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요제프의 텅 빈 까만 눈동자에는 아픔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무감각해질 정도로 오랜 괴롭힘에 시달린 거겠지.
‘……요제프 황자가 왜 모든 황족을 학살했는지, 민생을 안정시키자마자 권력에 미련조차 없다는 듯 권력을 다른 이에게 이양해 버렸는지 이젠 알겠네.’
샬롯은 쓰게 미소지었다.
저렇게까지 고통받고 있는데, 요제프가 황위에 올라서 정상적으로 국정을 운영하면 그게 더 이상한 거 아닌가?
요제프를 떠올리자, 가슴이 시큰하게 시렸다.
‘오늘 딱 한 번 마주친 게 단데…… 이상할 정도로 신경 쓰여.’
누군가를 보살펴 주고 싶다고 이렇게까지 생각한 건 처음이었다.
제가 좋아하는 소설의 주인공이라서?
‘아니, 아마도 전생의 나와 닮아서.’
샬롯은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상대는 저에 대해서 잘 모르겠지만, 그녀는 요제프 황자에 대해 정말 잘 알았다.
물론 소설 속 남자주인공인 요제프에 대해서였지만.
괜히 아는 사람의 어린 시절이 불행한 모습을 보고 싶지가 않았다. 되도록 현재 상황을 개선해 주고 싶었다.
‘……그리고 당장 내 앞가림도 어떻게든 해야 하고.’
“어디 보자.”
샬롯은 여기저기를 둘러보다 문득 책상 위에 놓인 종이와 펜을 발견했다.
붓이 아닌 것으로 글씨를 쓰려니 처음엔 좀 당황스러웠지만, 몇 번 만지작거리는 사이에 원리를 아는 것은 간단했다. 잉크를 찍어 글씨를 쓰는 건 확실히 편리했다.
“대충, 얼마나 망한 세계인지 정리나 해 볼까?”
그녀는 먹을 갈지 않아도 된다는 것에 수시로 감탄을 해 가며, 매일매일 제가 병상에서 들었던 이야기를 종이에 써 내려갔다.
툭 치면 쓰러질 것 같은 휘청휘청한 나라 이야기를.
큰 뼈대를 따라 사건들을 대충 기록한 샬롯은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줄거리를 보면 볼수록, 제 인생은 망했다.
일단 아이작이 세티야 가 가주가 된 뒤 세티야 가 이름을 단 자들을 지독하게 숙청하는 데에서, 제가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
몇은 그냥 쫓겨나고 말았지만, 몇은 목숨을 잃을 때까지 전장으로 떠밀려 나간다.
직접 손을 쓰지 않았다 뿐이지, 그가 직접 죽인 거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자세한 배경 묘사가 나오지는 않았기 때문에 정확한 이유는 모를 일이지만, 아이작이 실력에 굉장히 집착하는 것만은 틀림없었다.
‘게다가 만약 거기에서 제대로 살아남았다고 쳐.’
그다음에는 산 넘어 산이라고 2황자의 취임 이후 체이커 국이 지옥으로 변한 다음, 국력을 회복하지 못한 결과 요제프 황자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적국에게 집어삼켜지게 된다.
전쟁터에서 아이와 여자는 원래 썩 행복하기 힘든 법인데, 그녀는 그 둘에 모두 해당됐으니 걱정이 앞설만도 했다.
게다가 어중간하게 잘난 가문의 소속이라는 점에서 더 큰 문제였다. 포로가 되기에도 좋고, 전리품이 되기에도 좋았으니까.
‘……사신에게 고마워하기는 틀렸다니까.’
제 한 몸 챙기기도 쉽지가 않다, 정말.
이 와중에 요제프 황자까지 챙기는 게 정말 잘하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싶을 정도로.
‘요제프가 처음부터 황제가 되면 체이커 국에도, 내 생존에도 그만큼 좋은 일이 없을 텐데…… 지금 분위기로 봐서는 그게 절대 불가능할 것 같단 말이지.’
멍하니 줄거리를 구경하던 그녀는 벌떡 일어나 거울 앞에 섰다.
분홍색 머리카락이 허리까지 내려오는 아홉 살의 작고 귀여운 여자아이를 보고 있는 동안, 샬롯은 제 얼굴과 꽤 닮은 제롬의 얼굴을 무심코 떠올렸다.
