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샬롯은 해가 중천에 뜰 때까지 계속 명상을 하고서야 눈을 반짝 떴다.
자리를 정리하고 침대에서 일어나는 그 간단한 과정조차, 너무나 가뿐했고 날아갈 것 같았다.
길게 잡아야 반나절의 명상일 뿐이었는데, 고작 그걸로도 단전에 있는 기가 느껴질 정도로 기운이 모여들었다.
‘도대체 이곳의 기의 흐름은, 얼마나 짙은 거야?’
이대로라면 원래 그녀가 도달했던 경지에 다다르는 것도, 수월하게 가능할 것 같았다.
본디 깨달음을 얻는 게 어려운 법이니까.
한번 도달한 경지에 다시 가는 건 쉽다.
문제는 내공인데, 그것까지 이렇게 손쉽게 해결이 된다면…….
‘사신한테 고맙다고 해야 될지도 모르겠는데?’
어제까지만 해도 줄곧 내심 사신을 원망하던 샬롯은 처음으로 사신을 향한 감사를 떠올리며 방긋 웃었다.
워낙 이 세계의 두터운 기의 흐름에 들떠 있었기 때문에, 샬롯은 베티가 울상을 짓고 있는 줄도 몰랐다.
시녀들이 준비해 준 꽃물에 몸을 담근 샬롯의 앞으로 다가온 베티가 쩔쩔매듯 망설이며 아까 하던 말을 겨우 이었다.
“저…… 샬롯 님.”
“응?”
“가주님께서 오늘 중대 발표가 있다 하셨어요. 식당에서 다 함께 식사를 하시자고…….”
뒤로 갈수록 목소리가 기어 들어가서, 끝자락에는 모기만큼 작은 목소리가 되었다.
샬롯은 베티를 올려다보며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가면 되잖아?”
베티는 천진하게 구는 샬롯을 보니까,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서 말문이 턱 막혔다.
가주님께서 샬롯 아가씨를 만나 주시는 일도 잘 없었지만, 만약 만나게 된다면 샬롯은 진즉에 겁을 집어먹고 며칠 전부터 도망갈 방도만 궁리하곤 했던 거다.
베티의 뒤로 숨어 버린 적도 여러 번이었다.
샬롯은 당황한 듯한 베티를 보며 씩 웃어 보였다.
“너무 걱정하지 마. 뭐. 어떻게 되겠지.”
베티는 어제 이후로 완전히 달라지신 모습이 나쁘지 않으면서도, 샬롯이 더 걱정되었다. 그녀는 속으로 발을 동동 구르며 샬롯을 최대한 곱고 단정하게 꾸며 주었다.
“우와…… 우와.”
샬롯은 제 방에서 나와 별관을 지나 본관 입구에 들어간 순간부터 감탄사를 계속 흘려 댔다.
‘과연, 3대 기사단을 보유한 가문은 다르구나.’
건물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방어막이자, 거주 공간이었다.
특히 건물 본관은 으리으리하기 짝이 없었다.
금과 은을 칠한 장식이라기보다는, 실리성이 느껴지는 절제된 아름다움이 있었다.
한 층 한 층이 숨 막힐 정도로 높았고, 건물 자체를 지휘 본부로 쓸 수 있을 만큼 튼튼하고 넓었으며, 벽에 걸려 있는 장식들마저도 평범한 초상화나 조각들이 아닌 실제로 사용할 수 있을 법한 병장기들이 대부분이었다.
샬롯은 식당 입구 근처에 걸려 있는 롱소드를 보며 군침을 삼키다가, 베티에게 이끌려 겨우 식당으로 들어섰다.
“어이, 샬롯. 아직 안 죽고 살아 있냐?”
“샬롯~ 물에 빠져 죽으려고 했다던데?”
입구에 딱 들어서자마자 들려오는 소리에, 샬롯의 좋던 기분은 와장창 부서졌다.
