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
내가 이런 생각을 하는 사이 재미없는 과거가 반복되었다.
공략 캐릭터가 한 번씩만 등장한 건 아니었다. 헤슬루와 루티시나가 번갈아 가면서 나타나더니 원래의 녹시아까지 등장했다.
‘이번엔 난가?’
한걸음에 달려가 크로버와 마주 서 있는 녹시아를 바라보았다. 크로버의 얼굴이 드러나는 순간 동공이 커지며 눈동자가 반짝이는 것을 보니 저 녹시아가 본 것은 오징어가 아니지 싶었다.
‘그럼 내가 아니란 소린데…. 설마….’
설마설마하면서도 그런 가정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 모든 게 크로버가 겪었던 과거가 아닌가 하는 가정. 다시 말해 크로버는 몇 번이나 되풀이되는 삶을 살아온 게 아닌가 하는 가정. 내가 빙의를 했다면 그는 회귀를 한 게 아닌가 하는 가정 말이다.
시스템 특유의 축하와 함께 퀘스트 달성을 알리는 메시지가 나타났다.
퀘스트를 달성했다. 명성이 엄청나게 상승하고 칭호까지 변경되었다. 무려 ‘바렌시드의 수호자’라는 수식어를 달고 있는 칭호였다. 그런데도 그다지 신나지 않았다.
“장미 가지는 언제까지 잘라야 하죠?”
크로버의 얼굴을 보니 확실해졌다. 신나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심기가 몹시 불편했다.
‘회귀할 때마다 공략 캐릭터를 꼬셨다 이거지.’
정원에서 크로버를 만난 공략 캐릭터가 그 시점에서의 빙의자인지는 아직 확실치 않았다. 확실한 건 크로버가 제 얼굴을 일부러 드러내며 상대를 유혹했다는 것이었다.
물론 크로버가 그런 행동보다는 그가 수차례 회귀를 했다는 사실이 훨씬 중요한 일이었다. 시스템이 이 장면을 보여준 이유도 크로버의 회귀를 보여주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라암의 저주와 크로버의 회귀 사이에 어떤 연결고리가 있는지 알아봐 주길 바라면서 말이다.
다 알고 있으면서도 크로버가 공략 캐릭터에게 미소 짓던 장면만 머릿속에 박제된 것 같았다.
‘그래, 뭐 여자 좀 만났을 수도 있지.’
“녹시아 님, 혹시 어디 불편하신 데라도 있습니까?”
나를 염려하는 듯한 그 상냥한 표정을 보니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크로버의 외모를 찬양하던 향료 길드 직원이 떠올랐다. 과거까지 운운할 필요도 없이 사실은 엄청난 바람둥이였던 게 아닐까?
‘나한테도 늘 하던 것처럼 가벼운 마음으로 접근한 거였어? 그것도 매번 하던 방식으로?’
“머리가 아프신 거라면 환각제 때문에 그럴 수도 있습니다.”
무언가 심상치 않은 기색을 느꼈는지 크로버가 내 표정을 살폈다.
‘진작 알았으면 키스할 때 확 밀어버렸을 텐데.’
이제야 크로버에게 마음을 연 참이었다. 그런데 내가 그렇게나 벗어나려고 아등바등 애를 썼던 카미앙과 크게 다를 바 없는 부류였다니.
어디서부터 따져야 할지를 모르겠다.
“몸은 멀쩡한데 마음이 불편하네요.”
크로버가 단번에 알겠다는 듯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제가 괜히 눈물을 보여 녹시아 님의 마음을 무겁게 만들었습니다.”
크로버의 안타까운 사연 때문에 잠시 잊고 있었다. 과거야 어찌 됐든 이 사람 꽤 뻔뻔스러웠다는 걸. 크로버가 내 손을 포개더니 제 손으로 그것을 포옥 감싸 잡았다.
‘“걱정 마십시오. 전부 지나간 일입니다. 당신만 곁에 있어 주신다면요.”
감싸 잡은 손을 제 입가로 가져가더니 입을 맞추기까지 했다.
“갑자기 스킨십이 자연스러워진 것 같은데요?”
“스킨십이라니요. 이건 녹시아 님의 마음을 달래주는 위로일 뿐입니다.”
내가 무엇을 보았는지 알지도 못하면서 천연덕스럽게 구는 크로버의 모습에 난 해서는 안 될 말을 해버렸다.
“당신 제멋대로 이러는 거 꼭 카미앙 같아요!”
내가 무슨 짓을 하든 절 좋아해서 그러는 거라 결론을 내리는 카미앙 말이다.
“절 카미앙에 비교하시다니요! 그것도 녹시아 님께서.”
“당신이 카미앙 같은 행동을 하니까 그렇죠.”
“누가 자꾸 내 이름을 부르나 했더니만.”
덤불 모퉁이에서 카미앙이 모습을 드러냈다. 진짜 카미앙이 나타나 버린 것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카미앙 따위는 이름조차 생각하지 말걸.’
“거기 꼴사납게 달라붙어 있는 자는 내 약혼녀에게서 좀 떨어지지?”
카미앙의 말을 듣고 나서야 크로버가 변장하지 않았다는 것이 떠올랐다. 일단은 이 옅은 금발부터 가려야 했다. 얼른 후드를 씌웠다.
