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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마워요. 덕분에 물 한 방울 안 묻히고 강을 건넜네요.”
“제 말대로 하길 잘했습니다.”
크로버는 제법 뿌듯해 보이는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그런 표정을 짓기엔 상태가 처참했다. 허벅지까지 차오른 강물 덕에 바지가 완전히 젖어버린 것이다. 곧 해가 질 테니 자연스럽게 마르기를 기대하기도 어려웠다.
“차라리 상의가 젖었다면 벗으라고 하겠지만….”
“바지는 곤란합니다! 게다가 여긴 저번처럼 동굴도 아니고요.”
나도 모르게 시선이 그쪽으로 향한 탓인지 크로버가 양손으로 아래를 가리며 주장했다. 물론 나도 그에게 바지를 벗으라고 할 생각은 없었다.
“알아요. 그쪽을 벗고 다녔다간 카미앙에게 발각되기 전에 치안대에 잡혀가겠죠.”
“곧 마르겠지요. 괜찮습니다.”
그가 바지 밑단을 말아쥐며 물을 짜냈다.
“그것보다 제 이야기를 들어보시겠습니까? 왕세자를 육체적으로 심리적으로 동시에 몰아붙일 수 있는 계획이 생각났습니다.”
계획이란 말에 귀가 번쩍 뜨였다.
“대신전에 봉인되어있는 성물 중 ‘진실의 목소리’와 ‘진실의 거울’이란 물건이 있습니다. 한 사람의 모습과 목소리를 멀리 떨어져 있는 다른 사람에게 전해주는 성물이지요.”
크로버의 설명을 들어보니 이건 생방송이 가능한 장비나 다름없었다.
“카미앙을 유인해서 그가 제 입으로 진실을 실토하게 만드는 겁니다.”
“그리고 그 장비로 사람들에게 카미앙의 모습을 실시간으로 중계한다 이거죠?”
“그렇습니다. 왕과 왕비 그리고 고위 귀족들에게 자신의 비밀이 알려지면 녹시아 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를 심리적으로 몰아붙일 수 있을 겁니다.”
“추가로 저한테 좀 얻어맞으면 절로 후회하게 되겠는걸요?”
주거니 받거니 하며 스토리가 척척 이어지는 게 느낌이 좋았다. 이 정도라면 충분히 카미앙을 후회하게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잠깐만요. 근데 봉인된 성물이라면 사용을 못 한다는 말 아닌가요?”
“지금은 그렇습니다만 시스테미우스님께 간곡히 기도를 드리면 분명 허락해 주실 거라고 봅니다.”
그리고 곧 크로버는 기도를 하기 시작했다. 문득 크로버도 나처럼 시스템의 메시지를 받는 것일까 궁금해졌다.
‘그럼 나도 시스템을 좀 불러볼까? 두 명이 기도하면 효과가 더 좋지 않겠어?’
아이템을 만들어 달라는 것도 아니고 그저 있는 아이템을 사용할 수 있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이것도 들어주지 못한다면 신 자리에서 물러나는 편이 나았다.
레벨에 따라 보상을 차등 지급하는 것처럼, 카미앙의 상태에 따라 성물의 사용 가능 여부가 정해지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지금까지 봉인되어 있던 건가.’
마치 카미앙을 후회하게 만들기 위해 만들어진 성물 같았다.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건지 시스템이 튀어나왔다. 이런 빠른 반응, 아주 마음에 들었다. 메시지를 확인한 것과 거의 동시에 크로버가 모으고 있던 두 손을 내려놓았다.
“녹시아 님께서도 시스테미우스님의 전언을 받으셨습니까?”
“네, 허가가 났네요. 일을 시키려면 당연히 장비 정도는 챙겨줘야 하는 거 아니겠어요?”
나와는 달리 크로버는 시스템에게 감사의 인사를 올리는 것 같았다. 신실하고 겸손한 사람들에 둘러싸여 있다 보니 시스템이 이렇게나 불친절해진 게 분명했다.
나는 시스템이 변명을 시작하기 전에 얼른 입을 열었다.
“그럼 제가 카미앙을 유인할 테니 당신이 사람들을….”
“아닙니다! 카미앙을 유인하는 쪽은 바로 저입니다. 당신에게 더는 위험한 일을 시킬 순 없습니다.”
크로버의 붉은 눈동자가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 제 나름대로 굳은 결의를 한 것 같았다. 내게 위험한 일을 시키고 싶지 않다는 그 마음도 고마웠다.
