬롯의 유모가 된 뒤, 이렇게 직업 만족도가 높았던 시절은 없었을 거다.

* * *

제롬은 본관 로비의 소파에 앉아 시계를 노려보고 있다가, 작은 구두 소리가 나는 것에 놀라 고개를 돌렸다.

동그란 작은 코의 구두와 분홍색 머리카락과 잘 어울리는 붉은 드레스에 이어 귀엽고 동그란 샬롯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다시 한번 시선을 돌려 시계를 바라보았지만, 역시 로비에서 모이기로 한 시간보다 오 분 전인 정확한 시간이었다.

“……제시간에 내려왔군.”

제롬은 요즘 샬롯에게 일어나는 기이한 현상이 어디까지 이어질지를 마음속으로 가늠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 보자, 일단 그러면 오늘 샬롯의 에스코트는…….”

제롬이 언제나처럼 파트너를 찾기 힘든 제 딸을 위해 함께 마차를 타겠다 말하려던 찰나였다.

“제가 하겠습니다.”

이 가문에서 가장 무뚝뚝하고, 형제자매는커녕 인간 자체에 관심이 없는 아이작이 빙글빙글 웃으며 손을 들었다.

“손 한 번만 보여 줘, 샤를로테. ……굳은살이 하나도 없군.”

“주로 사용하는 검이 있던가?”

“넌 가문 내에 쓸 비무장도 없는데, 내가 쓰는 전용 비무장에 와서 수련해도 좋다. 어떻게 생각하지?”

샬롯은 쉴 새 없이 제게 말을 걸어오는 아이작을 묘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동생이 읽어 주는 책 내용을 몇 번이나 들었는데…… 아이작에 대한 설명이 왜 이렇게 다른 거야?’

분명히 외관의 설명은 일치했다.

금발 머리, 수려하고 화려한 얼굴, 샬롯을 보고 재밌다는 듯 웃어 댈 때를 빼고는 가까이 다가가기조차 무서운 묘한 공기.

그런데 이렇게 수다스러운 사람일 거라고는 생각을 못 해 봤다.

‘가주님과의 대화 외에는 대답조차 잘 안 한다더니…….’

샬롯은 처음 식당에 들어섰을 때 그녀를 지나가는 먼지만도 못하게 보던 아이작의 시선을 상기하며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분명히 그때 봤을 때만 해도, 설명대로의 사람이었는데.’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지? 이번 비무 대회에 대해 생각하나?”

질문이 정말 끊이질 않았다.

샬롯은 아이작의 눈에서 빛나는 반짝반짝한 호기심을 더 이상 외면할 수 없어서 크게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진즉에 이렇게 말씀을 많이 걸어 주셨으면, 샬롯이 좀 더 행복했을 텐데요.”

“마치 남 일처럼 말하는군.”

“……아니에요.”

“그래서? 제롬 삼촌이 내게 아무것도 말하지 말라고 하던가?”

“그런 건 아니에요.”

샬롯은 다시 한번 고개를 가로저었다.

왕궁이 가까워지도록 아이작이 내내 추궁하듯 물어 온 것들은 전부 검에 대한 것들이었다. 샬롯도 검이나 무술에 대해 떠드는 거라면 그 누구보다 좋아했다.

하지만 그녀는 입이 간지러운 것을 꾹 눌러 참고 고개를 홱 돌려 버렸다.

‘솔직히 괴롭히는 것도 나쁘지만 무시하는 것도 너무했잖아.’

직접 형제자매를 가져 본 적이 없어서 그런지, 늘 먼 거리에서 혈육끼리 우애 있게 지내는 것을 부러워했던 샬롯 입장에서는 검 좀 못 쓴다고 사촌 동생을 따돌리는 건 너무 치졸해 보였다.

그렇게 속 좁게 굴던 아이작이 이제 와서 태도가 변했다고 해서 대번에 친절하게 상대해 주기가 싫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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