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파 공녀님 (12)화 (12/123)

#12.

그건 사소했지만, 오러에 대한 완벽한 이해를 필요로 하는 기술이었다. 그건 그냥 감각으로 할 수 있는 게 아니라 정말로 오랜 고뇌와 오러를 이해하기 위한 순수한 열정이 있어야 비로소 가능해진다.

날 때부터 자유자재로 오러를 다루었던 아이작도 쇠가 아닌 물질에 오러를 주입하는 것은 쉽지 않을 정도니까.

와삭.

아이작은 9살짜리 사촌 동생의 입으로 샐러드가 한 움큼 들어가는 것을 즐거이 바라보며 생각을 이어 나갔다.

‘샬롯이 오러에 대한 재능이 없는 건 확실했어. 그건, 숨길 수 없지. 다섯 살 때 검증이 끝나는 문제니까. 그렇다면…….’

아이작의 붉은 입술이 더 비틀어졌다.

‘후천적인 노력으로 오러를 연마했다는 뜻이지. 고작 아홉 살에 비야키와 러슬을 뛰어넘는 정교함이라…….’

아이작은 제게 꽂힌 러슬과 비야키의 불만 가득한 시선과 저를 흘끗거리는 온갖 시선들을 철저히 무시한 채로 생각을 이었다.

‘하지만 그랬다고 보기도 어려운 것 아닌가? 샬롯이 수련을 한다는 이야기는 들어 본 적이 없는데.’

아이작은 카밀라의 옆에 앉은 제롬을 흘끗 바라보았다.

‘삼촌이 내게 후계자 자리를 넘기기 싫어서 이런 준비를 해 왔던 건가?’

아이작의 시선은 다시 딸기 주스를 세 잔째 비우고 있는 아홉 살짜리 꼬맹이에게로 돌아갔다.

직전에 보았던 그 갑작스러운 실력 행사가 마치 꿈이었던 것처럼, 샬롯은 그저 태연하게 식사에 열중하고 있었다.

아이작의 손가락이 즐겁게 테이블을 연주하듯 두드렸다.

‘뭐…… 상관없지. 오히려, 너무 뻔할 뻔했는데. 이런 준비가 되어 있다면야.’

그가 연신 미소를 짓자, 시종들이 아이작의 아름다운 얼굴을 보며 깜짝 놀란 얼굴을 숨기려 애를 썼다.

그만큼 아이작은 변화가 없는 이였다. 기계처럼 가문의 후계자만 보며 달려가는.

지금 세티야 가문의 가주였어야 할 그의 아버지가 이른 나이에 죽은 뒤로, 원래도 사람에게 관심이라곤 보이지 않던 아이작의 성정은 더 얼어붙었다. 마치 원한이라도 가진 사람같았다.

그런 그가, 원래는 존재를 인지도 못 한 것처럼 굴던 샬롯에게서 눈을 못 떼는 것은 정말 기이하기 짝이 없는 광경이었다.

테이블 시중을 드는 시종들은 그 광경을 보느라 자꾸만 꼬이는 손과 발을 어떻게든 가다듬으려고 애를 써야 할 정도였다.

식사 자리는 카밀라가 제 손자들을 점검하는 자리이기도 했다.

카밀라는 평소와는 달리 수선스러운 기운을 눈치챘지만, 거기에 대해서 굳이 언급하지는 않았다.

다만 그 어느 때보다 자신감 있는 듯한 미소를 보이는 아이작을 보며 속으로 작게 한숨을 삼켰다.

‘후계자는 정해져 있는 것이나 다름없는데도 굳이 이렇게 의례적인 대회를 여는 것은, 내가 뭔가를 기대하기 때문인가.’

가주 카밀라는 오늘따라 떫게만 느껴지는 식사를 천천히 마치고선 모두를 향해 한마디를 덧붙였다.

“곧 있을 왕궁 무도회에는, 일족 모두가 초청을 받았다. 이번이 마지막 참여가 될 이도 있을 테니, 이번에는 참여 자격에 제한을 두지 않겠다. 마음껏 즐기고 오너라.”

“네, 가주님.”

세 명의 후계자 후보가 입을 모아 대답하는 순간, 샬롯이 조용히 손을 들었다.

지나치게 이례적인 행동에 제롬이 당황해서 그녀를 바라보는데, 카밀라가 눈을 가늘게 뜨곤 샬롯을 향해 턱짓했다.

항상 저를 똑바로 쳐다보지도 못하던 샬롯이 발언권을 청하는 것을 보고 조금 놀랐을 뿐, 별 대단찮은 일도 아니었으니까.

“뭐지?”

샬롯은 또렷한 눈망울로 카밀라를 바라보며 물었다.

“비무 대회에서 이기면, 어떻게 되나요?”

“……뭐?”

“그렇잖아요. 지면, 제가 쫓겨날 테고. 이기면 좋은 점이 있나 궁금해서요.”

차마 말로 형상화되지 못한 경악이 테이블 위를 굴러다녔다.

카밀라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샬롯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단 한 번도 제대로 된 후계자 후보로 생각해 본 적조차 없는 아이였다.

그런데 실력조차 없는 아이가 설령 농담이라고 한들, 승리를 입에 담는 것 하나는 마음에 들었다. 아마, 처음일 거다. 샬롯이 마음에 든다고 생각한 건.

“포부는 대범하구나. 그래, 네 말이 맞다. 지면 손해를 보니, 이기면 좋은 일이 있어야지.”

“……가주님! 굳이 샬롯의 말을 받아 주실 필요는…….”

제롬이 이 묘한 일촉즉발의 상황을 견디지 못하고 끼어드는데, 카밀라가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이긴다면 네 소원을 들어주마.”