‘어딜 가도 시비를 거는 무리가 있다니…… 이번엔 또 뭐야?’
샬롯은 눈을 가늘게 뜨고 제게 말을 걸어오는 이들을 바라보았다.
식당에는 그녀보다 먼저 온 세 명의 청년이 앉아 있었다.
세티야 가의 심장부인 본관 식당에 나란히 앉아 있는 세 명이 누구인지는 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알 만했다.
‘안 봐도 사촌 오라버니 둘과 샬롯의 오빠인가 본데.’
샬롯의 아버지, 제롬의 형이 남긴 두 명의 아들. 아이작과 비야키.
가문의 수장이 되는 아이작. 셋 중에 가장 구석에 앉아 책을 읽고 있는 모습만 봐도 피에 얼음이 흐른다는 묘사가 이해되었다.
눈에 거슬리는 누구라도 죽여 버릴 듯한 기세였다.
까불기를 좋아하는 속검의 대가, 비야키. 허리에 닿게 기른 백금발을 하나로 땋아 묶고 있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샬롯의 오빠인 러슬, 호전적이고 덩치가 크며 무거운 검을 쓴다.
백금발을 한 세 명은 서로 꼭 닮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상한 소리를 지껄이지만 않았어도, 호감을 가지고 볼 수 있을 정도로 퍽 수려한 외모를 하고 있었다.
얼굴도 남자답고 수려했지만, 볼만한 것은 떡 벌어진 어깨와 두꺼운 겨울옷으로도 가릴 수 없는 근육이었다. 셋 중 가장 마른 비야키마저도 꽤 근육이 탄탄했다.
‘근육은 부럽지만 저 오라버니들의 성질머리는 최악이군.’
샬롯은 그들을 한번 훑어보고선 제 자리로 보이는 가장 구석에 있는 아이용 의자로 다가갔다.
그녀의 태도를 본 비야키가 피식 웃었다.
“와, 가주님이 여기로 오란다고 온 것 좀 봐. 미안하지만 우린 같이 이야기나 나눌 생각이 없는데.”
러슬도 비야키의 말에 동조하듯 몸을 뒤로 젖혔다.
비야키가 입술을 비틀며 한마디를 더했다.
“감히 오늘은 우리 식탁에 합석할 생각이 들었어? 그간 간이 부었나?”
점점 심해지는 말을 참지 못해 샬롯이 눈살을 팍 찌푸리는 순간, 비야키가 그녀의 앞으로 빵을 집어던졌다.
툭.
흰 빵 조각이 바닥에 떨어졌다.
“그냥 거기서 먹지 그래.”
제 앞의 바닥에 빵이 떨어진 걸 빤히 바라본 샬롯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그들을 다시 바라보았다.
제게 관심이 없는 것도 상관없었고, 얕잡아 보는 것도 상관없었다.
하지만 제게 함부로 대하는 건 다른 문제다.
“제가…… 뭘 잘못했습니까? 이러는 이유가 뭡니까?”
샬롯이 언제나처럼 꼬리를 말고 베티의 뒤에 숨지도 않고, 도망가지도 않는 꼴이 신기했는지 러슬이 신기하다는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비야키가 거기에 비웃음을 더했다.
“몰라서 물어? 세티야 가문이라면 누구나 검에 오러를 두를 줄 알지. 다섯 살짜리도 할 줄 알아. 그게 세티야 가문이고, 그게 재능이라는 거다. 그런데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네가 세티야 가의 이름을 달고 다니는 게 얼마나 수치겠냐, 우리한테?”
샬롯은 짜증을 섞어 나이 차이도 퍽 나는 제 오라버니들을 노려보았다.
‘그래서 어쩌라고?’
정중하게 말로 대화했으면, 또 모를까. 사람을 이렇게 비참한 상황에 처하게 만들 필요가 있나.
샬롯은 관자놀이를 누르며 되받아쳤다.
