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파 공녀님 (9)화 (9/123)

#9.

세티야 공작가의 회의실.

세티야 공작이자 샬롯의 할머니인 카밀라 세티야는 이른 아침부터 제 아들인 제롬을 독대하고 있었다.

그녀는 누가 봐도 손자와 손녀가 있는 할머니라고는 보이지 않는 여인이었다.

백금발 머리칼을 짧게 자른 그녀의 피부는 고작해야 40대처럼 보였다. 으레 다른 사람을 앞에 둔 사람이 짓곤 하는 의례적인 미소마저 띠지 않은 얼굴은 아름답다기보단 멋있다는 수식어가 잘 어울렸다.

그녀야말로 ‘검의 나라’라고 불리는 체이커 국에서도 가장 강한 인물 3인에 손꼽히는 세티야 가문의 가주였다.

“요즘 주변국의 정세가 영 소란스럽구나.”

“그렇습니다, 가주님.”

카밀라가 긴 테이블 반대편에 앉아 있는 제 아들을 턱 끝으로 쏘아보았다.

“그런데 너는, 네 자식 하나를 제대로 단속하지 못해서 요란을 떨어?”

“……그것이…….”

제롬은 샬롯이 어제는 이상하게 순순하게 굴었던 것을 떠올리며, 카밀라에게 변명을 하려다가 그만두었다.

카밀라는 아들인 저마저도 필요에 의해 기용하고 버릴 사람이었다.

그 차가움과 계산적인 면모는 가주로서는 분명 탁월한 성정이었다. 그녀의 철저한 객관적인 판단은 항상 빛을 발해 왔다.

하지만 그럴수록 아무런 재주도 없는 샬롯은, 카밀라의 눈에는 없는 이나 다름없었다.

샬롯의 자살 소동에 대해 괜한 변명을 늘어놓을 필요는 없을 거다.

“죄송합니다.”

“네게 샤를로테를 돌보지 못해 죄송하다는 말을 듣는 것도, 이제는 하루의 일과구나. 하지만 3황자와 쓸데없이 얽혔다는 이야기를 듣는 건 나는 사절이다.”

“……죄송합니다.”

카밀라가 귀찮다는 듯 혀를 차며 서류를 뒤적이다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 고개를 들어 창밖을 바라보았다.

하늘에 비스듬하게 걸려 있는 낮달을 보던 그녀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러고 보니 곧 칼그림자의 날이구나.”

“아…… 벌써 그렇게 되었군요.”

“언제까지 네 핏줄이라고 해서 재능도 없는 아이를 품고 있을 셈이냐?”

칼그림자의 날은, 달이 해와 겹치는 날이다.

그날에는 전통적으로 각 가문에서 그간 키워 온 후계자들을 내보내 실력을 뽐내는 대련 대회가 열린다.

제롬은 머릿속으로 대회에 내보낼 인선을 떠올리다가, 샬롯의 얼굴이 떠오르자 저도 모르게 대답이 빠르게 나오지 않았다.

“우리 가문에서는 대회에 다섯만 출전시키겠다. 거기에 해당되지 않는 이는, 따로 영지를 주어 한적한 곳에서 자유로이 지내게 하거나 결혼을 시켜 출가시키는 게 좋겠다.”

직계와 방계를 합쳐, 지금 세티야 가문의 성을 받은 아이들은 총 여덟.

그중에서 다섯만 출전시키고 나머지를 쳐 내겠다는 이야기는, 샬롯을 내치겠다는 이야기임을 모르지 않았다.

재능이 모자란 두 아이도 함께.

제롬은 카밀라의 제안이 이상할 것도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까지와는 달리, 묘하게 대답이 쉬이 나오지 않았다.

뭔가, 마음에 걸리는 구석이 있었다.

어제 이후로.

그가 빨리 대답하지 않고 생각에 잠겨 있자, 카밀라가 그에게 쏘아붙이듯 말을 걸었다.

“왜 그러지? 설마 부정이라도 샘솟은 게냐?”

제롬은 고개를 들어 제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가주의 보랏빛 눈동자는, 제 어머니임에도 도저히 똑바로 마주보기 어려운 안광이 서려 있었다.

제롬은 언제나 그래 왔듯이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분부하신 대로 처리하겠습니다.”

짹짹짹.

유모, 베티는 잠겨 있던 문을 열고 들어서면서 방에서 묘한 꽃내음이 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녀가 본 것은 침대 위에서 자색으로 반짝이는 아우라를 풍기고 있는 샬롯이었다.

“……아가씨?”

그녀는 듣도 보도 못한 광경에 놀라긴 했지만, 샬롯에게 나쁜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자색 기운은 어쩐지 신성하게까지 느껴졌고, 샬롯의 얼굴이 전에 없이 평온해 보였던 것이다.

심지어 묘한 꽃향기 같은 게 코끝을 스친 것 같았다. 하지만 너무 미약해서 언뜻 맡은 듯하고 정신을 차려 보니 아무런 냄새도 나지 않았다.

‘자리에 앉아 계신 걸 보니, 주무시는 듯도 했지만 깨어 계신 듯도 하고…… 깨워야 하나?’

샬롯이 앉아서 조는 걸까 해서 그녀를 깨우려고 다가가는데, 샬롯의 발치에 큼지막한 종이가 놓인 것이 눈에 들어왔다.

[내가 깨어나기 전까지 몸에 손대지 마. 절대로.]

