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그녀의 아버지, 작은 주인님이자 황궁 큰곰기사단의 단장인 제롬 세티야가 상상도 못 해 본 제 딸의 대응에 눈을 가늘게 뜨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손가락에 피가 나는 모습을 멀리서 보고서는, 또 드러누워 울음을 터뜨리겠구나 싶어 다가온 것인데…….
이런 대응을 해 올 거라곤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제 딸의 행동은 마치, 오랜 시간 무술을 수련한 것 같은 태도였다.
게다가 그 나이에 맞게 느린 동작이었지만, 아무렇지도 않게 휘둘러진 그 나뭇가지가 그리는 궤적은 너무 깔끔했다.
‘……착각인가?’
제롬은 너무 놀라 할 말을 잃고 샬롯을 바라보았다.
“지금 네가 한 게…….”
제롬의 질문이 다 떨어지기도 전에 샬롯이 오동통한 볼을 긁적이더니, 나뭇가지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새삼스레 검 한번 쥐어 본 적 없어 곱기만 한 제 딸의 고사리 같은 손이 눈에 들어왔다.
‘……그럴 리가 없지. 내가 잘못 본 거야.’
제롬은 쓸데없는 질문을 입에 올릴 뻔한 저를 비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샬롯이 쥐고 있던 나뭇가지가 그렸던 깔끔하기 짝이 없는, 느릿하지만 명료했던 궤적 같은 것은 우연에 불과할 거다.
검을 정식으로 배우고 있는 샬롯의 오라버니보다 훨씬 더 말끔해 보였던 것도 착각에 불과하다.
제롬이 입을 다물고 있자 샬롯이 의아한 듯 큰 눈을 깜박이며 물었다.
“누구신지요?”
제롬은 딸이 이상한 소리를 하는 것에는 진력이 나 있었다.
“이젠 네 아비도 못 알아보느냐?”
샬롯이 그 말에 조금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샬롯의 아버지구나.’
아버지, 제롬 세티야는 중년의 반열에 들었는데도 아직 제법 수려한 사내였다.
햇빛에 퍽 잘 어울리는 금발 아래로, 수련을 그리 많이 했을 텐데도 희고 고운 피부와 이목구비가 뚜렷한 얼굴은 제법 아름답다 할 만했다.
‘아버지라니…… 책으로 읽을 땐 그냥 허수아비구나 하고 말았는데…… 이렇게 눈앞에 두고 보니, 왜 목이 메는 것 같지.’
샬롯은 제롬이 슬하에 둔 두 아이 중 둘째였다.
하지만 이 아버지는 재능이라곤 없는 제 딸에게 도통 관심이라곤 없었던 거다.
‘샬롯의 부모님에게 내가 어떻게 해야 해?’
도화는 고아였다.
그녀가 기억하는 한, 부모님을 가져 본 적이라곤 없었다.
그래서일까?
샬롯의 아빠가 샬롯에게 지독히 무관심한 사람인 줄 알면서도 그를 보는 순간 말문이 턱 막혔다.
샬롯은 한참 동안 망설이다가 질끈 눈을 내려 감고 심호흡을 했다.
몸에 익숙하게 밴 습관대로 심호흡을 하자, 두근거리던 심장이 천천히 가라앉았고 머릿속도 맑아졌다.
‘내가, 샬롯이 아닌 것을 숨기지는 않을 거야.’
결국 누군가는 그녀가 샬롯이 아님을 알아낼 거다.
더군다나 그게 부모님이라면, 더더구나.
비록 제롬이 제 딸을 살뜰히 아낀 것은 아니라고 해도.
샬롯을 진정으로 아끼던 사람은 거의 없다시피 했다고 해도.
‘그래도 내가 진짜 샬롯인 척하지 않는 게 샬롯의 지인들을 향한 예의일 거야.’
마음을 정하고 나자, 그녀는 눈을 떴다.
이번에는 샬롯의 아빠, 제롬을 똑바로 보아도 마음이 불편하지 않았다.
샬롯은 뻔뻔스레 입을 열었다.
“……누구냐고 여쭙다니, 제가 결례를 범했네요. 어떤 일로 소녀를 찾아오셨는지요?”
