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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파 공녀님 (6)화 (6/123)

#6.

일순간의 변화일 거라는 생각은 들었지만, 그래도 너무 이상하기만 했다.

돌아 버리다 돌아 버리다 못해 360도 돌아서 정방향으로 온 걸 거다.

워낙 매일 만날 때마다 전쟁처럼 싸우기만 하고, 악다구니를 쓰는 딸을 상대하느라 지쳐 있었기에 미처 몰랐지만, 문득 제 딸의 단정한 얼굴이 참 제 부인을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른 나이에 이 세상을 떠나 버린, 제 부인을.

‘워낙 재능이 없는 아이라, 금방 가문을 떠나보내게 되겠지만…… 그렇더라도 조금 더 신경을 써 볼까.’

지금껏 한 번도 해 본 적 없는 생각을 하며, 제롬은 꽁지로 묶어 올린 제 백금발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한숨을 크게 쉬었다.

아무튼, 제 딸의 지금 상태는 제대로 된 상태는 아닌 것만은 틀림없었다.

샬롯에게 아무런 이상은 없다.

그것이 의사와 신관이 입을 모아 내린 결론이었다.

하지만 샬롯을 진찰하거나 상태를 들여다본 이들 모두가 ‘몸에 이상은 없으십니다만…….’ 하고 말꼬리를 길게 늘이고는 어딘가 불안한 얼굴로 도망치듯 떠나갔다.

가문 주치의 벤이 마지막으로 진찰을 할 때도 그랬다.

벤이 방에 들어섰을 때, 샬롯은 기묘한 자세를 하고 앉아 있었다.

바닥 쪽으로 다리를 내린 게 아니라, 두 다리를 의자 위에 올리고 있었다. 두 발은 하늘 쪽을 향하고, 양 무릎 위에 다른 쪽 발이 놓인 모습은 퍽 생소한 것이었다.

눈을 감고 있던 그녀는 제법 나이가 지긋한 벤의 얼굴을 보더니 씩 웃으며 자세를 바로 했다.

“……샤를로테 님, 제가 진찰을 좀 봐도 괜찮겠습니까?”

“응. 물론이지. 부탁할게.”

부드럽게 웃는 것하며, 부탁한다는 말까지.

지금껏 알던 그녀가 아니었다.

제롬 님께서 하는 말씀을 들을 때만 해도, 신관이 먼저 다녀간 이야기를 들을 때도 샬롯이 정말 대단히 크게 변했을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던 벤은 눈을 끔벅이며 진찰 가방을 내려놓았다.

샬롯의 몸 여기저기를 살펴본 벤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이렇게 건강하신데 자꾸 다들 다른 사람인 것같다고만 하는 이유를 모르겠군요……. 기억의 문제라도 있으십니까?”

“아니? 전혀 문제가 없어. 내 이름은 샤를로테 세티야, 9살, 라일락 베디아 세티야를 모친으로, 제롬 세티야를 부친으로 두고 오라버님 한 분이 있으시고…….”

책에서 읽은 것을 토대로 줄줄 늘어놓는 말에, 벤은 쉽게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역시 괜한 질문을 드렸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진찰을 어떻게 봐드려야 할지…….”

샬롯은 잠깐 고민하다가, 벤을 똑바로 올려다보았다.

바람 불면 쓰러질 것처럼 꽤 마른 중장년의 사내는 잿빛 수염을 짧게 길러서 어딘가 날카롭게 보였다.

하지만 지금껏 그녀를 진료한 다른 의원들과는 달리 어중떠중하게 대충 일처리를 하지 않고, 고작 샬롯을 상대로도 성심성의껏 고민하고 있을 만큼 성실하고 조금은 순박한 사람이었다.

정확히 뭐가 어떻게 돌아갈지 모르니, 최대한 숨죽여 지낼 생각이었지만 제 편을 한둘 만들어 둘 필요는 있었다.

그리고 제가 생각하기에, 이 의사는 꽤 쓸모가 많을 것 같았다.

요제프 황자를 또 만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성한 곳이라곤 없는 황자의 몸을 보살펴 줄 때도 의사 한 명쯤은 필요했고.

“할아범.”

“네, 말씀하십시오.”

“있잖아, 할아범.”

