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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렘 게임의 공략캐가 되었다-93화 (93/95)

93

“그러네요. 나도 깜빡하고 있었어요.”

나는 부랴부랴 공략 대상인 카미앙의 상태창을 열었다. 아까는 경황이 없던 나머지 내가 잘못 본 걸지도 모른다는 일말의 기대감을 안고 말이다.

헛된 기대였다. 후회라는 감정은 건너뛴 것 같은 카미앙의 상태는 물론이요, 끝에 붙어있는 물음표까지 그대로였다.

“이런 젠장!”

“뭐, 뭡니까. 녹시아 님?”

내 뒤를 따라오고 있던 크로버의 어깨가 움찔거리는 게 보이는 듯했다.

아무리 기사라지만, 백작 영애인 녹시아의 감정표현으로는 너무 과격한 단어였나? 하지만 ‘어머나’ 라든지 ‘이걸 어쩌지’와 같은 말로는 이 심정을 담아낼 수가 없었다.

“설마 아까는 충동적으로 그런거고 이제 와 생각해보니 후회가 된다 그런 건 아니시겠죠?”

“후회라고요?”

‘후회’라는 단어가 귀에 꽂힌 나머지 다른 말은 전부 튕겨 나가버렸다.

“전혀 후회를 안 한다는 게 문제죠.”

“그게 왜 문제가 되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그게 말이죠….”

막상 설명하려니 말이 너무 길었다. 게다가 크로버가 내 뒤꽁무니를 따라오고 있는 지금은 대화를 나누기 적당한 타이밍이 아니었다.

“나가서 설명해 줄게요.”

“네….”

어쩐지 풀 죽은 것 같은 크로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희미한 빛을 따라가니 곧 흙더미로 막혀있는 출구가 나왔다. 몇 번 손으로 치니 와르르 힘없이 무너져버렸다. 그래도 비밀 출구인데 너무 허술한 거 아닌가 싶었다.

밖은 인적 없는 강변이었다. 마차를 타고 다니는 다리는 한참 아래쪽에 있어 여기선 보이지도 않았다. 왜 출구를 저렇게 해놓았나 했더니만 이런 구멍은 누가 발견한다 해도 그저 들짐승이 드나드는 곳으로만 여길 게 뻔했다.

“아우 허리야. 땅굴이 조금만 더 길었으면 허리 나갈 뻔했어요.”

나는 양팔을 들고 허리를 쭉 늘리며 스트레칭을 했다. 단련된 녹시아의 몸도 피로를 느끼는 일이니 크로버는 오죽하랴 싶었다.

“걸을 만해요? 여기서 좀 쉴까요?”

내 예상과는 달리 크로버는 땅 위에 드러눕지도, 앓는 소리를 하지도 않았다. 그 대신 냅다 내게 다가와 조금 전 일을 물었다.

“아까 후회를 안 해서 문제라는 말씀 말입니다. 무슨 뜻이죠?”

땅굴을 지나는 내내 이 생각만 하고 있던 게 분명했다.

“하여튼 당신도 집요한 구석이 있다니까요.”

“그럴 수밖에 없는 일 아닙니까.”

하긴 젠장이란 발언으로 크로버를 놀라게 했으니. 크로버도 사태의 심각성을 예감한 듯했다.

“실망하지 말고 잘 들어요.”

나도 카미앙의 변화에 상심하기는 했지만 크로버에 비할 바는 아닐 터였다.

라암의 저주를 카미앙의 후회로 풀 수 있다는 희망만을 보고 여기까지 온 크로버가 아니었던가. 게다가 카미앙에게 반해 라암의 저주를 푸는 데 실패했던 이전의 빙의자와는 달리 나는 목표의 막바지까지 다다른 상태였다.

“실망하지 말라 하심은….”

예고까지 했건만 크로버의 얼굴에는 벌써 낙심한 기색이 역력했다. 말을 꺼내기가 부담스러웠지만, 어차피 꼭 한번은 해야 할 말이었다. 입술을 꾹 깨물었다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우리 계획을 수정해야 할 것 같아요.”

“우리 계획이요?”

계획이라는 말로 운을 띄우길 잘했다. 그 단어만으로도 안심이 된다는 듯 크로버는 물을 준 화분처럼 되살아났다.

“그것까지 생각하고 계셨습니까?”

“당연하죠. 당신도 나름대로 생각을 했었을 거 아녜요?”

“그럼요. 저도 이런 거라든지, 저런 거라든지….”

크로버의 얼굴이 점점 붉어졌다. 곧 카미앙을 벌할 생각을 하니 흥분되는 모양이었다.