제롬은 재차 이어진 제 딸의 말소리에 더 기가 막혀 눈을 크게 떴다.
‘지금 결례라고 했나……?’
가뜩이나 어린아이에 불과했지만, 심지어 거기에 어리광밖에 배운 것이 없는 제 딸은 제대로 말을 나눌 수 없는 상대라고만 생각해 왔다.
마주치면 곧장 바닥에 드러눕거나 패악을 부리기만 하는 아이를 상대로 무엇을 어쩔 수 없으니까.
그저 빨리 키워서 가문에서 쫓아내거나 시집을 보내 버릴 생각뿐이었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뭘 잘못 먹은 것처럼 또랑또랑한 눈으로 저를 올려다보며 조근조근 말을 걸어오는 걸 보니, 마치 다 큰 아이 같았다.
제롬은 방금 막 제게 쫓아와 샬롯이 벌인 자살 소동에 대한 이야기를 털어놓던 시녀의 새파랗게 질린 얼굴을 떠올리며, 제 딸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그런 대단한 일을 벌인 주제에 샬롯의 눈은 이상하리만큼 차분했다.
심지어는 3황자의 일에 갑자기 끼어들기까지 했다는 말을 듣곤, 황급히 집으로 불러들였는데.
‘……예절 선생을 새로 들였다는 이야기가 있었던가?’
제롬은 얼떨떨한 기분을 헛기침으로 달래며 애써 볼일을 떠올렸다.
“길게 이야기할 생각은 없다. 다만 네 할머니인 가주님께서 이번에야말로 정말 지긋지긋하게 실망했다고 하셨다는 것만 알아 둬라.”
샬롯은 이번에도 수상스러울 정도로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양손을 곱게 모으더니 허리까지 반듯하게 숙여 보였다.
“……신체발부 수지부모라 하였지요. 사람의 신체와 터럭은 모두 부모에게 받은 것인데, 제가 감히 제 몸이 상할 일을 했으니 심려를 끼쳐 드려 죄송합니다.”
제롬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신체 뭐라고?”
“정말 죄송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소녀, 연무장을 뛰라 하시면 뛸 것이니 합당한 벌을 내려 주십시오.”
‘……왜 저러는 거지? 연무장이 어딘지는 알고 저러는 걸까?’
제롬은 갈수록 이상한 소리를 해 대는 제 딸이 이번에도 무슨 꿍꿍이를 숨기고 있다고 생각했다.
오래 상대해 봤자 머리만 복잡해질 것 같아서 얼른 볼일을 입에 올렸다.
“네가 그리 사고를 치고 다니면 다른 가문에 볼 면목이 없구나, 당분간은 근신하도록 하거라.”
샬롯은 절로 한숨이 나오는 것을 느꼈다.
근신이라니.
요제프는 그럼 어떻게 되는 걸까?
‘하지만 내가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일이 없긴 해. 내가 먼저 수련을 할 필요가 있어.’
그녀는 제 입에 절대 붙지 않는 단어를 말하려고 잠깐 혀를 굴리다가 겨우, 그 단어를 입에 올렸다.
“아버지.”
제롬은 여상하게 고개를 돌려 제 딸을 바라보았다.
“왜?”
“명하시는 대로 하겠습니다. 하지만 그 말도 안 되는 친구들 사이에 저를 또 보내는 건 현명하신 처사는 아닐 겁니다.”
“……뭐?”
제롬은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오늘따라 이상하게 군다고는 생각했지만, 정말 이상한 소리였다.
또래 무리에 끼지 못해서 안달인 샬롯이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대체…….
“무슨 뜻이지?”
샬롯이 부드럽게 웃었다.
“아버지께서 저를 어찌 생각하시는지는 알지만, 이번에는 제가 실수로 물에 빠져 죽을 뻔했는데도 그 친구라는 아이들은 모두 절 비웃기만 했습니다. 아마 그대로 제가 죽어 버려도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을 테지요.”
제롬은 이맛살을 찌푸렸다.
샬롯이 워낙 그간 얼토당토않은 말만 했으니, 이제 와서 저 말이 신뢰가 갈 리가 없었다.
