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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렘 게임의 공략캐가 되었다-95화 (95/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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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서 말인데. 두 사람에게 부탁할 게 있어요. 무리한 부탁일 수도 있는데….”

    “기사님께 도움이 된다면야 헤슬루는 어떤 일이라도 할 수 있답니다. 라라벨 씨도 그렇죠?”

    헤슬루가 라라벨에게 고개를 돌리며 대답을 재촉했다.

    “그래, 그래. 나도 언젠가 한 번은 빚진 걸 갚아야 하지 않겠어? 그러니 뜸 들이지 말고 속 시원히 털어놓으라고.”

    두 사람에게 감사 인사를 한 후 나는 조금 긴 이야기를 시작했다. 크로버와 카미앙, 그리고 라암의 계약에 관한 이야기였다.

    물론 먼 나라에서 전해지는 전설이라고 둘러대며 크로버와 카미앙의 이름을 바꾸기는 했다.

    “이게 끝이란 말인가요? 라암과 계약을 맺은 나쁜 놈이 왕세자가 되고 모두가 진짜 왕세자를 잊어버린 게?”

    헤슬루가 석연치 않다는 듯 입을 삐죽거렸다. 라라벨도 아무 말 없는 것 보니 이게 바렌시드의 이야기인 건 전혀 눈치채지 못한 게 분명했다.

    하긴, 이런 황당한 일이 자신이 사는 곳에서 일어났다고는 상상하기 힘들 터였다.

    “아직 끝나지 않은 이야기라고 하던데요.”

    “작가가 마무리를 어떻게 할지 몰랐던 건 아닐지.”

    대수롭지 않게 이야기를 흘려들은 라라벨이 중얼거렸다. 이런 허황된 이야기는 그만두고 빨리 본론을 말하라는 듯한 태도였다.

    “제가 원하는 건 이 이야기로 바렌시드 극장에서 연극을 하는 거예요.”

    “응? 그럼 지금 말한 게 극본의 줄거리였단 말이야?”

    라라벨이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진심이냐는 듯 날 바라보았다.

    “네, 가능할까요?”

    “흐음…. 뻔한 얘기겠지만 제일 중요한 건 돈이야. 돈이 있어야 작가든, 극장 지배인이든, 배우든 움직일 테니까.”

    라라벨의 손가락이 머리끝을 뱅뱅 돌리며 컬을 만들었다. 라라벨이 무언가를 고민할 때의 습관이었다.

    연극을 상연하는 데 제법 돈이 많이 든다는 건 알고 있었다. 저런 반응을 보이는 게 당연했다.

    ‘좀 뻔뻔하긴 하지만….’

    난 헤슬루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나와 눈을 마주한 채로 몇 차례 눈꺼풀을 깜박거리던 헤슬루가 웃음을 지었다.

    “알겠어요. 헤슬루는 저를 부르신 이유를 눈치챘답니다.”

    다행히도 헤슬루는 내가 먼저 말을 꺼내기도 전에 오케이 사인을 보냈다.

    “모도루 백작가에서 후원하도록 하겠어요. 그러면 자금 문제는 해결이랍니다.”

    일말의 고민도 없이 대답하는 헤슬루를 보며 라라벨이 감탄사를 내뱉었다.

    “이야, 모도루 백작가에 돈이 많다는 소문은 들었지만 대단하네. 돈을 준다면야 못할 건 없지. 어쨌거나 극장 최고의 배우께서 추천하는 연극이니까.”

    “문제는 얼마나 빨리 극을 무대에 올릴 수 있느냐야. 보통은 준비하는 데 시간이 얼마나 걸려?”

    “대본도 새로 써야 하고, 소품도 만들어야 하고, 배우들이 연습도 해야 하니까…. 빨라도 두 달?”

    두 달이라니, 그건 너무 느렸다. 그렇게 오랫동안 숨어있을 곳도 마땅치 않았고 무엇보다 그렇게 오래 기다릴 인내심이 남아있지 않았다.

    “일주일은 어때요?”

    일주일은 절대로 불가능하다는 걸 알면서도 협상을 위해 무리한 카드를 내놓았다. 말도 안 된다는 듯 찌푸려 드는 라라벨의 얼굴을 보며 헤슬루가 급히 조건을 덧붙였다.

    “모도루 백작가에서 공연 준비에 필요한 인력을 지원해 줄 수 있답니다!”

    너무 무리하는 게 아닌가 싶어 헤슬루를 쳐다보자 헤슬루가 동그란 눈을 반짝이며 대답했다.

    “걱정 마세요. 아버지께선 제 목숨을 구해주신 생명의 은인께 뭐든지 해 드리고 싶다고 하셨답니다.”

