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샬롯은 길게 한숨을 쉬며 침대에 두 다리와 두 팔을 내동댕이치고 드러누웠다.
고개를 돌려 바라본 창밖에는 아직도 해가 쨍쨍했다.
‘너무 많은 일이 있어서, 몇 시진은 지난 줄 알았네.’
그녀는 천천히 제 방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
세티야 공작가의 명성에 어울리지 않게 제 방은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무림의 세계에서도 썩 부유한 생활을 해 보지도 못한 도화였지만, 보는 눈이 없진 않았다.
화산파가 위치한 연화봉은 시일이 지날수록 무를 수련하는 도사들끼리 모여 사는 곳치고는 꽤 번화되어 갔다. 점점 세를 불리면서 드나드는 장사치도 많았고, 공간도 점점 사치스레 꾸며졌었다.
비단, 옥, 자개장, 비녀…….
그런 화려한 것들이 즐비했다.
물론 이 책 속의 세상은 자신이 살던 무림과는 전혀 다르게 생겼고, 옷차림부터 시작해서 머리색까지 모두 달랐다. 그러니 방의 꾸밈새도 당연히 다르겠지.
‘하지만 눈이 달렸으면 이 꼴을 보고 공작가 작은 주인님의 막내딸의 방이라곤 못 할 것 같은데.’
그녀는 바람이 휑하게 들어오는 옥탑방 안의 모습을 빙 둘러보곤 실소를 흘렸다.
샬롯의 방에는 여기까지 올라오면서 봤던 그 화려한 복도와 방들의 장식은 다 어디 가고, 액자 하나 제대로 걸려 있지 않았다.
그나마 하나 있는 장식은, 그녀가 제대로 쓰지 못할 거대한 검 장식뿐이었다.
‘놀리는 것도 아니고.’
그녀는 입술을 비틀며 방 안을 더 둘러보았다.
입고 나가는 드레스나 치장품 같은 것들은 값진 것들이 많았지만, 그냥 그게 다였다.
손을 들어 테이블 위를 훑어보자 손가락에 먼지가 가득 묻어났다.
하녀들에게도 무시를 당하는 게 틀림없었다.
‘얼마나 대접받지 못하고 사는 거야?’
샬롯은 세티야 공작가의 후계자들에게 발현되는 재능의 싹이 보이지 않을 때부터 아예 없는 사람 취급을 당했다. 반편이라고 불리는 것도 그래서였다.
‘재능 좀 없다고 사람을 이렇게까지 심하게 대하는데…… 샬롯 성격이 비뚤어지고 말썽쟁이가 되는 건 당연한 거 아냐?’
그녀는 어깨를 으쓱하며 방 안을 더 둘러보았다.
예상대로 구석에 처박힌 목검과 무복 한 벌이 전부로, 쓸 만한 검이나 무기는 하나도 찾아볼 수 없었다.
도대체 어떻게 이 상황을 개선해 볼 수 있을까, 멍하니 생각하고 있는 와중이었다.
똑똑똑.
큰 노크 소리가 들렸다.
“네, 들어오세요.”
샬롯이 대답하자, 시녀 세 명이 함께 들어왔다.
그들 중 둘은 식사를 끌고 들어왔고, 제일 키가 작고 앳되어 보이는 시녀는 샬롯에게 가까이 다가와 옷차림을 정리해 주었다.
“의원님들께서 다녀가셨는데, 어디 아픈 데는 없다고 하셨나요? 물에는 어쩌다 빠지셨어요? 지금은 어디 춥진 않으세요?”
샬롯은 제게 부드럽게 말을 건네는 그 시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부드러워 보이는 갈색 머리를 짧은 꽁지로 묶어 올린 그 시녀가 저를 바라보는 시선이 어딘가 익숙지 않았다.
“왜 그러세요, 샬롯 님?”
샬롯은 그녀를 빤히 올려다보며 물었다.
“이름이 뭐지?”
“네?”
“이름.”
“아, 저…… 베티잖아요. 왜 그러세요?”