하지만 크로버가 카미앙을 유인한다는 건 전략상 좋지 못했다.
“당신이 어떻게 카미앙을 유인한다는 거죠?”
“오늘 제가 왜 이런 모습으로 카미앙의 앞에 나타났겠습니까?”
“…카미앙이 당신을 알아봐 주길 바랐나요?”
“그렇습니다.”
“하지만 아까 봤잖아요? 카미앙은 당신의 존재를 전혀 눈치채지 못했어요.”
“아까는 말싸움에 정신이 팔려서….”
크로버는 카미앙의 속마음이 어땠는지 모르니 저런 기대를 할 수 있는 거였다. 카미앙이 지금쯤 정원에서의 일을 곱씹고 있다 할지라도 그건 아니었다.
크로버의 모습에서 제 형을 떠올리기는커녕 그저 크로버에게 들은 모욕적인 말들만 되새기며 이를 갈고 있을 게 뻔했다.
“아뇨. 카미앙은 절대 당신이 레이워스라는 걸 알지 못해요.”
크로버의 시선이 땅으로 떨어졌다. 어쩐지 잔인한 말을 한 것 같아 미안했지만, 그의 결심을 꺾으려면 어쩔 수 없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풀벌레 소리에 하늘을 올려다보니 어느덧 밤의 색으로 물들어 가고 있었다.
“좋습니다. 저는 카미앙을 유인할 수 없다는 걸 인정하죠.”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귓가에 또다시 날 놀라게 하는 말이 들려왔다.
“하지만 제가 카미앙을 만나러 간다는 건 변함이 없습니다.”
“네? 방금 인정했으면서 왜 또….”
“성수요. 한번 사용할 수 있을 정도의 성수가 아직 남아있습니다.”
성수라는 말에 크로버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짐작이 갔다. 그동안 검은 머리에 회색 눈으로 변장을 하고 다녔던 그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이번엔 저로 변장을 한다는 뜻인가요?”
크로버가 고개를 끄덕였다.
“말도 안 돼요. 키는 어떻게 하려고요? 목소리는요? 성수로 바꿀 수 있는 건 고작 눈이나 머리카락 색깔뿐이잖아요?”
“더 많은 신성력을 사용하면 완벽하게 변신을 할 수 있습니다. 보통 사람들이라면 불가능하겠지만요.”
크로버야 고속 충전기와 같은 신성력을 가졌으니 저런 소리를 하는 것도 이해는 가지만 난 아직 그의 말에 동의할 수 없었다. 크로버가 더욱 열을 내며 날 설득하기 시작했다.
“게다가 저는 마룬시에가 쓰는 향에 내성이 있습니다. 중독된다든가 정신을 잃는다든가 할 위험이 없지요. 녹시아 님의 실력을 잘 아는 카미앙이 어떤 방법으로 접근을 해 올지는 뻔하지 않습니까?”
오늘 아침에 환각제에 당했던 몸이었다. 그 말에는 아무런 반론도 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카미앙을 흠씬 두들겨 주는 일이라면.”
크로버의 한쪽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저도 자신 있습니다.”
혹시 자신이 가겠다고 완강히 주장하는 이유가 저것 때문은 아닐까 싶은 미소였다.
***
“기사님! 대체 어디 계셨던 거예요! 헤슬루는 기사님께서 바이난 공국으로 잡혀가시기라도 한 줄 알고 정말 많이 걱정했답니다.”
“제가 뭐라고 했어요. 기사님은 멀쩡하실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잖아요.”
“물론 기사님이 누구보다 강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헤슬루의 눈에서 뚝뚝 눈물이 떨어졌다.
“맞아요. 그래도 이렇게 멀쩡히 있으면서 헤슬루 양에게 기별을 넣지 않은 건 정말 잘못한 일이긴 하죠.”
라라벨이 헤슬루를 토닥이며 내게 눈을 흘겼다.
“네네. 다 저의 불찰입니다. 부디 두 분께서 넓은 아량으로 용서해 주시길.”
나는 구십 도로 허리를 꺾으며 두 사람에게 고개를 숙였다. 내 반응이 너무 과했는지 라라벨이 날 일으켜 세우며 웃었다.
“농담이야, 농담. 이러면 우리가 난처해지지. 녹시아가 실제로 모도루 백작 저를 떠나있던 건 겨우 이틀뿐이니 말이야.”
