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파 공녀님 (4)화 (4/123)

#4.

“흐앙.”

샬롯의 눈물은 꽤 오래갔다.

요제프는 한참을 마른 나무처럼 우뚝 서 있기만 하더니, 샬롯이 겨우 눈물을 그칠 때쯤 되어서야 제 품속을 뒤졌다.

“……더럽군.”

“흑…… 흑. 내가?”

“그런 게 아니라…….”

샬롯은 꺼이꺼이 목놓아 울면서도 요제프가 손수건을 우두커니 내려다보고 있는 모습을 잘도 보았다.

그녀는 요제프의 손에서 먼지가 묻은 손수건을 얼른 채 가서 눈물을 닦았다.

손수건에서는 어딘가 부드러운 꽃내음이 풍겼다.

“그래도…… 흑. 이런 건 챙겨 다니네.”

“그게 웃긴 점이지. 교양도 챙겨야 되고, 처맞으러 다니는 일정도 챙겨야 되고.”

어쩐지 요제프의 작은 중얼거림은 샬롯을 달래는 것 같이 들렸다. 전혀 그런 이야기가 담겨 있지도 않았는데도.

샬롯은 그 부드러운 목소리를 들으며 숨을 겨우 가누어 쉬었다. 그러곤 눈물을 꾹꾹 눌러 닦고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요제프에게 손을 내밀었다.

“나랑 같이 가.”

“……뭐?”

“내가 보기엔 이래 보여도, 전생에는…… 아니, 아무튼, 꽤 대단한 고수였으니까. 너 하나 정돈 지켜 줄 수 있을걸?”

“……쿡.”

그 순간, 샬롯은 제가 뭔가 말을 하고 있다는 것조차 잊어버렸다.

너무 황당하고 어이없는 말이라도 들었다는 듯, 요제프가 입을 가리며 작게 웃는 순간에.

소설의 주인공이란 이런 걸까?

웃음 하나로, 주변이 몇십 배나 밝아 보일 정도로 아름다운 미소라는 게 존재할까?

샬롯은 요제프의 미소가 짧게 비치고 사라진 뒤에도 그를 한참 멍하니 바라보았다.

웃는 게 얼마나 아름다운 사람인지 알고 나니까, 평소의 삭막하기만 한 얼굴이 더 안타까워서.

요제프는 주위를 한번 둘러보곤 샬롯에게 엄한 목소리로 당부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괜한 짓 하지 마. 네 이미지도 이미 나락인데, 우리 형님에게까지 찍히면 살고 싶지도 않을 테니까.”

“하지만……!”

“난 분명히 경고했다.”

요제프가 그렇게 쏘아붙인 순간, 저 멀리에서 나지막하게 사람들이 다시 돌아오는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잇달아,

“어어! 샬롯이랑 요제프 황자님이 그냥 서 있는데!”

“뭐야? 누가 풀어 줬어?”

“간덩어리 부은 놈이 하루에 몇 명이야?”

아이들이 요란스레 외치는 목소리까지 함께 들려왔다.

샬롯이 저도 모르게 요제프의 앞을 가로막고 서는데, 그 순간 풀을 자박자박 밟고 두 명의 시종과 한 명의 여인이 다가왔다.

“샬롯 아가씨, 작은 주인님이 찾으십니다.”

“아니, 잠깐만. 나 좀 볼일 좀 보고.”

“당장 데려오라고 하셨어요.”

“……아니, 이것 좀 놔!”

하지만, 샬롯이 할 수 있는 건 거기까지였다.

늘 말썽을 피우고 달아나기 일쑤인 샬롯 때문에, 그녀의 아버지인 제롬은 막내딸 샬롯을 엄하게 다스렸다. 시종들도 그것을 알기 때문에 그녀가 뭐라고 하든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샬롯은 거의 양쪽에서 질질 끌다시피 끌려갔다.

“……요제프! 기다려! 내가 너…… 다시 만나러 올 테니까! 어떻게든 해 줄게, 내가!”

요제프는 샬롯이 끌려가는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끌려가면서도 바락바락 소리치는 모습을 바라보던 그의 귓가에 란슬롯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오기 시작했다.

요제프의 검은 눈이, 다시 탁하게 가라앉았다.

* * *

‘아까 있었던 정원은 세티야 가 사냥터 근처의 정원이었던 모양이야.’