그 말은, 정말로 소원을 들어주겠다는 말처럼 들리지 않았다.

이런 조건까지 내걸고 예선에서 패배한다면 정말로 가문에 발을 다시 붙일 생각은 하지도 말라는 엄포처럼 들렸다.

그 말이 가진 무게에 제롬마저도 숨을 죽이는데, 샬롯은 가주의 기운에도 전혀 눌리지 않고 대담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어떤 소원이든 들어주시기예요.”

“좋다.”

“약속하신 거예요.”

“그래.”

샬롯은 남몰래 요제프를 빼 올 계획을 떠올리며 방긋 웃었다.

그 순간, 샬롯을 지켜보던 카밀라의 입술이 처음으로 작게 휘었다.

그녀는 대범하고 당돌하게 제가 닿지도 못할 목표를 제시하는 것을 싫어하지 않았다. 빌빌대며 제 앞에서 눈조차 마주치지 못하고 말도 제대로 못 하는 아이들보다는, 말도 안 되는 목표를 대뜸 던지고 보는 게 재밌었다.

* * *

그 이후로 일주일.

제롬이 근신을 명한 기간 동안, 샬롯은 아무런 불평도 불만도 없이 제 다락방에서 시간을 보냈다.

그동안 다락방 밖으로 나간 거라곤 카밀라가 직접 소집한 식사 자리가 전부였을 정도였다.

샬롯은 오히려 그 시간이 좋았다.

괜히 놀이 친구들과 또 마주쳐 봤자 상황이 좋을 리 만무했고, 지금 당장은 일분일초가 아까울 정도로 제 몸을 다스리는 게 급했다.

요제프 황자를 당장 만나지 못하는 게 속이 탔지만, 그건 어쩔 도리가 없었으니까.

오늘도 언제나처럼 아주 이른 새벽부터 운기조식을 하던 샬롯은 제 몸속을 돌아다니는 기운들을 다시 단전으로 돌려보내고 천천히 명상을 마쳤다.

“……후.”

반짝.

눈을 뜨고 앞을 바라본 샬롯의 입가에는 미소가 매달려 있었다.

솔직히 너무너무 즐거웠다.

이 세계에서 제가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라는 것도 이제 충분히 알겠고, 가만히 있다간 목이 달아날지도 모를 상황이라는 것도 알겠지만 그런 것보다는 즐거움이 더 컸다.

팔다리를 움직이지 못하고 일 년간 비급 구결만 외우던 그녀였으니까.

‘정파의 내공은 순정화평이라 하여, 내공이 깊은 것은 좋지만 대신 내공이 매우 느리게 축적되는 것이 단점인데…… 이곳이라면 그 단점도 극복할 수 있어.’

벌써, 단전에 내기가 제법 쌓였다.

‘날아갈 것 같아.’

이제 내공을 좀만 더 쌓으면 몸속의 길들을 뚫어도 좋을 것 같았다.

‘아니, 그 이전에 검부터 잡아야겠어. 근질근질해 죽겠네.’

샬롯이 신이 나서 바닥에서 벌떡 일어나는데, 문을 열고 베티가 걸어들어왔다.

“베티? 베티!”

베티는 지난 일주일 동안, 지나칠 정도로 얌전하고 밝아지신 아가씨에게 적응을 마쳤다. 하지만 아직도 그녀를 환하게 반겨 주는 모습을 볼 때마다 다시금 놀라곤 했다.

“네, 샬롯 아가씨.”

“오늘은 드디어 밖에 나가도 되는 거지?”

“어머, 기다리고 계실 줄 알았어요. 그럼요. 오늘이야말로 드디어 왕궁 무도회…….”

“드디어 연무장에 나가도 되겠다!”

샬롯의 입에서 연무장이니 검이니 하는 단어가 나오기 시작한 지도 일주일이 넘었다. 베티는 처음에는 어린 아가씨가 으레 부리는 변덕 섞인 농담이라 생각했었지만, 이제 명상하는 모습까지 보고 나니 점점 그 말이 진지하게 들리기 시작했다.

“……정말로 연무장에 가고 싶으세요?”

베티가 망설이며 되묻는 말에 샬롯이 아무렇지도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베티는 단호한 대답에 눈을 깜박였다.

샬롯은 그곳에 가면 다른 세티야 가 사람들에게 무시당한다며 근처에도 가지 않으려 했던 거다.

베티는 샬롯의 손을 쥐고 자리에서 일으켰다.

“정말로 가시겠다면 채비를 해 드릴게요. 하지만 그건 다음에 해요.”

“왜?”

“아가씨께서 오늘을 얼마나 고대하셨는데요. 그러지 마시고, 얼른 단장을 받으셔요. 저번에 주문해 둔 드레스가 도착했을 때 가봉도 하셨잖아요.”

“……아, 그거?”

샬롯은 베티가 하라는 대로 입어 봤던 붉은 색 드레스를 떠올리며 작게 한숨을 쉬었다.

역시 발 아래가 뻥 뚫려 있는데다 행동에 제약이 있는 스타일의 옷은, 예쁘긴 해도 마음이 불안했다.

하지만 드레스에 대한 생각에 이어, 황궁에 가면 드디어 요제프를 만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번뜩 들었다.

“요제프 황자!”

“……네?”

“요제프 황자 말이야. 연회에 가면 만날 수 있겠지?”

“……요, 요제프 황자님이요?”

베티는 입에 담기조차 껄끄러운 그 이름을 자꾸 연호하는 샬롯을 보며, 그녀가 언성을 높여서 말이 방 밖으로 샐까 봐 눈치를 살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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