얼핏 이해하기 힘든 말이었다.

가만히 그것을 보고 있자니, 뒤에서 다른 목소리가 베티를 붙들었다.

“그냥 두거라.”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니 열린 문 사이로 제롬 님이 서 계셨다.

‘이렇게 이른 아침부터 어쩐 일이시지?’

베티는 놀라움을 숨기지 못하고 눈을 휘둥그레 뜨면서 몸을 푹 숙였다.

“작은 주인님, 오셨습니까?”

제롬은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이곤 샬롯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회의를 마치자마자 제 딸을 찾은 것은, 어째서인지 곧 다가올 세티야 가의 무도대회 후보 선정에 대한 이야기를 직접 해 주고 싶어서였다.

그런데, 근신 명령을 어기고 방에서 나가 버렸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제 딸은 상상하지도 못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지금 샬롯이 명상을 하고 있는 건가?”

키위나무에 새가 열리기라도 했다는 듯한 당황스러운 말투는 대답을 바라는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그는 혼자 중얼거리며 땀을 뻘뻘 흘리는 샬롯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베티는 한참 동안 비키지 않고 멍하니 서 있는 작은 주인님의 등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거기에 버티고 서 계시니 아가씨를 돌봐 드릴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해서 방에서 나가 버리기도 애매했다.

제롬이 샬롯의 방에 직접 찾아온 것은 기억도 나지 않을 만큼 까마득한 옛날에나 있었던 일이었다. 그것도 야단을 치러 왔던 게 전부였다.

이곳은 저택의 별관에서도 가장 구석진 곳에 있는 방이니만큼, 일부러 들르지 않는 이상 올 수 없는 곳이다.

‘그런데 굳이 새벽같이 찾아오셔서 이렇게 길게 머무르시다니…….’

차라리 모르는 사이가 더 친근하지 않을까 싶던 부녀였는데,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걸까?

의식이 있을 때도, 십 분 이상을 제대로 이야기를 나눈 적이라곤 없는데 말이다.

‘정말이지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건지 모르겠네.’

베티는 문간에서 팔짱을 끼고 제 딸을 한참 바라보는 제롬에게 의자를 가져다주고서 조용히 방을 빠져나갔다.

제롬은 평화롭다 못해 행복한 표정을 한 제 딸을 빤히 바라보았다.

‘검을 닦는 자라면 누구나 마음도 닦아야 한다고, 명상을 가르칠 때만 해도 저 아이가 정말 하리라곤 생각하지 못했는데.’

아무리 봐도, 그냥 대충하는 척하는 게 아니었다.

신관이라 해도 그리 오래 명상은 못 할 터였으니까.

그는 해가 천궁 세 번째 자리에 걸리는 것을 바라보곤 한숨을 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해치워야 할 일과가 그를 기다리고 있으니, 이제는 더 이상 여기에서 시간을 지체하고 있을 수 없었다.

호위에게 샬롯을 맡기고 자리를 떠난 그의 머릿속은 정말 말 그대로 혼란으로 가득 차 있었다.

‘들어 본 적도 없어. 저렇게 오래 명상하는 아이가 있다는 이야기는.’

게다가 고작 아홉 살.

한시도 가만히 있질 못하는 제 딸에게 어디 해당이나 될 이야기냔 말이다.

그건 정말 대단한 일이었다.

제롬이 복잡한 머리를 정리하지 못하고 멍하니 눈앞의 덤불만 쏘아보고 있는데, 그를 찾아오고 있던 레이트가 제롬의 앞에 멈춰 섰다.

“여기 계셨군요. 한참 찾았습니다.”

제롬은 그제야 정신이 들어 고개를 들었다.

“아, 미안하군. 회의 시간에 늦었나?”

“다행히 손님께서도 늦으셔서 괜찮습니다만, 무슨 생각을 그리하고 계셨습니까?”

“아니네. 그보다 어제 내가 조사해 달라 한 것은 어찌 됐지?”

제롬의 비서, 레이트는 그 질문에 답지 않게 잠깐 망설이며 안경 다리를 만지작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실은…… 좀 독특한 이야기가 있긴 했습니다.”

“뭐?”

“란슬롯 도련님을 비롯한 놀이 친구분들께선 별다른 일 없이 샬롯 아가씨께서 평소처럼 말썽을 부렸다 하셨습니다만…… 그중에 좀 특이한 말씀이 섞여 있었습니다.”

“뭐지?”

“그게…… 란슬롯 도련님께서 던진 돌을, 샬롯 아가씨께서 뒤돌아선 채로 잡으셨다고요. 그리고 돌을 가루로 만들어 버리셨다 합니다.”

제롬은 얼굴을 있는 대로 찌푸렸다.

“어린애들 장난을 듣고 와서 내게 보고하는 건가?”

레이트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하인 두 명의 증언도 같았습니다.”

“……뭐?”

제롬의 얼굴이 그제야 이상하게 구겨졌다.

마치 신화에 나오는 이야기를 듣는 기분이었다.

제 막내딸에 대해서라면 분명히 잘 알고 있었다.

아니, 그렇다고 생각했었다.

검술이니 수련이니 하는 것과는 분명 아무런 상관도 없는, 곧 가문에서 퇴출되듯 쫓겨나면 그만인 아이였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그는 회의에 참석해야 한다는 것조차 잊고 한참을 멍하니 생각에 잠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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