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렘 게임의 공략캐가 되었다-92화 (92/95)

92.

“그렇습니다.”

‘카미앙을 후회 남주로 만들기’가 그렇게 어려운 퀘스트였다고? 혹시나 크로버가 회귀자들의 목표를 모르는 게 아닐까 싶어 다시 한번 물어보았다.

“뭐에요? 뭐에 실패했는데요?”

“모두 카미앙을 진심으로 사랑해 그와 결혼을 했고 전 라암을 봉인하는 데 실패했습니다. 그리고 이 세계는 라암의 시간에 갇힌 채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게 되었죠.”

공략 캐릭터와 플레이어 캐릭터인 카미앙의 결혼. 어쩌면 지극히 정상적인 해피엔딩이었다. 그것이 <왕세자의 특별한 연애사> 게임의 최종 목표였으니 말이다.

“신의 사자가 카미앙과 결혼을 하면 시간이 다시 되돌아간다는 건가요?”

게임 속으로 빙의해 녹시아로서의 삶을 살아온 내가 할 말은 아닐지 모르겠지만 이건 너무 비현실적이었다.

“그것이 라암의 저주입니다.”

“당신이 사람들의 기억에서 지워진 거, 그게 라암의 저주 아닌가요?”

“그건 라암의 희생자가 짊어져야 할 숙명입니다. 저주와는 다르지요.”

대체 라암인지 뭔지, 재주 한번 용했다. 이 정도면 다들 라암을 섬기지 왜 시스테미우스를 섬기는지 모를 일이었다.

내 말에 흥분한 것인지 시스템이 장문의 메시지를 보냈다.

‘그래서, 넌 성도들에게 뭘 해줬는데? 따지고 보면 이 나라 전체가 라암에게 당한 거 아니야?’

그런 이야기라면 나도 들어본 것 같았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신화에는 괜히 인간에게 과한 요구를 하며 궁지로 몰아넣는 신이 등장하곤 했다. 인간이 보기엔 아주 짜증 나는 일이었지만 말이다.

“훌륭하신 시스테미우스께서 신실한 자에겐 라암의 저주를 꿰뚫어 볼 수 있는 능력을 선사했다고 하는데요?”

크로버는 시스템과 실시간으로 대화를 나눈 나를 신기하다는 듯 바라보았다. 그는 다 식어버렸을 것 같은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그게 바로 저와 대신관님이십니다.”

“신성력이 높은 사람을 고른 건가 보죠?”

“아마도 그런 것 같습니다. 어머니의 가문에서는 대대로 많은 신관을 배출하셨으니 제게도 그 피가 흐르고 있는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럼 대신관과 당신도….”

“대신관님께선 저희 할아버지의 동생이시죠. 제겐 작은할아버지가 되십니다.”

크로버의 넘치는 신성력이 어디서 왔나 했더니 이쪽이었다. 어쩌면 왕비가 카미앙에게 거부감을 느끼는 것도 남보다는 높은 신성력 때문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대신관님일지라도 저를 기억하시고 이 세상이 반복된다는 걸 알아차리는 것밖에는 달리하실 수 있는 일이 없습니다. 그건 저도 마찬가지고요. 이 반복을 끝낼 수 있는 사람은 오직….”

크로버의 붉은 눈동자가 빛을 내뿜으며 나를 바라봤다. 익숙하지 않은 표정에 나도 함께 그를 바라보았다.

“오직 녹시아 님뿐입니다.”

이제야 눈치챘다. 이건 기대와 바람, 소망과 기원을 담은 눈빛이었다.

‘워워워. 이거 뭐야. 이 분위기 어쩔 건데. 하찮은 공략 캐릭터 빙의했는데 알고 보니 내가 세상을 구원할 용사?! 뭐 이런 제목이라도 붙여야 할 것 같은 분위기잖아.’

내가 뒤로 주춤주춤 몸을 빼는 걸 느낀 것인지 크로버는 얼른 그 부담스런 시선을 거두었다.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지금껏 여기까지 온 신의 사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신께서 이제 라암을 봉인할 날이 눈앞에 다가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난 라암을 봉인하는 방법 같은 건 모른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희망에 가득 찬 얼굴로 내 손을 꼭 붙잡고 있는 그에게 너무 가혹한 말인 것 같아 망설여졌다.