“이틀이긴 해도 그냥 이틀이 아니었답니다! 라라벨 님이 그 티파티 분위기를 모르셔서 그래요. 게다가 기사님은 의미심장한 쪽지를 전달하라고 하시고는 사라져 버리셨답니다.”
아무래도 헤슬루가 내 걱정을 엄청나게 한 모양이었다. 라라벨까지 찾아 바렌시드 극장까지 간 걸 보면 말이다.
그런 헤슬루를 달래고자 라라벨이 좋은 곳을 구경시켜준다고 하며 오후의 수다 카페로 데려왔다.
카페에 도착한 내가 주인에게 부탁해 라라벨을 부르려고 하던 찰나였다.
“만약 헤슬루가 라라벨 님과 함께 있지 않았다면 헤슬루한테는 연락도 안 하셨을 거란 걸 잘 안답니다.”
“아뇨, 절대 아니에요.”
“치, 거짓말.”
“정말이에요. 모도루 영애께 따로 부탁할 일이 있었거든요. 좀 염치없는 일이긴 하지만.”
부탁이란 말에 헤슬루는 도리어 반갑다는 듯 의자를 내 쪽으로 바짝 끌어당겼다.
“뭔데요? 헤슬루한테 부탁이라니.”
“잠시만요. 일단 제 얘기부터 들어주세요.”
“그래. 녹시아, 네 얘기부터 들어야겠어. 대체 이 남자는 누구야?”
라라벨이 내 곁에 앉아있는 크로버를 가리켰다. 크로버는 이제야 자기 차례가 왔다는 듯 두 사람을 향해 빙긋 웃었다.
“안녕하세요. 모도루 영애, 라라벨 씨. 절 그렇게 경계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낯선 사람은 아니니까요.”
“글쎄요. 저로선 충분히 낯선 얼굴인데요?”
라라벨이 가늘게 뜬 눈초리로 크로버를 훑었다. 그리고는 역시 모르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그때는 얼굴을 드러내지 않았으니까요.”
저렇게 말을 뱅뱅 돌려봤자 라라벨의 눈 밖에 날 뿐이었다. 난 라라벨이 축객령을 내리기 전에 얼른 말을 가로챘다.
“예지의 신관 알지?”
갑자기 그 이름이 왜 나오냐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라라벨과 헤슬루가 얼굴을 끄덕였다.
“네, 제가 바로 그 예지의 신관이었던 사람입니다.”
“예지의 신관이요? 예지의 신관님이 이렇게 잘생긴 분이었다니….”
순수하게 감탄한 헤슬루는 깜짝 놀란 듯 제 입을 손으로 막았다. 하지만 라라벨은 눈 하나 깜박하지 않고 크로버의 말을 받았다.
“예지의 신관이었다면 지금은 아니란 말씀이네요?”
“네. 앞으로는 예지의 신관으로 있기 어려워져서 말이죠.”
“그럼 지금은 뭐 하시는 분인지 정말 궁금하네요.”
아무래도 라라벨은 내게 들러붙은 새로운 놈팡이가 아닌지 염려하고 있는 것 같았다.
“곧 직종을 바꿀 예정이어서요. 그동안은 잠시 도망자입니다. 어쩌면 수배령이 내려질지도 모르겠네요.”
“이분 농담 좀 할 줄 아시네. 연기라도 하셨나 봐요?”
크로버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자 소파에 비스듬히 기대있던 라라벨이 자세를 바로 했다.
“진짜? 진짜 도망자라고요?”
헤슬루와 라라벨이 나와 크로버를 번갈아 가며 쳐다봤다.
“맞아요. 그러니까 우리를 만난 건 비밀로 해 줘요.”
“기사님까지요? 그 말은 기사님도…. 도망자?”
“어쩐지, 주인장이 지하실로 안내할 때부터 심상치 않더니만.”
헤슬루는 다시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주먹을 꽉 쥐었다. 그 옆에서 라라벨은 관자놀이를 누른 채로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대체 누구한테 쫓기는 건가요? 역시 바이난 공녀인가요?”
“바이난 공녀도 적이긴 하지만.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카미앙 왕세자예요.”
“그런 쓰레기 같은 녀석은 버리고 좋은 남자 만나랬더니 신관을 만난 거야? 그래서 왕세자가 두 사람을 쫓는 거고?”
“어느 정도 진실과 가깝습니다.”
라라벨의 표현이 마음에 들었는지 크로버가 냉큼 동의했다.
라라벨의 좋은 남자 기준이 얼마나 엄격한지 크로버는 아직 모르고 있었다.
난 급히 화제를 바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