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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렘 게임의 공략캐가 되었다-90화 (90/95)
  • 90.

    “두 사람 모두 괜찮은가?”

    낯선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눈을 떴다. 새하얀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바닥이 눈에 들어왔다. 새하얀 벽과, 새하얀 천장과 역시 하얀색인 계단.

    ‘설마…. 여기가 바렌시드의 신이 있는 곳?’

    좋은 징조가 아니었다. 바렌시드의 신이든 내가 살던 곳의 신이든 신과 함께 있다는 건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는 뜻이니 말이다. 그나마 다행인 건 크로버가 내 옆에 있다는 것이었다.

    ‘아니지, 그건 아니지.’

    둘이 함께라면 지옥 불꽃도 두렵지 않다는 둥 뭐 이런 건 낭만적으로 들릴진 몰라도 실리적이지 못한 소리였다. 한 사람만 가면 되지 이럴 때조차 굳이 운명을 함께 할 필요는 없었다.

    “크로버야 한두 번이 아니니 멀쩡할 테고.”

    나는 목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어쩌면 바렌시드의 신을 대면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흥분과 두려움을 애써 눌렀다.

    그러니까 내가 고개를 반쯤 돌려 바라본 곳에는 작고 통통한 할아버지가 의자에 앉아있었다. 깔끔하게 다듬은 흰 수염에 복숭앗빛이 도는 얼굴이 신이라고 해도 괜찮을 것 같은 외양이었다.

    “괜찮습니까?”

    나는 크로버의 곁에 바짝 붙어서며 대답 대신 질문을 던졌다.

    “혹시 저분이 바렌시드의 신인가요?”

    내 말을 들은 것인지 신은 유쾌하게 웃기 시작했고 크로버는 얼굴을 찌푸렸다.

    “신께서 진노하실 소리를. 저런 할아버지가 신이라니 가당치도 않습니다.”

    “허허허, 그렇지. 신이란 존재가 이렇게 쉽게 만날 수 있진 않겠지.”

    “아하하하. 역시 그렇죠?”

    민망함을 감추기 위해 상대를 따라 웃어보았지만 어쩐지 어색함만 더해진 것 같았다.

    “…그럼 대체 여긴 어딘가요?”

    “어디긴, 바렌시드 대신전이지.”

    대답을 들은 건 크로버가 아닌 흰 수염 할아버지에게서였다.

    “대신전이요?”

    왕궁에서 족히 20킬로는 떨어져 있을 대신전에 눈 깜박하는 사이 도착했다? 그것도 장미 정원의 미로와 우리를 잡겠다고 쫓아오던 근위병들을 다 따돌리고?

    “설명이 필요한데.”

    이쪽은 어떤 어렵고 복잡한 설명도 들을 준비가 되어있었다. 하지만 크로버의 입에서 나온 말은 지극히 단순했다.

    “장미 정원에서 이쪽으로 순간 이동을 했습니다.”

    꼭 고속철도나 비행기로 빨리 올 수 있었다는 말처럼, 아주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

    “아하, 순간 이동. 역시 그랬구나. 독 안에 든 쥐 꼴이 되었을 때는 역시 순간 이동만 한 게 없죠. 하하.”

    이번엔 억지웃음이 아니었다. 순간 이동이라니. 정말이지 게임 같은 능력의 등장에 절로 웃음이 나왔다.

    “성물인지 뭔지를 이용해 순간 이동을 한 건가요?”

    “녹시아 님께서도 보셨던 그 조각상이 순간 이동의 매개체였습니다.”

    그 꽈배기 같은 조각상으로 순간 이동을 할 수 있었다니. 처음 만났을 때, 크로버가 정원에서 불쑥 나타났던 것도 그 덕분이었다.

    “와, 아유 신기해라. 조각상에 그런 기능이 있는지는 꿈에도 몰랐네요.”

    “혹시 화가 나신 거라면….”

    “아뇨아뇨, 덕분에 떡 하니 이 안전한 곳으로 도망을 쳤는데 내가 왜 화를 내겠어요?”

    화가 날 일은 아닌데, 알고 있는데, 그런데 괜히 화가 났다. 이런 방법이 있었으면 나한테 귀띔이라도 해줬어야 하는 거 아닌가?

    “난 어떻게 해야 하나 노심초사했는데. 당신은 그냥 스릴넘치는 술래잡기하는 기분이었겠네요.”