이제는 하다 하다 못해 남 탓으로 돌리는구나 싶어 더 속이 터질 뿐이었다.
“긴말 듣고 싶지 않구나. 이런 식으로 군다면 3황자와 약혼이라도 시켜 버릴 테니, 그리 알거라.”
3황자와 약혼을 시킬 리가 없었다.
샬롯을 비롯해서 그 누구도 3황자 요제프의 근처에 다가가고 싶어 하지도 않았다.
요제프와 가까이 있다가, 2황자의 눈 밖에 나기라도 하면?
3황자 요제프가 얼마나 감히 황권을 탐낼 생각도 못 하도록 철저히 짓밟히고 있는지를 안다면, 그 누구라도 그럴 거다.
하지만 샬롯은 제롬이 그냥 습관적으로 협박하듯 하는 말을 듣고 오히려 귀가 솔깃했다.
“약혼이요?”
“……뭐?”
“마침 잘됐네요. 근처에서 지켜보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약혼시켜 주세요.”
“……지금 대체 뭐라고 하는 거냐?”
제롬이 어이가 없어서 되묻는 말에, 샬롯이 빙긋 웃었다.
“소녀는 아직 많이 부족하니, 말씀하신 대로 3황자와 약혼을 시켜 주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제가 심려를 끼쳐 드렸으니 명을 따라야지요.”
샬롯은 제 할 말을 마치고 부드럽게 몸을 굽혀 인사까지 해 보이곤 먼저 자리를 떴다.
제롬은 묘한 기분이 들었다.
마치, 능구렁이 같은 정치인을 상대하는 것 같달까?
‘……요제프 황자와 약혼이라니. 지금 세티야 가문에 몸담고 있는 사람이, 그게 할 소린가? 지금 시켜 볼 테면 시켜 보라고 협박하는 건가?’
제롬은 샬롯의 말이 어디까지가 농담이고 어디까지가 저를 조롱하는 건지를 생각하며 눈살을 팍 찌푸렸다.
제 키의 반도 오지 않는 어린 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제롬은 저도 모르게 그녀를 다그쳐 불렀다.
“샬롯, 잠깐만.”
샬롯이 홱 하니 뒤를 돌아보았다.
제롬은 뒤늦게 제 딸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모처럼 차려입은 무릎까지 오는 귀여운 드레스가 물에 쫄딱 젖어 있었고, 곱게 땋아 올렸던 듯한 분홍색 머리도 엉망으로 물에 젖어 있었다.
그리고 볼이 붉은 귀여운 아이의 얼굴은 물에 빠진 탓에 새파랗게 질려 있었고, 입술까지 푸르게 물들어 있었다.
‘물에 빠진 소동 때문에 저 꼴이군.’
제 딸이 물에 빠진 생쥐 꼴을 한 게 한심하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런 모습인 걸 눈치도 못 챌 정도로 지금껏 의연하게 있었던 게 묘하다고 생각했다.
그런 모습을 봐달라고 시위했으면, 또 아무렇지도 않았을 거다.
그런데 또 의연하게 구니까 묘하게 안쓰럽게 느껴졌다.
‘내가 지금 샬롯을 안쓰럽다고 생각한 건가?’
제롬은 새삼스럽기 짝이 없는 생각을 억지로 끊어내려 일부러 더 차갑게 말을 마무리지었다.
“이상한 소리 하지 말고 방에 들어가 근신이나 하도록 해.”
샬롯이 제롬의 시선을 따라 제 치마를 흘끗 내려다보더니, 아무렇지 않다는 듯 양손으로 젖은 치맛자락을 꼭 짰다. 물이 뚝뚝 떨어지는데도 샬롯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치마를 털고 허리를 폈다.
“알겠습니다. 이제 가 볼게요.”
그것도 낯선 모습이었다.
샬롯은 평소에 병이 없어도 잔꾀를 부리며 관심을 끌려 애를 쓰는 아이였으니까.
제롬은 이마를 짚으며 고개를 저었다.
하나같이 의외의 모습만 보이는 건 왤까?
“일단 의사를 보내야겠다.”
제롬의 곁에 서 있던 그의 비서 레이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몸이 아파서, 찰나 이상한 모습을 보이는 게 틀림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