    “정말이야 아가씨? 그 말 책임질 수 있어?”

    헤슬루의 말을 다시 확인한 건 내가 아니라 라라벨이었다.

    “나중에 가서 이건 아버지가 정하시는 일이라 저는 몰라요, 어쩔 수 없어요, 이런 식으로 나오면 곤란해지니까.”

    “모도루 백작가의 금고를 걸고 약속하겠어요. 염려하시는 일은 절대 없을 거랍니다.”

    모도루 백작가의 명예도 아니고 이름도 아니고 금고라니. 이쯤이 되자 귀족의 거창한 화법을 좋아하지 않는 라라벨조차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헤슬루 양까지 저렇게 나오니 어쩔 수 없네. 어떻게든 사람들을 구슬려서 보름 안에 완성해 볼게. 일주일은 무리야. 단, 공연의 완성도가 떨어지는 건 고려해 줘야 해.”

    라라벨이 앞으로의 고생이 훤히 보인다는 듯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근데 이왕 시작하는 거 이유를 좀 물어봐도 될까? 난데없이 연극이라니, 그것도 쫓기는 중이라면서. 역시 이상하잖아?”

    “맞아요. 하지만 기사님께서 비밀로 하고 싶으시다면 말씀하지 않으셔도 돼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내 입을 빤히 바라보는 게 헤슬루 역시 대답을 원하는 눈치였다.

    투자자와 영향력 있는 출연자가 저렇게까지 원하는데 무시하는 건 아무래도 예의가 아니었다.

    무엇보다 일을 진행하는데 사기가 떨어질 위험도 있었다.

    내가 대답을 망설이는 사이, 옆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방금 녹시아 님께서 하셨던 이야기, 그 이야기의 끝을 맺기 위해서랍니다.”

    크로버가 싱긋 웃으며 답했다.

    ***

    거리에는 크로버의 얼굴을 그린 수배 전단이 붙여졌다고 했다. 물론 직접 보지는 못했다. 오후의 수다 카페 지하실에 숨어 밖으로는 나가지 않았으니 말이다.

    카미앙은 나 역시도 찾고 있는 듯했지만 크로버처럼 수배 전단이 붙거나 하진 않았다. 하긴 내게 무슨 죄목을 붙여 수배하겠나 싶었다.

    크로버는 성물을 가져오기 위해 대신전으로 돌아갔다. 신전은 병사들의 감시가 심해 걱정이 되었지만 크로버는 대신관님이 계시니 걱정할 것 없다며 날 안심시켰다.

    연극 준비는 순조로웠다. 아니, 이런 식으로 말하면 분명 라라벨이 화를 낼 터였다. 악덕 사장 마인드라고 말이다.

    다시 말해 순조롭다는 의미는 외부의 방해 없이 준비에 집중할 수 있는 분위기라는 뜻이었다.

    바렌시드 극장에서 일하는 모든 직원이 밤낮없이 작업에 매달리고 있었다. 야근이며 특근 수당을 계산해 보면 월급보다도 높게 나올 게 분명했다.

    이렇게 극이 상영되기 며칠 전까지 잠적해 있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세상만사가 내 뜻대로 흘러가는 건 아니었다.

    “라라벨이 전해달라고 한 말이 있다고요?”

    저녁을 들고 와준 카페 주인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응 그 뭐냐 바르하트인가 뭔가 하는 후작에게서 연락이 왔다 허드라구.”

    바르하르트란 이름에 순간 바짝 긴장되었다. 지금 루안의 목숨을 연장해 주고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베르만이었으니 말이다.

    “일단 이것 좀 봐봐. 오늘 신문이여.”

    바르트 신문사의 일간지였다.

    ‘올 것이 왔구나.’

    역시 베르만은 일 처리가 빨랐다. 첫 줄에 기대했던 제목이 볼드체로 적혀있었다.

    <가짜 향수 사건 뒤에 감춰져 있던 바이난 공국의 무서운 음모>

    ‘이거 제대론데? 바이난 공국을 기사 제목에 적었잖아.’

    원래도 바이난 공국과의 교류를 마땅치 않게 여기고 있던 바르하르트 가문이었지만 이 정도면 대놓고 선전포고를 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기사의 내용 역시 제목 대로였다.

    돈에 눈이 먼 공녀 마룬시에가 가짜 향수에 이어 가짜 치료제까지 판매할 계획이었다는 것이 신랄하게 적혀있었다.

    마룬시에의 음모를 이 정도로 캐냈다면 이 사건에 카미앙이 개입되었다는 사실을 알아내는 건 시간문제였다.