‘아, 베티.’
샬롯은 베티의 뒤로 다른 두 시녀가 인사도 하는 둥 마는 둥 하고 식사 준비만 후다닥 마치곤 성의 없이 사라지는 것을 한눈으로 보며 속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베티는 유모였다.
아마, 이곳에서 거의 유일하게 샬롯을 걱정하는 존재일 것이다.
‘하지만 샬롯은 한 번도 베티에게 잘해 준 적이 없어.’
샬롯은 천천히 눈을 깜박이며 베티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그녀는 가진 것이 없을 때 사람들이 어떻게 제게 대하는지를 너무 잘 알았다.
실력이 나쁠 때는 무시하는 게 당연했다. 실력이 좋아도, 산 정상에서 밀어 버릴 정도로 시기하기만 했다.
그런 와중에 제게 끝까지 소중히 대해 주는 인연이 있다면, 그건 정말 소중한 것이리라.
샬롯은 베티의 손을 꼭 쥐었다.
“베티.”
“네?”
“내가 받은 은혜는 아니지만, 네겐 꼭 갚을게.”
“……네?”
“호사도 시켜 줄 테니까, 좀만 기다려.”
베티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네? 네?”
호사라니.
샬롯 그 자신도 이렇게 무시당하고 살면서.
베티는 앞뒤가 맞지 않는 샬롯의 말에 감동하기보다는 그저 당황해서 제가 모시는 아가씨를 바라보았다.
샬롯이 베티의 손을 쥐려 하자, 베티가 저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
샬롯은 무리하게 다시 손을 내미는 대신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리고 앞으로 내가 네게 함부로 대하는 일은 없을 거야.”
“……그게 어떤…….”
“내가 할 수 있는 한 처우도 개선해 줄 거고, 네 아버지의 약값도 돌봐 줄게.”
부리는 일꾼은 정말 조약돌처럼만 보던 샬롯이 베티의 아버지가 있다는 사실조차 알고 있을 턱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베티가 너무 놀라 멈춰 서 있었지만 샬롯은 그게 할 말이 끝인지 제 앞에 놓인 식사를 앞으로 끌어당겨 그릇 뚜껑을 열어 보기 바빴다.
베티는 너무 당황해서 식사 시중을 들 생각도 못 하고 멍하니 아가씨를 바라보았다.
샬롯 아가씨는 남들에게 조금이라도 돋보이려고 항상 전전긍긍했고, 가주님이나 작은 주인님을 만나기라도 하는 날에는 하루 종일 풀이 죽어서 옷장에 틀어박히기 일쑤였다.
게다가 최근에는 놀이 친구분들을 만나고 오시는 날이면 얼마나 분이 쌓여서 오시는지, 돌아오면 그 분을 죄 아랫사람들에게 풀어놓곤 했다.
베티도 몇 번이고 패악질을 당한 적이 있었다. 눈앞에 보이는 쿠션이고 베개를 마구 집어던지고, 바닥에 드러누워 꼼짝도 안 하고 고함을 지르는 건 거의 예삿일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정말 이상하셨다.
작은 주인님을 만나고 오셨는데도, 이렇게나 기분이 좋으시고…… 마치 다른 사람처럼 부드럽게 말을 건넨다.
마치, 동등한 위치에 있는 사람을 상대하듯이.
“이건 어떻게 먹지?”
“……네?”
익힌 야채 볶음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샬롯을 보고, 베티가 깜짝 놀라 그녀의 옆에 앉았다.
“이걸 드시게요?”
“그럼. 왜?”
“야채를 평소에 워낙 싫어하셔서…….”
샬롯은 이상한 소리를 하지 말라는 듯 베티를 향해 작게 웃었다.
“수련의 기본 중 기본은 건강한 음식이야. 양분이 있어야 오장육부가 원활히 움직이고 양질의 근력이 발달하고, 외공을 수련하는 데 도움이 될 것 아냐?”
“……외공이요?”
“무술 말이야. 무술.”
