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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렘 게임의 공략캐가 되었다-89화 (89/95)
  • 89.

    “그거야말로 사랑이 아니라 그저 왕실에 대한 충성이군요. 녹시아 님이 걸고 계신 이 목걸이 보이십니까? 제가 언약의 증표로 드린 물건입니다.”

    언약의 증표는 무슨, 라암의 봉인석이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면서도 크로버는 천연덕스럽게 말을 이어갔다.

    “듣자 하니 당신이 건넨 목걸이는 녹시아 님이 거부하셨다죠? 그 목걸이를 거절 한 바로 그날 저녁 제 선물을 받으신 겁니다.”

    카미앙의 눈초리가 사나워졌다.

    「녹시아…. 내게 그런 망신을 주더니. 겨우 저딴 물건을 목에 걸어?」

    “그리고 왕실 파티, 파티에서 녹시아 님이 누구와 춤을 추셨는지 기억 안 나십니까?”

    크로버가 자리에서 뱅그르르 돌며 춤을 추는 시늉을 해 보였다.

    「하, 그날은 녹시아가 미쳤던 게 틀림없어. 그렇지 않고서야 나 대신 저 녀석을 선택…. 다시 생각해도 열 받는군.」

    평소에도 사람 약 올리는 재주가 있는 크로버였다. 그 재주를 이렇게 요긴하게 쓰게 될 줄은 몰랐다.

    “난 이미 파르미엔 백작 부부에게 약혼 허락을 받아낸 몸이요.”

    “그쪽엔 허락을 받았으면서 아직 왕실의 허락을 받지 못한 이유는 뭔지 궁금하네요. 혹시 허락을 받지 못한 게 아니라 받을 마음이 없었던 건 아니신가요?

    잘한다, 크로버.

    “나는 왕세자다. 내가 원하는 여인을 갖겠다는데 달리 이유 같은 건 필요 없어!”

    드디어 카미앙이 폭주했다. 그는 이따위 말장난은 알 바 아니라는 듯 내 팔을 거칠게 끌어당겼다. 물론 내가 끌려가지 않는 바람에 헛된 몸짓이 되어버렸다.

    “내가 원하면 누구든 취할 수 있는 권력과 지위가 있단 말이다. 그런데 네놈이 가진 건 뭐지? 그 잘난 얼굴? 세 치 혀? 또 뭐가 있지?”

    선을 넘었다. 크로버의 모든 걸 빼앗은 주제에 저런 소릴 지껄이다니. 카미앙을 향해 소리를 지르려던 찰나 낯선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느냐.”

    기품있으면서도 위엄 서린 목소리가 정원에 울려 퍼졌다.

    “왕세자라는 위치가 자신의 마음대로 사람들을 움직이는 그런 자리라고 생각하시오?”

    “어머니?”

    로잘린느 왕비였다.

    “이게 어찌 된 일인지 내게 설명을 해보거라.”

    내 오른손은 크로버가, 왼팔은 카미앙이 끌어당기고 있었다. 한 여인을 사이에 둔 치정 싸움. 왕궁의 정원에서 이런 일이 일어난 것만 해도 큰 사건인데 그중 한 명이 왕세자였다. 왕비가 설명을 요구할 만했다.

    “이 여인…. 그러니까 파르미엔 백작가의 영애를 데려가려 하는 참이었습니다.”

    왕비의 눈이 나를 쓱 훑고 지나갔다. 차갑지도 그렇다고 따듯하지도 않은 사무적인 태도였다.

    “내 눈엔 꼭 저 사내에게서 파르미엔가의 여식을 빼앗으려는 자세로 보이는구나.”

    “아닙니다. 제 약혼녀를 이자가 가로챈 것입니다.”

    “그럼 저 여인이 왕세자의 약혼녀란 말이냐?”

    카미앙이 당황한 듯 나와 왕비를 번갈아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유감이구나.”

    뭐가 유감이라는 걸까. 나 같은 사람이 약혼녀여서? 그것도 아니라면 제 약혼녀 하나 챙기지 못하고 이 난리를 버리고 있는 왕세자의 모습이? 부모에게 알리지도 않고 마음대로 약혼을 해서? 카미앙은 왕비의 말을 마지막 의미로 해석한듯했다.

    “아니, 그게 아니라…. 어머니께도 곧 말씀드리려고 했습니다.”

    “곧? 그럼 내게 장미 정원으로 오라고 서신을 보낸 게 이것 때문이라는 게냐?”

    “아니, 그건…. 예, 맞습니다.”