    ‘아니, 이미 알아냈을지도 모르지.’

    “그 후작이란 양반이 라라벨에게 루안을 지키고 싶으면 모리뭐시기 백작을 만나게 해달라고 혔다는디. 라라벨은 그 백작이 어딨는질 전혀 모른다는겨. 얼마나 답답한 노릇이여? 그래서 안달이 나서 일루 찾아왔지 안컸어.”

    베르만은 루안에게서 들을 수 있는 이야기는 다 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일개 일꾼이었던 루안의 정보에는 한계가 있었다.

    ‘크로버가 모리아리티 백작으로 베르만을 찾아가 힌트를 줬다고 했으니까.’

    크로버의 정체를 모르는 베르만으로서는 모리아리티 백작을 찾는 게 최선이었을 것이다. 백작이 루안의 안위를 부탁했으니 라라벨과도 당연히 아는 사이일 거라 여긴 모양이었다.

    “라라벨에게는 걱정 말라고 전해주세요.”

    “뭐여. 무슨 방법이 있는겨?”

    “모리아리티 백작 대신 제가 후작의 궁금증을 전부 풀어줄 수 있거든요.”

    이쯤에서 베르만과 만나는 것도 괜찮겠지 싶었다. 어차피 최후의 작전을 진행하기 전에 한번은 만나야 할 상대였다.

    “이틀 뒤 밤 열한 시, 후작저로 찾아간다고 전해주세요. 라라벨이라면 후작저에 서신을 보낼 수 있을 거예요.”

    “밖에 나가려고? 혹시 후작이 기사님을 잡아가기라도 하면 어떡할겨?”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럴 리 없어요. 마음은 그렇다고 해도 절 잡아갈 수는 없을 거예요.”

    ***

    바르하르트 가를 상징하는 독수리가 어둠 속에서도 번쩍거리고 있었다.

    쇠로 만든 듯한 독수리가 정문 양쪽 기둥에 나란히 앉아있는 모습이 제법 위압적으로 느껴졌다.

    같은 귀족 저택이라고 해도 모도루 백작가와는 분위기가 완전히 달랐다.

    푹 눌러썼던 모자를 벗어 대충이나마 머리를 다듬었다.

    어차피 밤손님처럼 보이는 시커먼 복장이었지만 그래도 옷매무새를 바로 고쳤다. 후작가는 왠지 그래야만 할 것 같은 곳이었다.

    “11시의 손님이라고 전해주세요.”

    미리 준비해둔 말을 하자 문 앞에 있던 하인이 군말 없이 날 저택 안으로 인도했다.

    “작은 주인님, 손님을 모셔왔습니다.”

    “여기까지 오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모리아리티…?? 파르미엔 영애?”

    베르만은 응접실 소파에 앉아 느긋하게 모리아리티 백작을 기다리던 모양이었다. 갑자기 내가 나타났으니 저리 놀라는 것도 이해는 갔다.

    “모리아리티 백작님은?”

    “그분 대신 제가 왔어요. 소후작님이 원하는 대답은 저도 다 가지고 있을 듯해서요.”

    내 등장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베르만의 곁을 유유히 지나 소파에 앉았다.

    “손님에게 식사까진 아니더라도 차 한 잔쯤은 줄 수 있겠죠?”

    베르만이 눈짓하자 하인이 밖으로 나갔다.

    “파르미엔 영애. 왕세자님께서 몹시도 찾고 계시던데 이렇게 쉽게 제 앞에 나타나실 줄 몰랐습니다.”

    그는 내 맞은편에 앉아 습관적으로 시가를 권했다. 질색하는 표정을 짓자 내게 권한 게 뭔지 알아챘다는 듯 얼른 서랍 안쪽으로 그것을 밀어 넣었다.

    “예전의 베르만 님이었다면 당연히 오지 않았겠죠. 하지만 지금은 다르시잖아요?”

    베르만이 미간을 찌푸렸다. 대체 이 짧은 대화에서 어떤 포인트가 그의 심기를 어지럽혔는지 짐작이 가질 않았다.

    하긴 그는 처음부터 녹시아를 싫어했다. 게다가 지금은 왕세자에게 쫓기기까지 하고 있으니 나와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모욕적이라 여길지도 몰랐다.

    ‘스킬을 사용할까?’

    잠깐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스킬을 쓰지 않아도 베르만 정도는 충분히 상대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다.

    거기다가 지금 칼자루를 쥐고 있는 건 내 쪽이었다.

    “사교계에 제 소문이 꽤나 재미있게 났을 것 같은데. 좀 알려주시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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