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
대신관이 꼭 내 마음을 알아채기라도 한 것처럼 먼저 입을 열었다.
“저 애가 겉보기엔 속없어 보인다는 건 나도 알고 있다오. 도무지 진지한 구석이라곤 없어 보이겠지. 제 얼굴이 잘생기지 않았냐는 둥 별 시답지 않은 소리나 하고 말이요.”
“맞아요, 처음 봤을 때 딱 그랬어요. 잘난 얼굴 때문에 대신관님이 자신에게 일을 맡겼다고 하질 않나.”
“그렇지, 그렇지. 그런데 내가 보기엔 저 곱상한 얼굴도 경계심을 높이는데 한몫하는 것 같다오. 지나가다 한 번쯤 보면 기분 좋아지지만 내 남자라고 생각하면 얼굴값을 하는 게 아닌가…. 이런 생각이 들게 말이오.”
겉보기와는 다르게 뭘 좀 아시는 대신관님이었다. 나도 모르게 그와의 대화에 슬슬 빠져들고 있었다.
“맞아요. 근데 자꾸 마주치다 보니 또 그렇지만은 않더라고요. 순간순간 보여주는 눈빛이라든지, 지나가듯 툭툭 내뱉는 말이라든지.”
“그렇지, 그렇지. 가끔 보여주는 진지한 모습이 사람 마음을 훅 치고 들어오지. 사실 이 애가 아무 데나 마음을 흘리고 다니는 것 같아도 그게 본 모습은 아니라 이거요.”
맞는 말이었다. 그렇게 쓰라린 사연이 있는데 겉모습처럼 마냥 즐겁기만 할 수는 없을 터였다.
“게다가 과거까지 알게 되면서 안타깝다, 나라도 곁에 있어 주고 싶다. 그랬는데.”
“그렇지, 그렇지.”
“근데! 알고 보니 회귀할 때마다 만났던 여자들한테 똑같은 행동을 했나 보더라고요.”
나도 모르게 테이블을 내려치는 바람에 한창 대화에 집중하던 대신관이 화들짝 놀랐다.
“앗, 죄송해요.”
“아닐세, 아니야. 그것보다 똑같은 행동이라면.”
“그 잘생긴 얼굴로 여자들을 꼬셨거든요. 매번 첫눈에 반했을 리도 없고. 그 사람을 이용하려고 그랬겠죠.”
대신관이라면 도덕적이고 남녀 관계에 보수적일 게 분명했다. 크로버의 바람둥이 같은 행동에 함께 분개해주지 않을까? 게다가 크로버도 일단은 신관이고 말이다.
“아아, 그래. 거기서 오해가 생겼구먼. 아가씨가 자신의 역할에 충실했듯 그 애 역시 자신이 맡은 일을 하고자 한 것뿐이라오.”
팔은 안으로 굽는다더니 결국 크로버를 두둔하는 소리였다.
“크로버가 맡은 일이 뭔데요?”
어차피 또 변명일 게 뻔했기에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튀어 나갔다.
“그야 아가씨가 목표를 이룰 수 있도록 도와주는 거 아니겠소. 그게 우리 모두를 위한 일이니.”
꼭 내 목표가 뭔지 알고 있는 듯한 대답이었다. 대신관은 익살스럽게 눈썹을 추켜올리며 깊게 생각할 것 없다는 듯 말을 이었다.
“카미앙이 후회하게 만드는 게 아가씨의 목표가 아니오?”
“그, 그걸 어떻게….”
이건 시스템과 나만의 비밀이었다. 비밀이란 메시지가 뜬 적은 없었지만, 당연히 그럴 거라고 여겼다. 원래 시스템과의 대화는 빙의자만이 가능한 거 아니었던가?
“그 애는 사람에게 상처를 너무 많이 입었다오. 저를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들에게서부터 시간이 거꾸로 흐를 때마다 새로 만나게 되는 신의 사자들까지.”
“그것보다 제 목표를 어떻게….”
대신관은 내 말을 못 들은 척 이야기를 이어갔다.
“내 아무에게나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건 아니라오. 아홉 번의 회귀를 겪으면서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던 그 애의 모습에 중매쟁이 노릇을 한번 해보자 생각하고….”