    생각해보면 이번일 뿐만이 아니었다. 언덕에서 떨어졌던 것도 크로버는 다 계획이 있어서 한 일이었다.

    ‘내 퀘스트의 일부라는 걸 알고 있었어. 아니면 적어도 과거를 재현해 라암의 존재를 내게 알려줄 수 있는 일이라는 걸 알고 있었지.’

    그렇지 않고서야 ‘동쪽 성벽에서 크로버가 언덕에서 떨어질 때’라는 그 어려운 조건에 딱 맞아 떨어지는 행동을 할 수가 없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나만 애를 태우며 동동거린 것이었다.

    ‘어쩌면 내가 어장 속에서 벗어나기 위한 퀘스트를 할 때마다 크로버가 나타났던 것도….’

    신전에서, 극장에서, 심지어는 사냥터에서도. 크로버는 카미앙을 위한 예언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는 척했지만, 지금은 다 거짓말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어쩌면 몇 번이나 회귀한 그는 내가 어떻게 행동하는지 살펴보기 위해 나타난 것일지도 몰랐다. 아니 그럴 확률이 높았다.

    ‘대체 나한테 얼마나 많은 거짓말을 한 거야?’

    그동안 참고 있던 감정이 복받쳐 올랐다. 주변의 위협이 사라진 지금이야말로 이 모든 것들을 따져 물을 시간이었다. 수많은 질문 중 가장 묻고 싶었던 말이 튀어나왔다.

    “그동안 장미 정원에서 만난 공략 캐릭터…. 아니, 여자들에게 일부러! 얼굴을 보여준 거죠? 꼬시려고?”

    “네?”

    평소보다 두 배쯤 커진 눈으로 크로버가 날 바라보았다. 그 못지않게 나도 당황했다.

    ‘응? 내가 따지려고 했던 게 이거였던가? 물론 이것도 궁금하긴 했는데.’

    술에 취했어도 정신만은 멀쩡하다고 자부했는데 이제 와서 이런 실수를 하다니. 혹시 이것도 환각제나 순간 이동의 부작용이지 않을까 싶었다. 생각이 뇌를 거치지 않고 입으로 술술 흘러나가는 기분이었다.

    “시치미 뗄 것 없어요. 내가 다 봤다고. 루티시나, 라라벨, 헤슬루…. 누구 하나 가릴 것 없이 다 꼬시던데요?“

    “꼬신 게 아닙니다.”

    “진짜로?”

    날 바라보고 있던 크로버가 갑자기 눈동자를 왼쪽 위로 굴렸다.

    “그러니까…. 녹시아 님이 생각하는 그런 의미로 꼬신 건 아닙니다.”

    결국, 꼬시긴 꼬셨다는 뜻이었다.

    “하아, 이번에는 제대로 된 남자인가 싶었더니만.”

    “저, 저를 말씀하시는 거라면 제대로 된 남자 맞습니다.”

    크로버가 자신을 가리키며 다급하게 외쳤지만 소용없었다.

    “얼굴 믿고 아무한테나 막 들이대는 남자가 제대로 된 사람일 리 없죠. 그런 남자들이 꼭 양다리, 세 다리 막 걸치더라고요. 어장 관리하고. 자기 좋을 때만 나 찾아와서 이용하고…. 꼭 카미앙처럼 말이죠.”

    “전 그런 남자 아닙니다!”

    크로버가 아무리 반박해봐야 소용없었다. 내게는 이미 ‘제대로 되먹지 못한 남자’ 데이터가 충분히 쌓여 있었다. 그 데이터들이 외치고 있었다. 저건 또 다른 유형의 나쁜 남자라고.

    “처음엔 어땠을지 몰라도 결코 녹시아 님을 이용하려고 한 게 아니란 말입니다.”

    평소와는 달리 여유로움이라곤 전혀 없어 보이는 크로버가 말실수를 하고 말았다. 꼬투리 잡고 늘어지기 딱 좋은 발언이었다.

    “처음? 처음에는 어땠는데요?”

    “처음에야…. 당신이 신의 사자로 오신 분인 걸 알고 있었으니 당연히 접근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쨌든 목적이 있어서 접근했다 이 말이네요.”

    “제게는 신의 사자의 도움이 꼭 필요한지라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 와중에 굉장히 신경 쓰이는 단어가 있었다.

    “신의 사자가 대체 뭐길래 자꾸 사자사자 거리는 거죠?”

