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하지만 샬롯의 당당한 선언에도, 란슬롯을 비롯해서 그 누구도 샬롯에게 기가 죽지 않았다.
샬롯은 본가에서도 쭉정이라고 불리는 아이였다.
검술 명가 세티야 가문에서도 유일하게 오러의 재능이 발현하지 않은 아이.
그 뒤로 사고만 치고 다니고, 저보다 지위가 약한 자를 보면 괴롭히기 일쑤이면서 란슬롯이나 다른 신분 높은 사람 앞에선 굽신거리기만 하는 아이.
샬롯이 물에 쫄딱 젖은 채로 무슨 정의의 사도처럼 외치는 것에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을 법도 했다.
“해 보라면 못 할 줄 알아?”
“샬롯이 미쳤나?”
아이들이 웅성거리는 가운데, 란슬롯은 눈을 섬뜩하게 빛내며 다시 한번 돌멩이를 움켜쥐었다.
란슬롯은 검 명문가 세티야 가문의 방계였지만, 재능을 발현한 아이였다.
재능이 없는 직계 샬롯보다는 몇 배는 잘난 몸이었다.
란슬롯이 샬롯을 턱으로 부리는 게 당연했고, 란슬롯이 샬롯을 개처럼 조롱해도 샬롯이 할 수 있는 게 없는 게 맞았다.
걷어차든 돌을 던지든. 뻑하면 자살 소동을 벌여 대는 게 샬롯이 할 수 있는 전부였다.
게다가 3황자는 세티야 가문에 교육을 빌미로 맡겨져 있었다.
그런 3황자의 버릇을 다시 잡아 주는 건, 2황자님께서 직접 분부하신 일이다. 평소의 샬롯 같으면 감히 끼어들 수도 없는 일이다.
대후작가 출신 황후의 자식인 1, 2황자와는 달리. 3황자는 정식으로 황비가 되기도 전이었던 시녀 아렌느의 자식이었다.
아렌느는 평판이 좋은 여자는 아니었다. 그래도 황제는 그녀를 그렇게도 총애했다. 하지만 그녀에게 푹 빠져서 그녀에게 황비 지위까지 쥐여 줘 가며 잘해 주던 황제였지만, 아렌느가 제 자식이 황자로 승격하자마자 정숙한 생활을 그만두고 몰래몰래 다른 남자를 끌어들이기 시작했다.
그게 밝혀진 뒤로 아렌느는 황궁의 가장 구석진 곳에서 감시하에 지내게 되었고, 3황자의 취급은 이 꼴이 되었다.
이미 황자가 된 것은 어쩔 수 없으니 내버려 두었지만, 그게 끝이었다. 허수아비만도 못한 취급을 받게 된 것은 물론이고, 2황자의 놀잇감 비슷한 신세로 전락한 거다.
이제는 3황자를 괴롭히는 일에 대해서도 황제 폐하께서도 관심을 두지 않게 되었을 정도였다.
그런데, 샬롯 따위가 무슨 명분으로 끼어든단 말인가?
눈치 없는 계집아이가.
란슬롯은 신경질적으로 고함쳤다.
“평소에 요제프 황자의 근처도 안 갔던 주제에, 이제 와서 친한 척하긴.”
그 말이 사실이었다.
세티야 가문은 대표적인 2황자파였다.
샬롯이 아무리 가문에서 내놓은 아이라지만, 눈치 하나만은 빠삭했다.
강자에게 약하고, 약자에게 강한 샬롯은 그간 요제프 황자를 본체만체해 왔다.
그런데 오늘은 날이 더워서 돌아 버린 건지, 물에 빠져서 정신이 나간 건지, 그것도 아니면 요즘 좀 살만하게 해 줬더니 란슬롯이 무서운 줄도 모르고 짖어 대는 건지.
란슬롯은 히죽 웃으며 돌멩이를 쥔 팔을 높이 쳐들었다.
서열을 모르겠다면, 다시 한번 정리해 주면 그만이었다.
샬롯은 그 모습을 보고도 옆으로 피해 설 수가 없었다. 제가 피하면 뒤에 선 황자가 돌을 맞는다.
‘진짜 던지네, 미친놈.’
그 순간, 샬롯은 제 몸속을 돌고 있는 기운을 재빨리 살폈다.
예상대로 단전에 내공이라곤 한 줌도 없었지만, 본디 인간에게는 토답술을 운용하지 않아도 호흡을 하면서 은연중에 아주 조금의 기운은 몸속을 들고 난다.
선천진기라고 불리는 기운이 그것이다.
하지만 그건 함부로 써도 좋은 게 아니었다.
그런데 어떻게 된 일인지, 수련이라곤 전혀 되지 않은 몸인데도 선천진기 이외에도 아주 조금 운용할 수 있는 기가 몸속을 흐르고 있었다.
‘이게 뭐지?’
세계가 완전히 달라서 그런가?