“아무튼, 여러 가지 방향으로 계획을 세웠습니다. 녹시아 님은 어떤 계획을 세우셨기에 수정해야 한다고 하시는지 몹시 궁금합니다.”

“좋아요, 카미앙이 말이죠….”

“카미앙이라뇨? 여기서 그 이름이 왜 나옵니까?”

이야기를 시작하지도 않았는데 카미앙이란 이름만으로 크로버가 격한 반응을 보였다.

“그야 카미앙이 후회해야 하는데 안 하고 있으니 그렇죠.”

“그게 무슨??”

크로버가 머리 위에 물음표를 열 개쯤 단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당신도 다 알고 있다고 했잖아요? 내 목표가 카미앙의 후회를 받아 내는 거고 그게 곧 라암의 저주를 푸는 방법이라는 거. 아까 장미의 정원에서 왕비가 나타났을 때가 카미앙을 후회하게 할 최적의 타이밍이었거든요. 그래서 제가 회심의 일격을 가했는데….”

“잠시만요. 말씀을 끊어서 죄송합니다만 그 회심의 일격이라는 게 설마?”

“지금 생각하시는 그게 맞아요. 동의도 없이 갑자기 입을 맞춰서 미안해요.”

이번엔 타들어 간 잎사귀처럼 변한 크로버의 표정을 보니 갑작스러운 입맞춤에 대해 사과는 하고 넘어가야 할 것 같았다. 난 빠르게 사과를 하고 말을 이어갔다.

“그걸 보면 카미앙이 분명 후회할 거라 생각했거든요. 하지만 생각과는 다르게 날 원망하는 방향으로 상태가 변했어요. 깊은 원한이라도 있는 것처럼 ‘두고 보자.’ 이러면서 말이죠.”

“그러니까 녹시아 님께서 말씀하신 후회가 왕세자의 후회를 말씀하시는 거라 이거죠? 아까 그 키스는 전략적인 거였고.”

난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이지 희망과 절망을 동시에 안겨주시는군요. 하긴 그 입맞춤은 너무 갑작스러워서 뭔가 이유가 있을 거로 생각하긴 했지만.”

“절망과 희망이라뇨? 잘 못 들었어요.”

“아닙니다. 후회에 관한 게 왕세자의 이야기라 참으로 다행입니다. 아, 물론 왕세자는 후회를 해야 했지만요. 아무튼, 다행입니다.”

“다행? 다행이라뇨!”

대체 다행일 게 뭐가 있다고 다행 다행 거리는지 모르겠다. 멀쩡해 보인다 싶더니만 긴 터널을 지나는 동안 산소 부족으로 머리가 어떻게 된 걸지도 몰랐다.

“지금 우리는 망망대해에서 나침판마저 잃어버린 조각배 신세라고요!”

내가 봐도 퍽 적절한 비유였다.

“시스테미우스님께서 저희를 그냥 버려두실 리 없습니다. 게다가 이젠 모든 진실을 다 알아내신 녹시아 님도 함께 계시질 않습니까. 물론 저도 있는 힘껏 노력할 테고요.”

“당신…. 생각보다 긍정적이네요.”

“감사합니다.”

딱히 칭찬은 아니었지만, 좌절하는 것보다는 긍정 회로를 돌리는 쪽이 나을 터였다.

“하긴, 애당초 카미앙 같은 녀석이 이 정도로 제 잘못을 깨닫고 후회를 한다는 게 말이 안 되는 일이었어요.”

크로버와 난 수심이 좀 더 얕은 곳에서 반대쪽으로 건너가기 위해 강을 거슬러 올라갔다.

“제가 그동안 많이 겪어봐서 아는데 이런 부류들은 후회 같은 건 안 해요. 자기가 잘못했다는 생각을 전혀 안 하거든요. 네가 나 좋아서 그랬잖느냐. 내가 억지로 시켰냐? 이렇게 적반하장으로 나오죠. 그리고 지금 카미앙이 딱 그 꼴이에요.”

“역시, 적에 대해 이미 완벽하게 분석을 마치셨군요.”

분석이라면 분석일 수 있었다. 경험으로 쌓인 데이터가 있으니 말이다. 물론 그다지 자랑스러운 일은 아니었기에 크로버에겐 말하지 않았다.

“역시 억지로 후회하게 만드는 수밖엔 없겠어요.”

“억지로 후회를 하게 만드는 게…. 가능할까요?”

“그렇게 만들어야죠.”

난 오른손 주먹을 매만지며 씨익 웃었다. 내 주먹을 물끄러미 내려다보고는 카미앙이 물었다.

“무력을 쓰실 겁니까?”

