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하지만 상대가 워낙 어리고 평소에 아무것도 할 줄 모르던 여동생이라 놀란 것뿐이지, 그렇게까지 감명받을 일도 아닌 것처럼 보였다.
다만, 이상한 것은 오히려 샬롯의 눈이었다.
그녀의 눈은 그저 고분고분하고 숙일 줄만 알던 샬롯의 눈이 아니라, 꺾일 줄 모르는 한 명의 검사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 시선이 너무 맹렬해서, 비야키는 저도 모르게 눈을 피하고 싶다는 생각까지 일순간 했다.
“그걸로 대체 뭐 대단한 증명이 된다는 거지?”
러슬이 비웃듯 중얼거리는 소리를 듣고서야, 비야키는 정신이 번뜩 들었다.
“그래, 그게 뭐 대단하다는 거지?”
비야키는 제가 저 조막만 한 계집애에게 단 한 순간이라도 얼어붙은 듯 행동한 게 수치스러워 이를 갈았다.
그가 샬롯의 멱살이라도 낚아채려는 찰나. 첫째, 아이작이 조용히 손을 들었다.
비야키가 불만스러운 눈으로 아이작을 돌아보았다.
“왜 말리십니까, 형님? 이 계집이 바락바락 덤벼드는 것 못 들으셨습니까?”
아이작은 제 동생에게 대꾸하는 대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샬롯의 앞으로 다가왔다.
‘작중 비중 있는 인물은 역시 다르긴 하네.’
매일같이 햇빛 아래에서 수련하는 사람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뽀얗고 흰 피부에 어딘가 서늘하게 느껴질 정도로 아름답게 배치된 이목구비. 늘씬하게 큰 키에, 낭창하게 마른 허리와 두꺼운 가슴.
아이작은, 깎아 만든 조각상인 양 아름다웠다. 나중에 이 가문에 피바람을 몰고 올 사람이라는 것을 몰랐다면, 샬롯이 조금쯤 넋을 놓고 감상했을지도 모를 정도로.
아이작은 제 막냇동생이 저를 올려다보는 것을 힐끗 바라보곤, 고개를 돌려 테이블 구석에 박혀 있는 포크를 들여다보았다.
“지금 세티야 가의 축복받은 일원이라면 누구나 재능으로 부여받는 오러를 입증했다는 건가?”
그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포크를 잡아당겨 보았다.
하지만 나무에 아주 단단하게 박혀 들어간 포크는 큰 힘을 주지 않으면 꿈쩍도 하지 않을 기세였다.
아이작은 작게 혀를 차곤 샬롯을 묘한 눈으로 바라봤다. 그 푹 가라앉은 푸른빛 눈에는 의혹과 호기심이 가득했다.
“도대체 이게 뭐지?”
그는 인정할 대상이 아니면 제대로 시선조차 주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 남동생과 사촌 동생은 적잖게 놀란 눈으로 아이작을 바라보았다.
“……뭔가 하나, 숨겨 둔 것은 있다 이건가?”
러슬이 아이작이 중얼거리는 말을 듣고서 기가 막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니, 형님. 그게 뭐 대단한 것도 아닌데, 그러십니까?”
아이작이 푸른 눈을 가늘게 뜨며 샬롯에게서 겨우 시선을 떼어 내 제 두 남동생을 바라보았다. 그 시선에는 차가운 비웃음이 서려 있었다.
“대단한 게 아니다…… 글쎄. 러슬. 네가 똑같은 일을 할 수 있을 것 같나?”
“……형님! 지금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십니까?”
비야키는 보잘것없는 막내 여동생 앞에서 그런 말을 들으리라곤 상상도 못 했던지라 얼굴이 짜증으로 붉으락푸르락 물들었다.
그가 짜증스레 나무 포크를 집어 들어 오러를 주입하는 순간이었다.
파삭.
당연하게도, 연약한 나무로 만들어진 포크는 응집된 기운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한 줌 가루가 되어 테이블 아래로 흩어졌다.
“……어.”
비야키가 당황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것을 본 러슬도 포크를 움켜쥐었지만, 결과는 똑같았다.
오러를 익히는 단계에서, 이미 오러를 주입해도 좋을 만한 강도의 검을 지급받아 수련해 왔던 이들이기 때문에 이런 질 낮은 소재를 다루는 것에는 서툴렀다.
러슬은 더 이상 비야키의 편을 들지 않고 당황한 표정으로 제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비야키는 러슬의 손에서 가루가 되어 버린 포크를 허무한 눈으로 내려다보다가 억지를 썼다.
“……아니, 그러니까 이게 오러가 아니라 이상한 수작을 부린 거라니까요, 형님?”
아이작이 피식 웃으며 테이블에 박힌 포크를 움켜쥔 손에 힘을 주었다.
“수작? 우리가 과연 그걸 못 알아볼까?”
그가 포크를 들어 올리자, 포크가 뽑히는 것이 아니라 테이블이 통째로 들렸다. 그러다가 테이블의 무게를 견디지 못한 포크의 목에 금이 가더니 쩍 하고 부러져 버렸다.
아이작은 점점 더 흥미롭다는 얼굴로 떨어지는 테이블을 유연하게 받쳐 내려놓곤, 샬롯을 바라보았다.
“이상할 정도로 정교하게 다룰 줄 아는군. 어디서 익힌 거지?”
샬롯은 그녀를 없는 인간인 듯 취급하기만 하던 아이작이 갑작스레 관심을 보이는 것이 탐탁잖았다. 게다가, 이상할 정도의 흥미를 보이며 눈을 반짝거리는 것은 좀 무서웠다.