하지만 길이 제대로 닦이지도 않았는데 기운이 남아 있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이게 뭔지 모르겠지만, 뭐든 쓸 수 있다면 좋지.’
그녀는 손을 높이 들고 다시 한번 궤적을 읽었다.
탁.
한 번은 우연이라고 할 수 있지만, 두 번은 실력이다.
샬롯에게 제가 던진 돌이 두 번째 붙잡힌 란슬롯의 얼굴이 미묘하게 찡그려졌다.
상단전과 중단전 사이를 흐르고 있는 기운을 끌어모아 손으로 흘려보내자, 샬롯의 주먹 안에서 돌이 마치 미트볼처럼 으깨졌다.
후두둑.
바닥으로 돌가루가 흘러내리는 것을 본 란슬롯의 턱이 떡 벌어졌다.
샬롯이 조막만 한 손을 내려 허리에 척 얹고서는 란슬롯을 향해 똑똑히 말했다.
“네가 어리니까 봐주는 거야. 다시 한번 더 쓸데없는 짓으로 눈에 띄었다간, 그때는 정말 본때를 보여 주겠어.”
“……지금 뭐라고 했어?”
“본때를 보여 주겠다고.”
“하…… 이게 정말. 보자 보자 하니까.”
란슬롯이 분노에 가득 찬 얼굴로 샬롯을 향해 턱짓하자, 시종 네 명이 샬롯에게 달려들었다.
샬롯은 달랑 들린 채로 팔다리를 버둥거렸다.
“아니, 이러는 법이 어딨어. 이래 봬도 나도 공작가 여식 아니야? 이런 식으로 막 대해도 되는 거야?”
하지만 샬롯이 가문에서 내놓은 자식이라는 걸 모르는 자는 없었다.
게다가 괜히 3황자를 감쌌다간 이렇게 된다는 걸 보여 준다는 명분도 있었고.
순식간에 샬롯은 3황자와 함께 나무에 꽁꽁 묶였다.
“낄낄, 꼴좋다.”
아이들이 비웃는 사이로, 란슬롯이 백금발이라기보다는 은발에 가까운 곱슬머리를 쓸어넘기며 위풍당당하게 걸어왔다.
그러곤 샬롯의 이마에 콩 하고 딱밤을 세게 놓으며 으스댔다.
“방금 뭐라고 했어? 어? 내가 할 수 있을 것 같냐고?”
“……쪽수로 이긴 주제에 엄청 신나 하네.”
샬롯은 한숨처럼 투덜거렸다.
“지금 뭐라고 했지, 샬롯?”
“내가 틀린 말 했어?”
샬롯이 그를 쏘아보자 란슬롯은 황당한 눈으로 샬롯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샬롯은 당황하지도 않고, 그를 두려워하지도 않았다. 풀을 닮은 선명한 연두색 눈동자로 란슬롯을 당돌하게 올려다보았다.
쥐도 궁지에 물리면 고양이를 문다고, 가끔 악다구니를 쓰는 거야 봤지만 이렇게 한 점 두려움조차 없는 눈은 처음 보았다.
마치, 네까짓 건 나를 어떻게 할 수 없다는 눈이었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다.
귀족가의 후계자들 중에서 무리에 껴서 놀지 않게 된 다 큰 형님 누님들을 빼고서는, 란슬롯이 우두머리로 정해진 지 오래였다.
샬롯을 비롯해 그 누구도 체제에 순응하며 지내 왔다.
이렇게 뒷골이 땡기는 일도, 란슬롯의 십삼 년 인생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금방 풀어 줄 생각이었는데, 안 되겠어.”
“뭐?”
“야, 가자.”
샬롯이 뭐라고 말을 덧붙일 새도 없이, 란슬롯을 비롯한 아이 무리들은 썰물같이 정원을 빠져나갔다.
도와줄 이라곤 아무도 없어지고, 정원에 꽤 오랜 정적이 찾아들었다.
짹, 짹.
하지만 의미 없는 새소리만 울려 퍼지는 것도, 솔직히 좋았다.
얼기설기 얽힌 나무 그늘을 바라보는 것도.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을 보는 것도.
다시 한번 얻은 생의 시작이 물에서 기어 나와서 축축한 채로 나무에 묶이는 거라는 점만 빼놓고는.
“왜 쓸데없는 짓을 했지?”
나지막한, 변성기를 아직 지나지 않아 맑디맑은 사내아이의 목소리가 그 침묵을 깨뜨렸다.
샬롯은 고개를 돌려, 나무에 묶이고도 청초한 요제프 황자를 바라보았다.
“왜 쓸데없는 짓이라고 말해?”
“쓸데없는 짓이라고 안 하면, 멍청한 짓이라고 할 수 있겠군.”
샬롯은 요제프 황자의 새까만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
그 안에는 이 상황에 대한 분노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이젠 이런 괴롭힘이 일상이 되어 버린 상황인 거겠지.
“그렇게 말하지 마. 너는…….”
“왜?”
“너는…….”