“단순히 무력만으로 해결할 수 있었다면 진작 해결했겠죠. 카미앙을 육체적으로 심리적으로 동시에 몰아붙이는 게 포인트에요. 지금처럼 뻔뻔스럽게 있어서는 살아남을 수 없겠다 싶은 압박감이 들도록 말이죠.”

이야기는 여기까지였다. 카미앙을 억지로라도 후회시킬 구체적인 계획은 아직 생각하지 못했다.

난 강기슭으로 다가갔다. 이 정도면 폭도 좁고 가장 깊은 곳이라고 해도 물이 허벅지 위로 올라오진 않을 것 같았다.

“여기 어때요? 건널 수 있을 것 같은데.”

신발을 벗고 있자니 크로버가 내 앞에 섰다. 정확히는 무릎을 반쯤 굽히고 제 등을 내게로 향하고 있었다.

“뭐 하는 거죠?”

“보면 아시잖습니까?”

계속해서 그를 쳐다보는 중이었지만 대체 뭘 하겠다는 건지 감이 오질 않았다. 그냥 그의 넓은 등을 보고 있자니 꼬마였을 땐 아빠의 등에 업히기도 했었다는 게 떠올랐을 뿐이었다.

‘아빠도 딱 저런 자세로 날 업어줬었지.’

그러니까 크로버가 그때 아빠와 같은 자세로 내 앞에 서 있다는 뜻이었다.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 건데 지금 절 업겠다는 건 아니죠?”

“맞습니다.”

당연하다는 듯한 목소리였다.

“에이, 그건 아니죠.”

나는 코웃음을 치고는 반대쪽 신발 끈을 풀었다.

“땅굴에서 고생시킨 것도 미안한데 옷까지 젖게 할 순 없습니다.”

“제가 전쟁터에서 얼마나 구른 줄 알아요? 이런 것쯤은 고생 축에도 끼지 못한다고요.”

사실 크로버가 진짜로 날 업고 강을 건너려는 거라고는 생각하지도 않았다. 언제 밥이나 한번 먹자는 말처럼 그냥 인사치레라고 여겼다. 바렌시드식 매너 뭐 이런 느낌으로 말이다.

“진심으로 하는 말입니다.”

“각자 건너는 게 더 효율적이에요. 그리고 자꾸 잊으시는 모양인데 전 파르미엔의 기사라고요. 다른 여자들이랑 똑같이 여기시면 곤란해요.”

“물론 다른 여자들과 다르죠. 저한테 기사님은 아주 특별한 분이니까요.”

“…….”

“그러니까 파르미엔 기사 같은 건 다른 사람 앞에서 하십시오. 지금은 그냥 제 구애를 받는 레이디로 계셔줬으면 좋겠습니다.”

사람을 앞에 두고 이런 말을 잘도 하는구나 싶었다. 하지만 손발이 오그라드는 것과는 반대로 내 광대뼈는 이미 슬그머니 올라가고 있었다.

연인 사이에 갑을 관계라 하면 말도 안 되는 소리 같지만 난 지금까지 줄곧 내가 을인 연애를 해왔다. 매달리는 쪽도, 뭔가를 나서서 해주는 쪽도 늘 나였다. 예상치 못한 크로버의 배려에 마음 한구석이 채워지는 기분이었다.

‘물론 내가 크로버에게 갑질을 하겠다는 건 아니지만…. 그래 뭐 업히는 것 정도야 괜찮겠지.’

그렇게 생각을 하면서 난 짐짓 맘에도 없는 말을 내뱉었다.

“다섯 마리 말이 끄는 마차도 아니고 본인의 등이라니. 구애가 너무 소박한 거 아닌가요?”

크로버의 귀 끝이 붉어지는 게 보였다.

“그건 나중에 꼭 태워드리겠습니다. 약속하죠.”

사실 마차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난 그의 뒤로 다가가 목에 팔을 둘렀다.

“정말 업을 수 있겠어요?”

“문제없습니다.”

단호하게 답한 크로버가 나를 가뿐히 둘러업고는 강을 건너기 시작했다. 그가 한 발 한 발 내딛는 모습을 조심스럽게 내려다보았다. 안정적인 걸음걸이 덕분인지 넓은 등판 덕분인지 꼭 아빠 등에 업혔을 때처럼 편안했다.

오렌지빛으로 물드는 오후의 햇살이 따듯했다. 내 발치에서 찰방거리는 강물이 종종 발끝에 튀었다. 꼭 어린애가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크로버의 목덜미에 살짝 얼굴을 파묻었다. 그의 채취가 묻어났다. 터널을 지난 탓인지 비 오기 전 흙내음이 섞인 것 같기도 했다. 아니면 내리쬐는 햇살 탓인지 보송보송한 빨래에서 맡았던 그것이 느껴지는 것 같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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