벌컥 문이 열렸다. 크로버가 능숙한 폼으로 찻주전자와 찻잔을 쟁반에 받쳐 들고 왔다.
“무슨 이야기 중이셨나요?”
“네 으름장이 무서워서 어디 이야기를 할 수나 있었겠느냐.”
크로버가 테이블을 세팅하는 사이 대신관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스테미우스 님에 관한 것부터 전부, 네가 차근차근 말씀드려야 할 거야.”
“어디 가시려고요?”
“공간의 문으로 왔으니 예삿일은 아니었을 게 아니냐. 신전에도 손님이 오실지 모르니 준비를 해야지. 너는 아가씨와 여기 얌전히 있거라. 손님들이 신전을 수색하더라도 이곳은 찾지 못할 게다.”
어쩐지 급하게 퇴장하는 느낌이었다.
‘정말 우리를 쫓아온 사람이 있을까 걱정되어 나가시는 건가 아니면….’
방안에는 크로버와 나 둘만이 남았다.
‘그럼 저 애가 아가씨를 많이 좋아한다는 건 알고 있으려나 모르겠구먼.’
정적이 맴도는 방에는 대신관이 남기고 간 말이 떠돌고 있었다.
“아무래도 시스테미우스 님이 보내신 신의 사자부터 다시 이야기를 시작하는 게 좋겠죠?”
크로버가 조심스럽게 운을 띄웠다.
“시스테…. 뭐요?”
“시스테미우스 님이요.”
어렵지만 어쩐지 낯익은 이름이었다. 그러고 보니 대신관도 저 단어를 입에 올렸었다.
“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긴 한데.”
이쯤 되자 크로버도 뭔가 이상하다는 걸 느꼈나 보다. 그가 기도하듯 두 손을 모으면서 말했다.
“바렌시드의 신 말입니다.”
“바렌시드의 신이 시스테미우스였나요?”
그래서 그렇게 익숙하게 느껴졌나? 아니다. 게임 기획팀에선 국가 이름인 ‘바렌시드’나 성 앞에 흐르는 ‘모루 강’ 따위의 이름을 지었을 뿐이었다. 이 세계의 신에 이름을 붙인 적은 없었다.
‘시스테미우스, 시스테미우스, 시스테미, 시스템…. 시스템?!’
“바렌시드의 신이 시스템이었단 말이야?”
감탄사처럼 나도 모르게 튀어나온 말이었다. 결코, 대답을 바란 건 아니었는데 크로버가 고개를 끄덕이며 설명까지 해주었다.
“네, 이제야 생각이 나셨나 보군요. 시스테미우스란 이름이 길다 보니 어린애들은 그렇게 부르기도 합니다.”
“우와.”
눈앞에 보이는 찻잔을 들어 벌컥벌컥 들이마셨다. 김이 모락모락 나고 있었지만, 상관없었다.
“이것 참.”
그래도 목이 막혔다. 이번엔 대신관 몫으로 가져온 차를 단숨에 마셨다. 뭐라도 마시면 좀 나아질까 했는데 뭔가가 가슴에 얹혀 꽉 막힌 것 같은 느낌은 여전했다. 기가 막혀 말이 나오지 않는다는 게 어떤 기분인지 오늘 절실히 깨달았다.
“이거 참 어이가 없네. 맨날 신성력이 부족하다고 징징거리는 게 어쩐지 이상하다 싶었지. 내가 아는 그 시스템이었다면 신성력이 필요할 이유가 전혀 없을 텐데.”
이 정도면 신분 위장에 취업 사기였다.
“시스템! 당장 나와! 나오라고!”
난 허공을 향해 삿대질하기 시작했다. 시스템과 소통을 하거나 스킬을 사용할 때 왜 신성력이 필요한가 했더니만. 이제야 의문이 풀렸다. 게임 시스템치고는 묘하게 불편하거나 뒷북을 치던 것도 다 이유가 있었다.
“그럼 진작 이 세계의 신이라고 자기소개를 했어야지!”
“녹시아 님, 무슨 짓입니까. 그러다간 불경죄로….”