‘내가 알고 있는 건 카미앙이 후회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뿐이라고.’

‘응?’

갑작스럽게 등장했을 뿐만 아니라 듣도 보도 못한 설명이 이어졌다.

그러니까 카미앙이 죄를 뉘우치고 선한 사람으로 돌아오면 해피엔딩이라 이 뜻이었다.

‘무슨 전래동화도 아니고…… 그보다 시스템, 아니 신님. 당신이 생각한 후회 남주랑 내가 생각한 후회 남주랑 의미가 좀 다른 것 같은데.’

저 정도 의미라면 단순히 후회가 아니라 개과천선이나 환골탈태라는 단어를 써야 할 것 같았다.

“혹시 신의 사자가 어떤 방법으로 라암을 봉인하는지 알고 있어요?”

순간 크로버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냥 어두워진 게 아니라 선생님 말씀에 반항하는 사춘기 학생이라도 된 듯한 표정을 지었다.

“카미앙의 반성을 받아내는 것…… 이 그 조건인 거로 알고 있습니다.”

크로버도 알고 있었다. 이제야 그가 말했던 ‘그런 이유로 꼬신 게 아니다’라는 말이 이해가 갔다.

‘그래서 날 꼬셨던 거군. 다른 공략 캐릭터들처럼 카미앙을 좋아해서 라암의 봉인에 실패할 봐.’

크로버에게 따져봤자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는 꼴밖에는 되지 않을 것 같았다. 일단 그 말은 꾹 삼켜두었다.

“좀 이상하지 않아요? 후회하려면 당신에게 했던 짓을 후회해야지. 겨우…… 아니 내 입장에선 겨우는 아니지만. 아무튼, 나한테 했던 일을 후회하는 거로는 좀 부족하지 않아요?”

내가 흥분해서 떠들어 대는 동안 크로버도 뭔가 구시렁거리고 있었다.

“시스테미우스께서도 너무하시지. 그것 때문에 놈이 녹시아 님께 접근하는 걸 두 눈 멀쩡히 뜨고 보고 있어야 하다니…… 그렇다고 내가 나서서 일을 망칠 수도 없고.”

“뭐라고요? 잘 안 들려요.”

“아무것도 아닙니다. 저 역시 그 조건이 불합리하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이제는 아예 내가 바라보고 있는 쪽을 향해 크로버도 항의해댔다.

“이건 꼭 카미앙을 위한 조건 같다고요.”

“맞습니다. 사람을 그 주위에서 맴돌게 만들다니요.”

“너무 관대해요. 크로버가 얼마나 억울하겠어요.”

“그렇긴 합니다. 당해보지 않고는 모를 겁니다.”

“게다가 한 번도 아니고 아홉 번이나!”

“예?”

돌림노래처럼 내 말 뒤에 이어지던 크로버의 목소리가 어째 들리지 않았다. 난 크로버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홉 번은 아닙니다.”

“이제 와서 괜찮은 척할 필요 없어요. 아무리 신이라고 해도 알건 알아야 한다고요.”

나는 그의 손에 어깨를 척 올렸다. 겁먹은 병사들에게 용기를 북돋아 줄 때 하던 행동이었다.

“하지만 아홉 번이라고 하면 제가 꼭 바람둥이 같지 않습니까. 억울했던 건 이번 한 번뿐인데……”

이번 한 번만 억울했다니. 말도 안 된다.

‘깊은 신앙심에서 우러나온 말인가? 아니지…… 그보단 시스템 이 녀석 보기보다 무서운 신 아니야? 제 말을 안 듣거나 불만을 가지면 사람들에게 벌을 내린다든지.’

억울하기라도 하다는 듯 곧바로 메시지가 나타났다.

“진짜인지는 모르겠지만 이게 최선의 방법이었대요. 카미앙을 후회하게 만들 수 있는.”

“그건 그렇습니다. 지금의 카미앙은 제가 살아있는 걸 안다면 사죄는커녕 죽이려 들 테니까요.”