그녀는 한층 목소리를 낮춰 속삭였다.

“기억에만 문제가 없는 게 아니라 다른 것도 알아. 할아범. 수도 북문 쪽 땅값이 곧 오를 테니까 투자하려면 그쪽에 해. 괜히 이상한 곳에 투자해서 패가망신해서 돈 빼돌리다가 쫓겨나지 말고. 지금 사려는 그 땅, 지하수가 터질 땅이라 못 써먹어.”

“……네?”

벤은 등골에 소름이 쫙 돋아서 샬롯을 바라보았다.

이번에 아들 녀석이 광산에 취직하면서 제법 큰 돈을 벌어 왔다. 그 돈을 묵혀만 두면 아까우니 투자처를 알아보고 있던 차였다.

몰래 물색하고 있는 일이라 제 아들에게도 말하지 않았는데…… 도대체 샬롯이 그 일을 어떻게 안단 말인가?

게다가 돈을 빼돌린다니?

“샤, 샤를로테 님. 어디서 그런 말을 들으셨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제가…… 제가 어찌 감히 가문의 돈에 손을 대겠습니까?”

샬롯이 눈을 크게 뜨고 벤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벤은 제 앞에 앉은 것이 정말 9살의 꼬맹이가 맞는지조차 순간 잊어버릴 정도로 몸이 바짝 얼어붙는 것을 느꼈다.

풀을 닮은, 부드러운 연두색의 눈동자 속에는 상대의 본질을 그대로 꿰뚫어 볼 듯한 치명적이고 강렬한 시선이 숨어 있었다.

“정말로? 정말 그 돈을 다 날리고 나서도, 그러지 않을 자신이 있어? 벤, 당신은 너무 잘 알잖아. 내 주위에 눈먼 돈이 많다는 거. 우리 가주 할머님과 아버님이 내게 관심이 없어서, 그 눈먼 돈을 제대로 관리할 사람조차 없다는 거.”

벤은 정말로 몸이 바싹 굳었다.

안다.

너무나 잘 안다.

게다가, 저 돈을 어떻게 운용하면 쉽게 빼낼 수 있을지 몇 번이고 군침을 흘리며 생각해 본 적까지 있었다.

귀가 얇은 샬롯을 몇 번만 구슬리면 끝이다.

‘……하지만 작은 주인님과 공작님이 본인에게 관심이 없다는 말을 저렇게 덤덤하고 냉철하게 할 수 있다니. 고작 9살인데…….’

벤은 웬만한 어른을 상대로도 느껴 본 적 없는 긴장에 등줄기를 따라 땀이 뻘뻘 났다.

벤은 제 앞에 있는 샤를로테를 천천히 다시 바라보았다.

그때, 샬롯이 언제 그랬냐는 듯 사르르 웃었다.

그 웃음 하나에 벤은 꼭두각시가 조종당하듯 긴장이 탁 풀렸다.

샬롯은 웃으며 말했다.

“그러니까, 내 말 듣고 투자만 제대로 하면 아무 문제 없어. 난 벤 할아범을 싫어하지 않거든. 사람이 욕심이 많아서 그렇지, 사실 날 제일 잘 돌봐준 건 할아범이잖아?”

벤은 다시 돌아온 아이 같은 천진한 웃음을 보고, 등줄기에 소름이 한 번 더 돋았다.

‘정말로 다른 사람이다.’

아니, 분명 같은 사람이었지만, 다른 사람이다.

‘어떻게 이렇게까지 다르지?’

이제야 왜 다른 이들이 그렇게 낯빛이 질려서 달아나듯 떠나갔는지도, 작은 주인님께서 왜 샤를로테 아가씨의 상태를 굳이 또 한 번 살펴봐 달라 요청하셨는지도 알겠다.

벤은 진료 도구를 모두 가방에 넣고 떨리는 손을 감추려 애쓰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샬롯이 방긋 웃으며 손을 흔들더니 한마디를 덧붙였다.

“아, 맞다. 그리고 할아범 요즘 왼손 아프지? 내가 좀만 더 수련한 뒤에, 왼손 한번 봐 줄게. 기의 흐름이 영 나쁘네.”

벤은 제 왼손을 오른손으로 움켜쥐고 저도 모르게 감사하다는 말을 중얼거리며 밖으로 나왔다.