병상에 누워 있는 동안, 내내 내게 친구가 되어 줬었어.
하지만 그렇게 말할 수는 없었다.
미치광이처럼 굴다가도, 또 가끔 제 나라 백성들을 위해서 진심으로 일하는, 그 남자 주인공 요제프가 제겐 오랜 시간 친구였다고 말해 봤자 이해받을 수 있을 리 없었으니까.
“불쌍해서 그랬다, 왜.”
“……뭐?”
“그럼, 안 불쌍해? 발이 땅에 닿지도 않는데?”
샬롯의 말에 요제프가 인상을 찡그렸다.
“같은 처지가 된 주제에, 잘도 말하는군.”
“누님한테 고맙다고 말할 준비나 해.”
“……누님?”
‘아차. 여기선 샬롯이 나이가 더 어리지.’
“멋있으면 다 누님이랬어.”
샬롯은 제멋대로 말하곤, 밧줄에 바짝 눌려 있는 손으로 남아 있는 조금의 기를 보냈다.
기라는 것은, 호흡을 통해 몸속을 돌아다니는 흐름에 불과한 것이나, 사용하는 사람의 이해도와 능숙함에 따라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기도 하고 성질을 바꾸기도 하는 것이다.
바로 지금처럼.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고 봐도 무방할, 아주 조금의 기운으로 샬롯은 잘도 손끝에서 날카로운 형상으로 뭉친 기 덩어리를 만들어냈다.
그리고 그녀는 그것을 이용해 밧줄을 쉽게 끊어 냈다.
밧줄은 꽤 단단하게 묶여 있었지만, 한 군데를 풀어내자 전체를 푸는 건 쉬웠다.
“으랏차!”
밧줄이 다 풀어지는 것과 동시에, 샬롯은 땅으로 가볍게 뛰어내렸다.
그리고 양손이 자유로워진 그녀는 요제프 황자에게 다가가 끙끙거리며 끈을 풀어 주었다.
오래지 않아 요제프 황자도 땅에 내려섰다.
황자의 몸은, 정말 엉망진창이었다.
밧줄에 얼마나 오래 묶여 있었던지, 밧줄 자국이 진하게 남은 것은 물론이고 손이나 발에 피가 쏠려 붉게 변해 있었다. 게다가 짧은 반바지 아래로 보이는 허벅지에 아까는 보지 못했던 피멍들이 드러나 있었다.
“……이게 다 뭐야?”
탁.
샬롯이 저도 모르게 손을 뻗으려는데, 요제프가 그녀의 손을 쳐 냈다.
그러곤 나무 밑동 아래에 엉덩이를 붙이고 주저앉았다.
그의 반응에 당황한 건 샬롯이었다.
“왜 그래? 아까 걔들 돌아오면 또 괴롭힘당할 거잖아. 여기 계속 있으면 어떻게 해?”
요제프가 어이없다는 눈으로 샬롯을 쏘아보았다.
“지금까진 무슨 일이 있어도 관여하지 않더니, 오늘따라 말이 많군.”
“그게 아니라, 나라면 어디라도 가겠다 싶어서 그러지.”
“가면?”
“……어?”
“내가 이 자리를 피하면, 당장이라도 모면할 수 있을 것 같나? 그 지독한 싸이코 리카르도 형님이 그러도록 둘 것 같냐고.”
요제프의 지금 나이가 몇 살일까?
많아 봤자 열두 살? 열한 살?
워낙 비쩍 말라서 제대로 나이를 가늠하기조차 어려웠다.
샬롯은 그런 어린 그가, 그렇게까지 세상에 초탈했다는 듯 말하는 것 자체가 너무 안타까웠다.
저도 겪어 봤으니까.
그 누구에게도 기댈 수가 없으니까, 스스로 자라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을.
그 누구도 저를 구해 줄 수 없으니까, 상처받지 않도록 마음을 닫아 거는 법이라도 배워야 하는 상황을.
“요제프.”
“왜.”
“요제프. 괜찮아. 다 괜찮아. 내가 지켜 줄게.”
“지금 대체 뭐라고 하는…….”
“……진짜 못된 놈들이다. 진짜로…… 흑. 흐끅.”
샬롯은 저도 모르게 눈물을 터뜨렸다.
열넷일 때도, 열다섯일 때도 이렇게 울어 본 적이 없었다.
너무너무 견디기 어렵던 시절에도, 이렇게 울어 본 적이 없었다.
전생의 자신은, 스스로를 가엾어하기도 힘들 만큼 쫓기면서 살았다.
지금의 요제프가 그렇듯이.
그래서 더 눈물이 났는지도 모른다.
그가 스스로 울지 않으니까. 제가 울어 줘야겠다고 생각이 들었는지도 모른다.
란슬롯의 협박 앞에서도 의연하던 샬롯이 갑자기 눈물을 쏟자, 요제프는 문득 일어나서는 그 자리에 우뚝 선 채로 멍하니 그녀를 지켜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