하지만 아빠의 얼굴을 떠올린 것치곤 마음이 포근해지지 않았다.
‘……부모님이 있어도, 크게 다른 건 없네.’
샬롯의 입술이 악다물어졌다.
뭔가 대단한 걸 바라진 않는다 생각했는데, 그래도 저도 모르게 울타리가 되어 줄지도 모른다고 기대했을까?
정말 도움이라곤 되지 않는 그 아버지를 보고 나니까 가슴 속이 괜히 더 헛헛해지는 것 같았다.
‘이런 생각이나 하는 건, 내가 약해서야. 마음이 약해지는 건, 몸이 약해서야.’
샬롯은 도리질을 쳤다.
‘괜한 기대를 하면, 남는 건 실망뿐이야. 원래 나는 그렇게 살아왔잖아. 어디에도 기대지 말고, 내가 강해져야 해.’
그녀는 부드럽기만 한 손바닥으로 거울 너머의 제 손에 손을 겹쳤다.
손바닥으로 쨍한 차가운 유리의 감촉이 전해져 왔다.
거울 너머에서 사탕 같은 분홍색 머리의 여자아이가 자신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제가 잘 아는 눈빛을 한, 낯선 얼굴의 앳된 아이가.
‘……아냐. 정말로 이번에도, 어디에도 기대지 않고 살 거야? 그게 정말 내 진심이야?’
샬롯은 눈을 길게 감았다 떴다.
그렇게 살고 싶어서 그렇게 산 게 아니었다. 기댈 곳이 없었다.
마치, 지금의 요제프의 삶이 그렇듯.
한 번의 생을 살아 봤더니 인생을 어떻게 살지를 정하는 게 정말 중요한 문제였다.
강해지고 싶었지만, 그냥 그것만을 목표로 한 제 지난 삶은 허망하디 허망하게 끝이 났다.
혼자서 앞만 보고 살다가 거꾸러진 삶은, 솔직히 보람차다고 하긴 어려웠다.
사신을 붙들고 억울함을 호소해야 했을 정도로.
“이번에는, 어떻게 할래?”
샬롯은 저도 모르게 거울에 대고 소리 내어 말했다.
외견이 ‘도화’가 아니라 ‘샬롯’이라 그런지, 거울 속의 저 어린 소녀를 행복하게 해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장 먼저, 강해지고 싶어.’
무림인이 강해지기로 마음먹는 이유는 각자 다를 거다.
하지만 자신의 목숨까지 내걸면서 강함만을 쫓는 이유는, 그냥 그게 좋아서였다.
하지만 이번 생에는, 조금 더…… 기대고 싶었다. 그리고 남이 제게 기대게 하고 싶었다. 그렇게 살고 싶었다.
강해지는 것 외에도, 주변을 둘러보는 법을 배우고 싶었다.
베티의 존재가, 요제프의 존재가 제게 주는 의미는 컸다. 어찌 됐건 아버지도 있었고, 오빠도 있다는 것도 얼마나 소중한지 몰랐다.
전생처럼 혼자만 생각하며 살 필요는 없었다.
강해진다는 것의 의미도 그저 무림에서 최고의 강자가 되고 싶다는 게 아니라…….
‘이젠, 내 사람을 지키면서 행복하게 살고 싶어. 그러고 싶어.’
그게 과한 욕심이라는 건 안다.
그냥 강해지는 것도 쉽지 않은데, 제 한 몸을 지키기도 쉽지 않은 설정투성이인데, 누군가를 지키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는 게.
“할 수 있어.”
그녀는 입을 움직여 작게, 소곤소곤 말했다.
소리를 내어 말한다는 것에는 묘한 힘이 있었다.
거울 속의 샬롯이 제게 말해 주는 듯했다.
누군가에게 기대고 싶은 것은, 제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었지만……. 적어도 다른 사람이 제게 기대게 하는 것은 할 수 있으리라.
마음을 그렇게 먹고 나자, 막연히 이렇게 힘든 생을 살게 되었다니 하고 생각할 때보다 훨씬 기분이 산뜻했다.
샬롯은 정적뿐인 새벽의 공기를 깊게 들이마시곤 히죽 웃었다.
몸이 어려졌고, 세계가 바뀌었어도 상관없었다.
그래, 이번에는 즐겁게 살고 싶었다.
그래서 이번 생은, 생이 끝나는 순간에는 즐거웠다고 생각하는 장면들을 되새기고 싶었다.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을 되새기고 싶었다.