이 정도라면 바렌시드가 내가 알던 게임 속은 맞는 것인지 의심해볼 만했다. 마룬시에만 해도 외양만 같을 뿐 내가 알던 것과는 전혀 다른 인물이었다. 쇼하트의 가짜 향수 사건과 같은 이벤트도 없었고 라암의 보물 따위도 존재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이 세계의 최종 흑막이 카미앙이라니. 달달하게 연애하다가 플레이어가 흑막이 되는 급전개? 그런 게임은 시나리오단계에서 기각이었다.
내 곁에서 어찌할 줄 모르는 크로버를 위해 난 간단히 이 상황을 설명했다.
“난 여기 신한테 사기를 당했어요. 시스템인지 시스테미우스인지 뭔지가 아주 완벽하고 감쪽같이 날 속였다 이 말이에요.”
“그럴 리가요. 시스테미우스께서 나쁜 의도로 녹시아 님을 속이셨을 리 없습니다. 다 이 세상을 구하고자….”
“나쁜 의도로 속인 게 아니면 그럼 뭐죠? 좋은 의도로 속이기라도 했다는 건가요?”
“아마도 나름의 사정이 있으셨을 겁니다.”
크로버를 더는 괴롭히지 말라는 건지 시스템이 대뜸 자기소개하며 나타났다. 메시지 앞에 적힌 이름도 깨알같이 바뀌었다. 시스템에서 시스테미우스로 말이다.
‘신에 대한 믿음을 획득하긴 뭘 획득해. 네가 진작에 내가 이 세계의 신이오. 하고 밝혔으면 될 일이었잖아. 음흉하게 뒷글자 잘라먹고 시스템이라고 하질 않나.’
라암이고 시스테미우스고 다들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길 기다리는 꽃이라도 되는지. 먼저 정체를 밝히는 게 뭐 그리 어려운 일이라고 이러는지 모르겠다.
“알았어요, 방금 시스템인지 시스테미우스인지 하는 신께서 인간이 먼저 자신을 알아채 주기 전엔 존재를 증명할 수 없다고 변명하네요.”
신과 원활한 의사소통이 가능하다고 하더니만 한마디 할 때마다 이렇게 끼어들 모양이었다.
‘이봐, 시스템. 아니, 신님. 자꾸 그렇게 툭 튀어나오면 크로버와의 대화가 진전이 안 된다고요.”
이 정도 말했으면 알아들었겠지. 나는 다시 크로버와의 대화에 집중했다. 시스템이 이 세계의 신이라는 걸 알았으니 그다음 진도를 나갈 차례였다.
“그럼 신의 사자라는 건.”
“이 세계의 밖에서 오신 분을 뜻합니다.”
“처음부터 내가 다른 세계에서 온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는 거네요? 진짜 녹시아가 아니라는 걸?”
크로버가 내 눈치를 보며 슬그머니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제게 파르미엔 백작가의 영애가 진짜인지 가짜인지 따지는 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이번 회차에 신의 사자로 오신 당신이 진짜인 거지요.”
“의미가 없다고요? 의미를 찾기 전에 껍데기는 녹시아인데 그 안에 다른 사람이 들어 앉아있다는 게 놀랍지 않아요?”
이런 사실을 듣고도 태연할 수 있는 이유는 오직 하나뿐이었다. 바로 내가 첫 번째 빙의자가 아니었다는 것.
“나 말고 다른 신의 사자, 아니 빙의자가 있었나 보군요?”
크로버가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였다. 과거의 재현에서 크로버가 만났던 공략 캐릭터들이 떠올랐다.
“당신이 회귀할 때마다 새로운 빙의자가 왔던 건가요?”
“네, 녹시아 님이 보셨던 루티시나와 라라벨, 헤슬루. 모두가 다른 세계에서 온 사람이었습니다.”
내가 첫 번째가 아니었다니.
이 눈치 없는 시스템이 뭐라고 중얼거리는 거지?
‘첫 번째든 열 번 째든 두가 그 순서를 신경 쓰는 건 줄 알아?’
매일매일 수천 년 동안 인간들에게 기도를 받다 보니 다들 자신의 관심을 받으려고 안달이라도 난 줄 아는 모양이었다. 내가 신경 쓰는 건 내 앞에 여러 명의 회귀자가 있었다는 것에서 유추할 수 있는 불편한 진실이었다.
“그 말은 앞에 사람들은 다 실패했다는 뜻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