뭐라고 대답할까 잠깐 망설이는데, 타이밍 좋게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똑똑똑.
“작은 주인님과 가주님께서 오십니다.”
집사의 안내와 함께 키친 메이드들이 부산스레 메인 요리를 나르기 시작했고, 하인들이 테이블의 정리를 도왔다.
로제 라구 라자냐, 신선한 여름 야채 샐러드, 해산물이 듬뿍 들어간 파스타, 과일 주스 등 음식이 서빙되는 가운데 세티야 가문의 성을 단 네 명이 서로 마주 보고 서 있는 것은 묘한 그림이었다.
그 묘한 긴장감 사이로, 아이작이 픽 웃음을 터뜨렸다.
“후후.”
그러곤 아이작은 묘한 눈으로 샬롯을 진득하게 바라보곤 지금까지 러슬이 앉아 있던 자리 쪽을 턱짓했다.
“앉지, 샬롯. 할 이야기가 많을 것 같은데.”
“형님?”
“……형님!”
위계질서에 따라 암묵적으로 정해진 자리였다.
직계 일족이 아니면 다른 식당에서 식사를 할 정도로, 그 암묵적 룰은 지금까지 엄격하게 지켜져 왔다.
그런데 다른 누구도 아닌, 반편이 샬롯에게 자리의 순번이 밀린다고?
뭐 대단한 것도 아니고, 고작 포크질 한 번에?
하지만 그런 반박을 할 겨를도 없이 아이작이 의자를 잡아당겨 주었고, 샬롯은 얼떨떨한 얼굴로 그 자리에 가서 앉았다.
“아니…… 그러니까, 지금 이게…….”
때맞춰 문을 열고 들어오던 제롬은 그 이상한 풍경을 목도하고 발을 멈췄다.
너무 이상한 걸 보면, 뇌에서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법일까?
그는 잠깐 동안 그 자리에 멈춘 채로, 멍해진 머리를 다시 제대로 작동시켜 보려 애를 썼다.
제 말조차 제대로 듣지 않는 데다, 항상 기세가 너무 흉흉한 안하무인인 것이 유일한 염려인 형의 아들 아이작이 제 막내딸의 의자를 잡아 주고 있었다.
‘게다가 저 자리는 원래 자식들 간에 정한 서열 2위의 자리잖아.’
심지어 제일 이상한 점은, 그 자리에 앉은 채로도 부담스러워하거나 달아나고 싶어하는 얼굴이 아닌 샬롯이었다.
게다가 샬롯을 시기하는 얼굴을 하고 있는 비야키와 당황한 얼굴의 러슬이라니…….
‘뭐가 이상하게 돌아간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이게 다 무슨 일이야?’
평소에 보던 구도가 완전히 반전된 채인 모습을 보고 있자니 갑자기 어지러운 기분마저 들었다.
“소란스럽구나.”
그때, 카랑카랑한 가주 카밀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일제히 모두가 하던 동작을 멈추고 인사를 올렸다.
“가주님을 뵙습니다.”
“가주님을 뵙습니다.”
누군가에겐 어머니이고, 누군가에겐 할머니였지만 세티야 가문의 가주를 향한 경의를 표하기 위해 모두들 세티야 공작을 향해 가주님이라 칭했다.
그 자리에 모인 이들을 한 바퀴 빙 둘러본 카밀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자리에 앉지.”
“네.”
제롬은 혀끝까지 올라온 이 상황에 대한 물음을 어떻게든 밀어 넣고 카밀라의 의자를 빼 주었다.
우아하게 제 자리에 착석한 카밀라는 앞뒤 잴 것 없이 본론을 꺼냈다.
“곧 칼그림자의 날이 온다.”
“드디어 오는군요.”
아이작이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
카밀라는 칼같이 친 금발 머리를 찰랑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대회가 끝나는 두 달 후에는, 여기 있는 네 명의 후계자 후보 중, 적어도 하나에서 많으면 셋까지는 함께 식사하지 못하게 되겠구나.”
때가 왔다.
서서히 후계자 후보를 좁혀 나가겠다는 선언이었다.
본래는 거의 정해져 있는 순번을 줄여 나가는 행사나 다름없기도 했으니, 별다른 긴장감은 없는 행사여야 옳았다.
아이작은 유독 신이 난 것처럼 웃으며 샬롯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달그락, 달그락.
식기가 부딪는 소리만 조용히 이어지는 식사 자리에서 아이작은 샬롯이 식사하는 풍경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바라보았다.
‘샤를로테가 원래 저렇게 재밌는 사촌 동생이었던가?’
카밀라의 앞에서는 누구나 기를 못 폈지만, 샬롯은 특히나 더 긴장하고 도망가기가 일쑤인 아이였다. 저와 다른 형제들 앞에서도 벌벌 떨기만 하는 애였으니, 더 말할 것도 없겠지.
그런데, 지금은 뻔뻔하다 못해 능청맞아 보였다.
사실 카밀라의 선언에 영향을 받아야 하는 것은, 샬롯 한 명뿐이었다.
샬롯을 내치겠다고 눈앞에서 선포한 거나 다름없었으니까.
하지만 샬롯은 이 식사 테이블에서 제일 식사를 즐기고 있는 한 사람이었다.
‘그냥 너무 어려서 이해를 못 한 건가?’
아이작이 눈을 가늘게 뜨고 테이블에 박힌 나무 포크를 바라보았다.
‘……아냐. 그럴 수는 없어.’
나무 포크는 아직도 부러진 손잡이만 덩그러니 테이블 밖으로 튀어나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