    뭔가 다른 뜻이 있던 것 같지만 이렇게라도 둘러댈 생각인 듯했다. 하지만 그 대답 역시 그다지 좋은 선택지는 아니었다.

    “바렌시드의 왕비가 아침 이슬을 맞은 풀밭 위에서 왕세자빈을 소개받을 줄이야.”

    “아니, 어머니. 이건….”

    카미앙과 대화가 통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나 만은 왕비와는 특히 맞지 않는 것 같았다. 카미앙이 그 앞에선 유독 긴장한 탓일지도 몰랐다.

    ‘침실에서 봤던 과거에서도 왕비와의 관계가 좋아 보이진 않았지.’

    왕비의 냉랭한 모습이 단지 카미앙의 고집 때문만은 아니었나 보다. 그 후로도 쭉 왕비와 카미앙은 소원하게 지내온 것 같았다.

    “그것도 그렇지만 감히 왕세자의 약혼녀를 탐내는 자가 있다는 것도 놀랍구나.”

    이번엔 왕비의 시선이 크로버를 향했다.

    일순간 가슴이 철렁했다. 뒤집어씌운 크로버의 후드는 카미앙과 말다툼에 방해가 되었는지 이미 반쯤 걷어낸 상태였다. 그의 붉은 눈동자와 백금발이 여과 없이 드러나 있었다.

    ‘어쩌지, 왕비가 크로버를 알아볼까?’

    여기서 왕비가 크로버를 알아보는 것도 걱정이었지만 그 반대라 해도 걱정이었다.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어머니를 보며 크로버는 또 한 번 상처를 입게 될 테니 말이다.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자로구나.”

    왕비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크로버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더는 두고 볼 수가 없었다.

    “왕비 전하. 외람되지만 저는 왕세자님의 약혼녀가 아닙니다.”

    “녹시아, 그대가 나설 자리가 아니오.”

    카미앙이 가만히 있으라는 눈짓을 해가며 소리쳤지만, 왕비가 그를 저지했다.

    “파르미엔 백작가의 영애인데 발언권 정도는 줘야지 않겠느냐?”

    다행히 왕비는 카미앙보단 훨씬 상식적인 사람이었다. 그녀는 내게 계속 말을 해보라는 듯한 눈짓을 했다.

    “파르미엔 백작가가 아나드 정벌을 돕는 과정에서 잠시 왕세자님의 약혼녀 행세를 했지만 지금은 아닙니다.”

    “내 영애의 이야기는 들은 적이 있네. 시시각각 소문이 변하는 터라 어찌 판단해야 할지 결정은 내리지 못했네만.”

    사교계의 꼭대기에 앉아있는 왕비였다. 왕세자의 약혼녀라 주장하는 미친 영애에서부터 카미앙을 구한 일, 파티에서 그에게 망신을 준 일까지. 그녀의 귀에 들어가지 않은 소문은 없을 터였다.

    “저는 왕세자님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파르미엔 영지에서 여기까지 홀로 왕세자를 따라온 영애가 하는 말이라곤 믿기 어려운 말이구나.”

    “제 마음이 변한 걸 꾸짖으신다면 달게 받겠습니다만 지금 제가 마음에 둔 사람은 따로 있습니다.”

    “거기 계신 신사분을 말하는 게냐?”

    “그렇습니다.”

    이 대답만큼은 카미앙을 바라보며 한 자 한 자 힘주어 말했다. 카미앙의 얼굴은 이미 터질 것처럼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하지만 그것 또한 말뿐이니. 지금 왕세자를 가지고 사랑놀음을 하는 것인지 진짜 사랑을 말하는 건지 믿을 수가 없구나.”

    이게 다 과거 녹시아의 업보였다. 상관없었다. 어차피 내 목표는 왕비에게 카미앙과 나의 관계를 명확히 하는 게 아니었다.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카미앙의 상태는 변함이 없었다.

    ‘하긴, 이제 마지막이나 마찬가진데 쉽진 않겠지.’

    결단을 내려야 했다. 나는 마음을 굳게 먹고 크로버 쪽으로 휙 고개를 돌렸다. 너무 박력 있게 움직였는지 크로버가 흠칫 뒤로 물러섰다.

    “크로버, 움직이지 말고 그대로 있어요.”

    나는 그의 관자놀이를 꽉 붙잡고 그의 머리를 내 눈높이로 끌어내렸다.

    ‘입술, 입술 어딨어.’

    그리곤 내 눈에 들어온 그의 도톰한 입술에 그대로 내 입술을 가져다 댔다.