‘그건 또 어떻게 아셨단 말인가?’

남은 것은 소름 끼치는 가정뿐이었다.

‘……지금까지, 모두 다 연기였을지도 몰라. 너무 어릴 때 두각을 드러낸 인재는 쉽게 경계를 사게 마련이니까.’

만약 정말로 그렇다면.

‘세티야 가문에는 큰 사자가 숨어 있어. 거대한 발을 가진, 제가 얼마나 크게 자랄지 드러내지 않고 얌전히 웅크려 있던 새끼 사자가.’

그는 고개를 꾸벅 숙이고 물러났다.

밖에서 담소를 나누며 기다리던 제롬 세티야가 벤의 창백한 얼굴을 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떻게 됐지?”

벤은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샤를로테 세티야 아가씨께서는 완벽하게 건강하십니다. 몸도 정신도, 아무런 문제도 없으셨습니다.”

제롬이 인상을 팍 찌푸렸다.

아니, 애가 바뀌어도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백팔십도 바뀌었는데, 어째서 다들 이런 소리만 늘어놓는단 말인가.

“그게 단가?”

“그게 답니다. 그리고…….”

“그리고?”

“……아닙니다. 샤를로테 아가씨께 필요한 일이 있으면 언제든 불러 주십시오. 샬롯 아가씨의 전담 주치의로 임명해 주셔도 좋습니다.”

제롬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전담 주치의가 출세할 수 있는 길은, 전담하고 있는 인물이 출세 가도를 달리는 것밖에 없다.

가문에서 밀려나다시피 한 입지의 샬롯에게는 전담이 붙지 않으려 했기에 지금까지 가문 주치의가 함께 돌봐 주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어떤 심경의 변화가 있었던 걸까?

벤이라면 경력이 많고 인정받고 있는 의사라 충분히 첫째나 둘째의 전담 주치의가 될 수도 있었지만 그간 정치에 휘말리기 싫다는 이유로 본인이 거절해 왔었다.

‘뭔가…… 샬롯이 벤의 마음을 움직인 거야. 고작 진료를 본 30분 만에.’

제롬이 뭔가를 더 추궁하기도 전에 벤이 고개를 꾸벅 숙이고 물러났다.

제롬은 흰머리가 희끗희끗한 벤의 뒷모습을 보면서 생각에 골몰했다.

‘나름대로 산전수전을 다 겪은 나이 많은 남자를 고작 30분 만에 사로잡을 수 있다니.’

보통, 지도자의 매력을 카리스마라고 부른다.

‘샬롯에게 그런 카리스마가 있기라도 한 걸까?’

그는 저도 모르게 제가 떠올린 생각이 너무 소스라치게 웃겨서 헛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저었다.

말괄량이에다 천방지축인 제 딸은 이제 고작 9살이었다.

제가 지금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일이었다.

제롬은 샬롯의 뭔가가 바뀌었다고 확신하면서도 무엇이 바뀌었는지를 알 수 없었다.

그는 눈살을 한참 찌푸리고 앉아 있다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제 비서를 불러들였다.

“네, 찾으셨습니까.”

“그래”

“샬롯 아가씨의 진찰이 끝났다 들었습니다. 본관으로 돌아가시겠습니까?”

“그래…… 그리고. 한 가지 더.”

“네?”

“샬롯이 오늘 물에 빠진 사건 말인데…… 좀 조사해 줬으면 하는데.”

제롬의 비서 레이트가 얇은 안경 아래로 눈을 동그랗게 떴다.

“샬롯 님의 자살 소동을…… 조사하란 말씀이십니까?”

지금까지 제롬은 샬롯이 소동을 부리면 부릴수록 더 차갑게 관심을 주지 않았다.

제 딸이 말썽을 피울 때마다 관심을 주면, 제 딸은 그렇지 않아도 능력이 없는데 스스로 발전할 생각도 하지 않을 거라는 말이 거의 버릇처럼 입에 붙으셔서.

‘그런데, 웬일이지?’

하지만 레이트는 놀란 기색을 드러내지 않고 고개를 숙였다.

이미 보고해 올린 내용을 다시 한번 조사하라고 명하시는 데에는 이유가 있을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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