샬롯이 그런 것도 모르냐는 듯 말하며 익힌 가지를 포크로 찍어 입으로 가져갔다.
베티는 순간적으로 작은 주인님이 갑작스레 의원들을 불러들인 일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세상에. 샬롯 아가씨께서 마치 다른 사람처럼 군다며 진찰을 해 보라고 하실 때만 해도, 작은 주인님께서 아가씨께 또 화가 나신 거라고만 생각했는데…….’
입을 떡 벌리고 있는 베티의 앞에서, 샬롯이 이번에는 익힌 토마토를 입으로 가져갔다. 심지어는 오물오물 씹기까지 했다.
너무 놀라서 입을 벌리고 있기만 하자, 샬롯이 그녀를 흘끗 보더니 문득 아스파라거스 하나를 집어 들어 베티의 입에 넣어 주었다.
“……네?!”
“나만 먹을 순 없잖아.”
“드, 드셔도 괜찮아요.”
“정말?”
“그럼요, 아가씨신데.”
“흐음. 하지만 난 그런 건 불편한데. 그리고 혼자 밥 먹으면 맛없고.”
무림에서는 직업에 귀천을 두지 않았다.
강호인들도 칼질만 해서는 먹고 살 수가 없다. 결과적으로는 그들을 보조해 주는 기술자들, 요리사들, 건축가들이 있어야 한다.
하찮은 시종 한 명, 점소이 한 명도 가벼운 목숨으로 취급하는 법이 없었다.
당연히, 제 곁에서 수발을 들어 주는 이에 대한 존중은 당연했다.
무릇, 약한 자를 보호하고 대우하는 것은 무림인의 기본 중 기본이었으니까.
‘그리고 내가 천대를 당해 봐서 그런지…… 소중한 사람을 소중하게 대하고 싶어.’
하지만 베티는 그저 이 상황이 당혹스럽기만 했다.
‘어쩌면 새로운 종류의 괴롭힘일지도 몰라.’
베티가 의심을 거두지 못하며 식사 시중을 드는 사이에, 샬롯은 얼마 식사를 다 하지도 못하고 꾸벅꾸벅 졸며 잠에 빠져들었다.
베티는 작게 웃으며 아가씨를 내려다보았다.
‘그래. 아직 9살밖에 되지 않은 아가씨인걸. 사람이 나쁜 면만 있을 순 없어. 지금까진 사랑을 못 받아 보셔서 그렇지, 좋은 면이 꼭 있으실 걸 알고 있었어.’
그렇게 제게 잘해 주는 모습을 봐서 그런지, 오늘따라 정말 다른 사람처럼 평온하고 아름다워 보였다.
지금까지와 꼭 같은 얼굴인데도.
제가 떠올린 생각이 이상하다고 생각하며 베티는 샬롯의 얼굴을 요모조모 뜯어보길 그만두고 아가씨를 안아 올려 침대에 눕혀 주었다.
늦은 밤.
한밤중에 눈을 뜬 샬롯은 익숙하지 않은 제 방의 풍경을 바라보다가, 오늘 있었던 일들을 상기해 냈다.
오랜 투병 끝의 죽음. 사신과의 만남. 그리고 다시 얻은 생.
자살 소동에도 불구하고 비웃기만 하는 아이들과의 만남.
그리고 생각지도 못한 비참한 어린 시절을 보내고 있는 요제프와의 만남.
허수아비만도 못한 아버지와의 조우까지.
“……이런 인생이라곤 말 안 해 줬잖아.”
샬롯은 사신을 향해 때늦은 불평을 하며 몸을 일으켰다.
대단히 좋은 인생을 바란 것도 아니었지만, 언제 가문에서 쫓겨날지도 모르는 조연 신세인 걸 떠올릴 때마다 헛웃음이 났다.
그녀는 팔을 쭉 뻗어 기지개를 켰다.
텅 빈 천장에, 자꾸만 요제프의 얼굴이 떠올랐다.
의지할 곳을 찾지 못한 아이의 얼굴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