    ‘왕비 쪽에서도 잘 보이겠지?’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그쪽에서도 잘 볼 수 있도록 옆으로 움직이는 센스까지 발휘했다. 물론 손은 여전히 크로버의 머리에 가 있었고 입술은 당연히 그의 입술에 포갠 상태였다.

    ‘드디어!’

    드디어 ‘후회’라는 두 글자를 볼 수 있게 되었다.

    ‘저게 뭐야.’

    내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분명 이번 단계에서 카미앙의 상태가 후회로 변했어야 했다. ‘두고 보자’라니. 후회 따위는 눈곱만큼도 느낄 수 없었다. 제 잘못을 반성하긴커녕 날 원망하는 게 아닌가.

    게다가 저 뒤에 붙어있는 물음표. 지금까지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물음표가 한 개도 아닌 다섯 개씩이나 카미앙의 상태 뒤에 붙어있었다.

    ‘이러면 꼭 시스템도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 일어났다는 것 같잖아. 불안하게.’

    그 불안함이 현실이 되었다. 내 눈앞에서 빨간 글자로 반짝이는 메시지를 보니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도 모를 지경이었다.

    내 인생에서 가장 허탈했던 때는 일 년 반 동안 진행하던 프로젝트가 투자자의 반대로 하루아침에 날아갔을 때였다. 이제 그 기록을 경신할 때가 되었나 보다.

    “왕세자, 아가씨의 마음이 이미 왕세자에게서 떠난 것 같은데 깔끔하게 놔 주는 게 미덕이라 생각하네.”

    “모르는 말씀이십니다. 저 녀석이 얼마나 극악무도한 놈인지. 놈에게 붙은 죄목만 해도 벌써 서너 가지는 됩니다.”

    카미앙과 왕비가 떠들어 대는 소리가 귓등으로 흘러 지나갔다.

    “그럼 저 사내가 죄인이란 말이냐?”

    “네, 그렇습니다. 근위대를 불렀으니 곧 저자를 잡아갈 것입니다.”

    ‘잡아가? 지금 제 잘못도 깨닫지 못한 놈이 누구를 잡아간다는 거야.’

    시스템 메시지에서 겨우 눈을 떼고 두 사람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카미앙의 발언에 치정극이 갑자기 범죄 물로 변해버렸다. 왕비도 이런 상황까지는 예상하지 못했는지 당황한 얼굴로 한 발짝 물러섰다.

    때마침 입구 쪽에서 사람들이 뛰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아무래도 카미앙이 준비해놓은 병사들인 것 같았다.

    매번 액션 영화에 등장하는 경찰들처럼 한발 늦더니만 웬일로 타이밍을 잘 맞췄다. 하필 이럴 때 말이다.

    “녹시아 님, 이쪽으로.”

    내 팔목을 움켜쥔 크로버가 조각상 쪽으로 이끌었다.

    “도망가봤자 소용없다. 그쪽에는 길이 없어!”

    “카미앙 말이 맞아요. 이쪽으로 가봤자 에요.”

    “그건 신실하지 못한 자들에게 해당하는 일입니다.”

    “네?”

    아무래도 크로버의 말을 제대로 듣지 못한 것 같았다. 아니면 그가 헛소리를 한 게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 상황에서 신실한지 신실하지 않은지를 거론할 이유가 없었다.

    “시스테미우스 신께서는 신실한 자에게 늘 길을 열어주시지요.”

    아니, 잘못 들은 것도 아니고 잘못 말한 것도 아니었다. 크로버는 주변의 소란은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듯 평온한 얼굴로 조각상에 새겨진 글귀를 가리켰다.

    <위기의 순간에 선 그대여, 신께 기도하시오. 그리하면 신께서 반드시 길을 내어주시리라>

    “녹시아 님 역시 신앙심이 충만하시니 신께서 길을 내어주실 겁니다.”

    “이제 그만 포기하지. 녹시아를 인질로 잡고 있다고 내 죄가 줄어들진 않아.”

    앞쪽에선 갑자기 교주라도 된 듯한 크로버의 목소리가, 뒤쪽에선 세기의 흉악범이라도 검거하는 듯한 카미앙의 목소리가 들렸다.

    “함께 기도하시죠….”

    이제 뭐가 어떻게 되는 건지 모르겠다. 나는 크로버가 이끄는 대로 조각상에 손을 가져다 댔다. 에라 모르겠다. 그를 따라 눈을 감고 기도라기보단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중얼거렸다.

    ‘어떻게 좀 해보세요. 우릴 여기서 빼내 주던지, 저 카미앙이 후회하게 만들어 주시던지!’

    아주 잠깐, 몸이 붕 떠오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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