‘지금이라면…… 집중이 잘될 것 같은데.’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
마음이 차분해진 순간이 가장 명상이 잘 된다.
샬롯은 고개를 끄덕이고서는 방문을 걸어 잠그고 침대 위에 앉았다.
아홉 해를 살아온 샬롯의 몸은, 가부좌를 어색하게 틀었다.
양 발바닥이 모두 하늘을 향한 자세를 한 채로, 그녀는 가볍게 눈을 감았다.
오늘 하루 중 가장 고대했던 순간이었다.
일 년 동안 아무것도 못 하고 꼼짝없이 누워 의미 없이 무공 비급의 구결만 줄줄 읊던 그 모든 시간이 지금을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그 지겨운 시간 동안 깨달았던 것들이 다 필요 없이 사라져 버리지 않으리라는 기대가 얼마나 행복한 것인지, 아무도 모를 거다.
샬롯은 자두만 한 제 양손을 무릎 위에 가지런히 올렸다.
그리고 긴 속눈썹을 내려 감고 제 내면의 상태를 느끼며 천천히 명상 속으로 의식을 밀어 넣었다.
아무런 수련도 하지 않은 부드러운 손과 발을 느꼈을 때 예감은 했지만, 몸속에는 허허로운 기운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기가 흐르는 길이 막혀 있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단전에 정신을 집중해 보았지만 허전할 뿐, 무엇도 하나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도 좋았다.
아직 몸속에 자리 잡고 있는 기가 흐르는 길을 따라 한 바퀴 기를 회전시키는 일주천조차 할 수 없는 상태였지만, 그게 뭐 어떻단 말인가.
‘그건 행운이지.’
그리고 또 하나의 행운이 있었다.
‘……어라?’
가부좌를 틀고 한참을 멍하니 앉아 있던 그녀는 제가 물에 푹 빠져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이게 뭐지?’
처음에는 숨을 쉬기가 답답할 정도로 짙은 그 공기가, 워낙 심법 수련 자체를 오랜만에 해 봐서 그렇게 느껴지는 줄 알았지만…….
차츰 심법을 따라 숨을 내쉬고 뱉음에 따라, 이곳의 공기가 무림보다 훨씬 더 기의 밀도가 짙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생각보다 훨씬 빠른 성취가 가능할지도 몰라.’
샬롯의 마음속이 환희로 가득 차올랐다.
몸 상태를 체크할 겸, 잠깐만 운기조식을 해 보려던 마음 같은 것은 어느새 뒷전으로 밀려나 있었다.
샬롯은 저도 모르게 자꾸만 입꼬리가 올라갈 것 같은 기분을 억누르며, 상념들을 덜어 내고 마음속을 비웠다.
샬롯의 몸은 말 그대로 순수 그 자체였다.
재능이 없을뿐더러 노력할 의지조차 없었던 샬롯의 몸은, 내공도 외공도 조금도 수련되어 있지 않은 상태였다.
차라리 백지인 것이 좋다.
다른 심법을 익히던 몸에 제가 아는 화산파의 구결을 적용시키는 것은 오히려 더 힘들다.
기를 쌓는다는 것은 크게 두 가지 경로를 통한다.
일단, 운기조식이라는 호흡법을 통해 세상과 자신을 연결하며 몸속으로 기를 쌓는 거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기운이 쌓이면 몸속에 나 있는 길을 통해 제가 아는 구결대로 운용하여 진기를 쌓는 것을 운기행공이라고 한다.
흔히 말하는 무림 고수가 되기 위해서 소주천, 대주천을 하면서 몸속 혈도를 뚫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하지만 이것을 하기 위해서는 일단 어마어마한 양의 기운을 먼저 쌓을 필요가 있었다.
아무리 대단한 깨달음이 있다 해도, 파도가 없으면 둑을 뚫을 수 없는 법이니까.
하지만, 여기에는 제가 들이마시고 들이마셔도 남을 만큼의 짙은 기가 있었다.
‘……금방이야. 금방, 내가 원래 있던 경지…… 아니, 그것을 훨씬 뛰어넘을 수 있어.’
샬롯의 심장이 콩닥콩닥 뛰었다.
‘……날아갈 것같이 개운해.’
그녀는 아주 오래 명상에 잠긴 뒤에야 천천히 눈꺼풀을 밀어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