“고작 아홉 살짜리에게 이렇게 한심하게 굴 정도의 인성이, 세티야 가문이라는 겁니까?”
그녀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순식간에 공기가 싸늘하게 얼었다.
세티야 가 사람들에게는 누가 후계자가 될지가 초미의 관심사였다. 당연히 일상에서도 서로 기 싸움을 하는 것이 예사였다.
서열 다툼을 할 축에도 못 끼는 고작 샬롯 따위에게 그런 말을 듣고 넘어갈 리가 없었다.
드르륵.
러슬이 턱을 괴고 샬롯을 노려보았고, 비야키가 히죽 웃으며 의자를 밀고 일어났다.
“저걸 어떻게 다스려야, 시건방진 입을 다물게 할 수 있을까?”
남들보다 덩치가 두 배는 되어 보이는 러슬과 비야키가 저를 노려보는 것을 보며, 샬롯은 소설 속 문구를 떠올렸다.
‘샬롯은 세티야 가 사촌 오빠와 방계 친척들에게 종종 뺨을 맞기도 했다.’
교육이라는 명목이겠지.
샬롯은 아직 제 실력을 완전하게 되찾지도 못했지만, 이 상황을 피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아홉 살짜리 동생을 훈육하는 데 폭력을 사용하다니.
아니, 훈육도 아니지.
‘성질머리를 뜯어고쳐야 할 사람은 내가 아니라, 저 오라버니들이야.’
샬롯은 눈을 부릅뜨고 쏘아붙였다.
“지금…… 내가 시건방지다고 했습니까?”
“요즘 네가 안 맞긴 했구나, 샬롯.”
비야키는 제가 일어났는데도 겁을 집어먹지 않는 샬롯이 의아하면서도, 그 모습이 짜증 나서 언제나처럼 오른손을 치켜들었다.
샬롯은 비야키의 손이 제게 천천히 떨어지는 것을 비웃으며 왼쪽으로 딱 반걸음을 옮겨 섰다.
샬롯이 움직이는 것을 모르지 않았는데도, 비야키는 샬롯의 얼굴을 때리지 못하고 허공을 향해 헛손질을 했다.
“뭐냐, 비야키. 지금…… 샬롯을 상대로 헛방을 날린 거야?”
러슬의 황당함 섞인 비웃음에 비야키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샬롯을 상대로 헛손질을 하다니.
기사단의 누구라도 들으면 비야키를 비웃을 일이긴 했다.
“……이게 진짜! 보자 보자 하니까!”
비야키가 다시 한번 손을 치켜드는 순간, 샬롯은 평온한 얼굴로 테이블 위에서 포크를 집어 들었다.
당장 단전에 있는 조금의 내공으로 대단한 전투를 할 수는 없겠지만, 워낙 한번 도달했던 경지가 높았기에 기를 세밀하게 운용하는 것에는 자신이 있었다.
‘지금 필요한 건 실력 행세야. 나를 건드리지 못하게 할.’
아직 혈도가 제대로 개방되지 않았지만, 일반인에게도 기가 흐르는 길은 있었다.
샬롯은 기운을 끌어올려 손으로 그것을 발현했다. 그러곤 나무 포크에 그것을 둘렀다.
푹.
포크는 아무런 마찰음도 없이, 부드럽게 테이블에 꽂혀 들어갔다. 마치, 부드러운 빵에 박히듯이.
그 일련의 행동은 너무나도 빨라서, 러슬이 채 들어 올린 손을 내려칠 시간조차 없었다.
“다음번에 이 포크가 어디에 박힐지, 똑바로 생각하고 행동하십시오.”
샬롯은 조막만 한 손으로 포크 손잡이를 천천히 놓으며, 러슬을 똑바로 쏘아보았다.
“……?”
나무에 나무를 박아넣는다고?
러슬은 나무 탁자에 박혀 있는 포크 손잡이를 멍하니 보고, 제 동생에게 시선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