지독한 일이 있어서 그렇지, 정원 자체는 어쩐지 넓고 예뻤다. 사람이 빠져 죽어도 모를 만한 거대한 분수까지 있을 정도였고.

샬롯은 그런 생각을 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시종 둘이 눈을 빛내며 저를 감시하고 있었기 때문에, 마차에서 탈출하는 건 엄두도 못 낼 일처럼 보였다.

‘요제프는 어떻게 됐으려나.’

그녀는 속이 탔지만, 당장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생각을 접었다.

문득 창밖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무림과는 전혀 다른 풍경이 날 듯이 지나갔다.

세티야 가의 일꾼들이 활발하게 오가는 모습, 지붕의 빗물받이나 굴뚝을 청소하는 모습, 정원을 손질하는 모습들은 하나같이 시선을 끌어당겼다.

사람 사는 모습이야 어딜 가나 비슷할 거라 생각했지만, 화산파 안에서 일생을 지내며 바깥세상을 거의 본 적이 없는 그녀에겐 이 모든 것이 신기했다.

게다가 같은 가문이라고는 해도, 공작저의 땅이 워낙 넓기 때문에 마차로 이동해야 한다는 것부터가 이미 신기했다.

정말 어마어마한 부를 축재한 가문이었다.

화산파 안의 사람들은 거의 도인이나 다름없었다.

수련을 하겠답시고 벽곡단을 주워 먹으며 동굴에 틀어박히거나, 매일같이 초식을 연마하거나, 서로 대련을 하는 게 일상의 전부였다.

바깥에 이런 활기찬 세상이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면 무림인들이야말로 무술에 미친 바보들일지도 몰라.’

샬롯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당장 이 몸에 무술을 익히고 싶어서 들뜬 자신을 생각하며 피식 웃음을 흘렸다.

‘아까는 너무 정신이 없어서 제대로 생각을 못 했는데, 내가 정말 그 책 속 샬롯이라면 이게 뭐가 어떻게 되는 거지?’

얼굴을 스치는 바람을 느끼며, 그녀는 다시 한번 스토리를 떠올려 봤다.

샬롯은 정말로 짧게 나오는 조연이었다.

이 책의 메인 스토리는 어디까지나 어른이 된 3황자 요제프를 사랑하는 이국의 황녀 샬레스의 러브스토리였으니까.

‘원작에서 샬롯이 죽은 시점은 이미 지났어. 샬롯이 만약에 살아 있다면 어떻게 될지 생각을 해 보자.’

아까 겪었던 일만 봐도 알겠지만, 샬롯의 앞에 탄탄대로가 펼쳐져 있다고 생각하기는 어려웠다.

일단, 샬롯을 괴롭히는 아이들 무리가 있는 것은 당연하고.

샬롯의 아버지인 세티야 가의 작은 가주를 비롯하여 세티야 가 사람들이 완벽히 무시하고 있는 것도 큰 문제였다.

‘체이커 국은 적국 사이에 먹음직스럽게 딱 중간에 껴 있는 형태이기 때문에, 다들 검술이나 강함에 미쳐 있는 건 알겠어. 거기까진 뭐, 무림이랑 다를 바도 없으니까.’

하지만 이렇게까지 무시를 하는 건, 곧 샬롯을 완벽히 쳐 내 버리겠다는 뜻이나 다름없었다.

어차피 세티야 가에서 사라질 존재이니 대접해 주지도 않겠다는 뜻이지.

멀리 생각해서 체이커 국이 망하는 것까지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2황자가 황위에 올라 나라가 망하기 전에, 일단 내가 쫓겨나서 망하게 생겼으니까.’

세티야 가문에서는 가주가 물러날 때가 되면 온 방계까지의 세티야 일족을 모아 시험을 치른다.

그렇게 해서 뽑은 단 한 사람에게 모든 권력이 이양되고, 나머지 일족들은 모두 가주의 아래 철저히 고개를 숙인다.

이번에 가주가 되는 건 아이작 세티야. 세티야 가문의 직계 중 첫째.

아이작 그놈은 그야말로 미치광이였다.

분명히 로맨스 장르였던 책 속에서 몇 줄 안 되는 배경 서술만으로도 사람을 쉴 새 없이 죽이는 그 잔혹성이 입증되었으니 할 말 다 한 거지.

‘그 자식이 가주가 되면서, 세티야 가문에는 피의 숙청이 일었지. 쓸모없는 놈은 다 죽으라는 식으로.’

골이 딱 아픈 이야기였다.