    “신께서 당신을 사자라고 부르지 않으십니까?”

    갈수록 산이라더니만, 말할수록 말이 통하지 않는 기분이었다.

    “누가요 사자라고 부른다고요?”

    “시스테미우스 님께서 녹시아 님을….”

    “잠깐, 잠깐만. 사랑싸움은 잠시 멈춰 주시게나.”

    “아니, 이게 무슨 사랑싸움!”

    큰소리를 치고 보니 나이 지긋한 어르신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k 예법이 몸에 익은 이시아였기에 저절로 말씨가 얌전해질 수밖에 없었다.

    “…이라고 그러세요. 그저 시시비비를 가리려는 토론일 뿐입니다.”

    “허허 그러시겠지. 그것보다 지금 굉장히 감정이 격해져 있는 것 같은데 일단 여기 앉아서 차라도 한잔하시는 게 어떻겠소?”

    내가 머뭇거리자 할아버지가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이래 봬도 내가 여기 대신관이라오. 신이 아니라면 여기선 누구나 내 말을 자알 들어야 하지.”

    나이도 나이었지만 대신관의 말을 무시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크로버와 나는 나란히 티 테이블에 앉았다. 그런 우리를 대신관이 너그러운 눈빛으로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꼭 친구와 싸우다 선생님께 불려온 기분이었다.

    “차가 없습니다만.”

    크로버가 빈 테이블을 가리켰다.

    “차는 이제 네가 타와야지. 이 늙은이한테 차 심부름도 시킬 셈이었느냐?”

    크로버가 구시렁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 없는 동안 녹시아에게 괜한 말씀 마세요.”

    “내가 그럴 사람으로 보이느냐? 젊어서 내 별명이 침묵의 신관이었다는 거 말 안 했더냐?”

    “말씀하셨죠. 수십 번을 들었는걸요.”

    크로버는 뭐가 그리도 못 미더운지 이쪽을 몇 번이나 힐끔거렸다. 문이 닫히고 크로버의 흔적이 완전히 사라졌을 때였다.

    “그래, 어디까지 알아보고 오셨슈?”

    대신관은 대뜸 내게 질문을 던졌다. 마치 얼마까지 알아보고 왔냐고 묻는 경매상 같았다. 뭐라 대답해야 하는 건지 몰라 우물쭈물하자 대신관이 질문을 바꿨다.

    “우리 애에 대해 얼마만큼 알고 계시냐…. 이 말이요.”

    “우리 애요?”

    대신관이 크로버가 나간 방향을 눈짓으로 가리켰다. 둘이 사이가 좋아 보이긴 했는데 우리 애라고 할 정도인지는 미처 몰랐다.

    “바렌시드의 진짜 왕세자인 레이워스 드 라우치 라는 건 아실 테고.”

    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이복동생인 카미앙에게 배신당해 라암의 희생양이 되었다는 것도 알겠구려. 나 이외의 사람은 저 애를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도 들으셨소?”

    “대신관님께서 기억하시는 줄은 몰랐어요. 아무도 모르는 줄 알고 있었죠.”

    “그건 그럴 만허지. 또 다른 건?”

    “크로버가 몇 번이나 회귀를 반복했다는 사실이요.”

    대신관이 눈을 반짝이며 수염을 쓰다듬었다.

    “훌륭하구먼. 거기까지 알고 있다니.”

    그렇게 말하는 표정이 매우 즐거워 보였다.

    “정확히는 이 세상이 반복되고 있는 거라네. 다른 사람들은 그걸 모르고 있고. 오직 크로버와 나만이 세상의 반복을 알아채고 있지.”

    “세상이 반복된다니 그게 무슨….”

    내가 질문을 하려 하자 대신관은 고개를 저었다.

    “아직 내 질문이 끝나지 않았다오. 그럼 저 애가 아가씨를 많이 좋아한다는 건 알고 있으려나 모르겠구먼.”

    크로버가 날 좋아한다라. 그렇게 생각했었다. 장미 정원에서의 재현을 보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게….”

    쉽사리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자고로 이런 이야기는 친구랑 맥주 몇 캔 쌓아두고 적당히 비속어를 섞어가며 해야 제맛 아니겠는가. 할아버지 연배인 것까지는 그렇다 쳐도 대신관씩이나 되는 사람과 썸남에 대해 미주알고주알 떠들어 댈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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