불과 몇 초 전까지만 해도 나랑 열심히 시스템에게 항의를 하더니만. 갑자기 태도가 돌변했다.

‘이해하자.’

크로버는 바렌시드 사람인 데다가 신관으로 살아온 지 십 년이 넘었다. 신에게 항의하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죄를 짓는다 여길 수도 있었다.

그때였다. 누군가 방문을 두드렸다.

나는 기사의 본능으로 테이블 밑으로 들어가 몸을 최대한 감췄다. 문틈으로 작은 손이 들어왔다.

“예지의 신관님.”

제델은 속삭이는 듯한 작은 목소리로 크로버를 불렀다.

“대신관님께서 밖으로 몸을 피하시라고 합니다. 그리고, 칼을 찬 아저씨들이 예지의 성소를 엉망으로 만들어 놨어요.”

벌써 병사들이 신전으로 들이닥친 모양이었다. 크로버는 제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예지의 성소는 다시 복구하면 되니 걱정 말라는 말을 해주었다.

크로버가 조각상 앞에 섰다. 장미의 정원에 있던 것과 마찬가지로 꽈배기 모양의 조각상이었다. 순간 이동의 매개체이기도 했다. 나는 뭘 해야 할지 알겠다는 크로버의 곁으로 갔다.

“여길 통해 밖으로 나가자는 거죠?”

“그렇습니다. 준비되셨습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에야 놀랐지만 그리 힘든 일도 아니었다. 조각상 위에 손을 올렸다.

‘시스템, 어서 순간 이동을 도와줘.’

아까는 몸이 붕 뜨는 듯한 기분이더니만 이번에는 조각상이 스르르 밀리는 듯한 느낌이 났다.

“녹시아 님.”

“벌써 끝났나요?”

크로버의 목소리에 나는 감았던 눈을 살며시 떴다. 이번에는 어디로 순간 이동을 했을까.

“녹시아 님, 아래쪽입니다.”

아래쪽? 발밑을 보니 커다란 구멍이 뚫려 있었다. 내가 있는 곳은 여전히 신전이었다. 옆쪽으로 밀린 조각상이 이 구멍을 막고 있던 듯했다.

“어서 내려오시지요.”

“…순간 이동이 아닌가요?”

“공간의 성물로 이동할 수 있는 곳은 성물이 있는 곳뿐입니다. 다시 궁전으로 들어갈 순 없지 않습니까?”

“그 성물이 신전과 장미 정원. 이 두 군데만 있는 건가요?”

“그렇습니다.”

“…그렇군요.

올 때는 고속전철을 타고 왔는데 돌아갈 때는 걸어가라는 꼴이었다. 더운밥 찬밥 가릴 때는 아니었지만 갑자기 몸에 고단함이 밀려오는 듯한 기분은 어쩔 수 없었다.

‘자, 자. 이시아가 아닌 녹시아의 마음으로 가보자고!’

땅굴은 넓지 않았다. 넓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애초에 사람이 가는 길은 맞을까 싶을 정도로 좁았다. 서서 가는 대신 무릎과 팔꿈치를 이용해 몸을 최대한 낮춰 움직여야 했다.

“힘드십니까?”

“그럴 리가요. 전쟁터에서 얼마나 굴렀는데요.”

대답하고 나니 내가 마치 진짜 녹시아 흉내를 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클로버는 내가 녹시아의 몸에 빙의한 존재라는 걸 알고 있으니 말이다.

“그때도 어쨌든 녹시아의 몸에 갇혀있었으니까요.”

“기회가 된다면 이 세계에 오시기 전 이야기도 듣고 싶습니다.”

“이 땅굴은 어디까지 이어진 거죠?”

나는 말을 돌렸다. 지금 상황에서는 그다지 필요한 대화도 아니거니와 이시아로서 그와 대화하는 건 어쩐지 내 민낯을 드러내는 기분이었다.

“모루강 상류입니다. 작은 다리가 있어 시가지 쪽으로 건너갈 수 있죠.”

그때 크로버가 뭔가 생각났다는 듯 큰 소리를 냈다.

“아! 그러고 보니 정신이 없어 잠시 잊고 있었습니다.”

그 말에 나 역시 중요한 일을 잊고 있었다는 게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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