‘겨우 살아났는데도 바람 앞 촛불 같은 삶이라니.’

샬롯은 조그마한 제 손으로 이마를 탁 짚었다.

그리고 그 뒤에, 잔혹한 성정의 2황자가 황제가 되면서 체이커 국에 암흑기가 도래하는 것은 그다음에 생각할 문제였다.

샬롯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녀 자신도 강함을 열망하는 자였다.

강한 것의 가치를 누구보다 동경하는 자였다.

하지만 강하다는 것은, 약한 것을 짓밟기 위해서 존재해서는 안 된다는 것도 동시에 알고 있었다. 제가 가진 것을 모조리 잃고 일 년간 누워 있으면서도 그것을 통감했지만, 무림인이라면 누구나 강함을 동경하더라도 동시에 약자를 존중하는 법을 배운다.

‘이 세계는 공자의 유학 사상이 없나?’

국경의 동쪽 일부와 북쪽을 맡아 수비하는 세티야 가문은 당당한 기사로서, 그리고 선두에 설 지휘자로서의 역할을 전통적으로 해 왔다.

체이커 국의 2개의 명문 기사 가문 중 하나로서, 왕실 기사단까지 포함하여 나라를 지탱하는 총 세 개의 축 중 하나로서.

하지만 명문 기사 가문도 가문 나름이지, 나라를 지킨다는 명목을 위해 너무 많은 것을 희생시켜 버리면 더 이상 기사가 아닌 것 아닐까.

샬롯은 한숨을 폭 쉬며 조막만 한 구두를 신은 발로 마차 바닥을 탁탁 두드렸다.

당장 제 살길도 찾기 힘든 상황을 모르고, 요제프에게 구해 주겠다느니 어쩌니 떵떵거렸으니.

요제프가 듣기에 얼마나 우습고 한심했을까?

제 조막만 한 주먹을 몇 번 꼭 쥐어 보던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은 내가 강해져야 해. 내가 인정받을 수 있는 길은 그것밖에 없기도 하고…… 내가 잘하는 것도 그것뿐이니까.’

히힝-!

샬롯의 상념이 정리될 때쯤, 마차가 서서히 느리게 움직이더니 멈춰 섰다.

달칵.

마차 문이 열렸지만, 그녀를 마중 나와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녀는 시종의 도움을 받아 마차에서 내렸다.

아직 어린 그녀에게는 마차도 제법 높았다.

‘……어디로 가야 내 방인 거야?’

샬롯은 마차에서 내려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사람을 불러 놓고 마중도 안 나오고…….’

그녀는 기대도 하지 않았다는 듯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아무도 안 나오는 건 상관없었지만, 도통 길을 알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누굴 붙들고 내 방이 어디냐고 물어보면 이상하게 생각할 텐데.’

그녀는 슬슬 푹 젖어 있는 몸이 으슬으슬 떨려온다고 생각하며, 발 닿는 대로 걸음을 옮겼다.

생각과는 달리, 샬롯은 건물이 아니라 정원 속으로 점점 더 깊이 들어가고 있었다.

‘아니 정원을 왜 이렇게 만든 거야……?’

키가 작으니까 덤불도 미로같이 느껴졌다.

샬롯은 길을 헤매다가 오한이 들기 시작하는 팔을 감싸 안았다.

‘역시 제대로 된 검술을 할 수 있는 몸은 아니야. 아마 조금만 무리해도 근육통 수준이 아니라 몸살을 앓을 게 틀림없어. 우선은 수련을 할 공간과 시간, 그리고 내공을 닦을 곳을 마련해야 해.’

습관처럼 나뭇가지 하나를 주워 든 샬롯은 그걸 들고 길을 찾다가 자리에 멈춰 섰다.

연화봉 정상에 언제나 소담히 자리 잡고 있던 소나무들은커녕 흔히 볼 수 있는 국화 한 그루 볼 수 없었다. 그 대신 몹시 아름답고 향이 짙은 붉은 꽃이 달린 나무들이 열을 맞추어 줄지어 서 있었다.

‘……매화 같아. 예쁘다.’

무심코 붉은 꽃을 보고 내민 손에, 핏방울이 방울방울 맺혔다.

가시가 있는 꽃이구나. 그렇게 생각하며 제 손가락을 멍하니 바라보는 순간이었다.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샬롯은 생각도 하기 전에 반사적으로 손에 든 나뭇가지를 검인 양 내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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