「크로버인 줄 알았는데? 아니지, 어떤 모습을 하고 있든 크로버일 거다. 크로버가 아니고서야 녹시아와 저렇게 있을 사람이 누가 있겠나. 녹시아의 손을 꼭 붙잡고 대체 뭘 하고 있는 거지?」
“공녀님께 항의를 해야겠어요. 대체 장미 정원에 뭘 뿌린 것인지 정신을 잃고 쓰러졌어요. 여기 신관님이 아니었다면 큰일 날 뻔했다고요.”
화가 난 척하려 했는데 그럴 필요는 없었다. 카미앙의 얼굴을 보니 진짜로 화가 났다. 난 크로버를 내 뒤로 밀어내며 카미앙에게 다가갔다. 카미앙이 아직 눈치를 못 챈 틈에 어떻게든 크로버를 빼돌려야 했다. 하지만 방해는 예상치 못한 쪽에서 발생했다.
“녹시아 님, 이제 이러실 것 없습니다.”
크로버가 내 손을 잡았다.
“무슨 소리예요?”
“더는 녹시아 님 혼자서 싸우는 걸 두고 볼 수 없습니다.”
“카미앙이 당신을 잡겠다고 눈에 불을 켜고 있다고요.”
최대한 목소리를 낮췄지만, 워낙 거리가 가까운 탓에 카미앙에게도 말소리가 다 들린 모양이었다. 카미앙이 코웃음을 치며 크로버를 비웃었다.
「꼴에 허세는…. 가지가지 하는군.」
“이제야 부끄러운 줄 아나 보군. 늘 녹시아 뒤에 숨어 있더니 말이야.”
‘지금 자아비판이라도 하는 건가?’
카미앙에게 고대로 돌려주고 싶은 말이었다.
“하지만 네놈에겐 그럴 기회가 없다. 넌 귀족 사칭죄 및 왕족 모독죄, 그리고 사유재산 훼손죄로 감옥에 처박힐 테니.”
이번엔 카미앙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그대도 이제 그만 하지. 내일이면 공식적으로 그대는 내 약혼녀가 될 몸이니.”
「마룬시에한테는 라암의 계시 때문이라고 둘러댔지만 계시고 뭐고 녹시아가 저놈과 붙어있는 꼴을 보니 미칠 노릇이군.」
순간 카미앙의 현재 상태가 떠올랐다.
‘설마 아직도 그 상태인가?’
대체 왜? 이제 와서? 아무래도 라암의 계시를 받았다는 거짓말 때문에 내게 이토록 집착하는 것 같았다.
“그대가 그토록 원했던 일 아닌가.”
“옛날 일이겠지요.”
나 대신 크로버가 대답했다.
“우습군. 네가 뭘 안다고 그런 소릴 하지?”
“당신이 언제 녹시아 님을 약혼녀 취급이나 했습니까? 그저 쓸모를 다한 사냥개 정도로 생각했겠지요.”
“하, 근본도 없는 놈이 천박한 말만 골라서 하는군.”
“당신에게 그런 하찮은 취급을 받으면서도 녹시아 님이 아직도 자신을 좋아한다고 생각합니까?”
“입을 함부로 놀리지 말아라. 녹시아와 나 사이에는 네놈이 모르는 신뢰와 추억이 있다. 자, 녹시아 어서 이쪽으로 오시오.”
카미앙의 말에 크로버가 얼른 내 손을 잡았다.
“녹시아 님은 저와 함께 가실 겁니다.”
“너와 함께 간다고? 그럼 녹시아가 있어야 할 곳이 감옥이란 말이냐?”
꼭 초등학생 말싸움 같은 대화가 이어졌다. 그나마 다행인 건 질투에 눈이 먼 카미앙이 크로버가 제 형이라는 걸 알아보지 못한다는 거였다.
‘하긴 죽은 사람이라고 생각할 테니…. 잠깐만, 카미앙이 지금 질투를 하고 있다고?’
그래 질투였다. 이 유치한 말장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이유는 카미앙이 나와 크로버 사이를 질투하기 때문이었다.
‘질투, 질투라.’
어쩌면 이건 둘도 없는 기회일지 몰랐다. 카미앙이 노골적으로 질투를 하는 지금이야말로 그를 후회하게 할 절호의 기회였다.
“내 약혼녀에게서 당장 손을 떼거라.”
“아니지, 우리가 이래 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결정은 어차피 녹시아 님이 하실 텐데요. 녹시아 님, 어느 쪽을 선택하시겠습니까?”
크로버가 잡고 있던 손을 놓으며 내게 물었다. 당연히 내가 다시 제 손을 잡을 거라 여기는 듯했다.
평소 같으면 당연히 그랬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카미앙이 나타났다고 해서 다른 여자를 꼬시던 크로버의 모습을 잊었을 리 없었다.
“흐음….”
내가 고민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자 크로버의 눈이 순식간에 휘둥그레졌다. 보기 드물게 당황한 표정이었다.
“지, 지금 고민하시는 겁니까?”
“녹시아, 저 녀석을 따라가면 감옥행이요!”
카미앙 저놈은 뭘 잘했다고 입을 놀리는지 모를 일이었다.
“가만들 좀 있어 봐요. 지금 좀 헷갈리니까. 내가 마음을 딱 정할 수 있게 어필을 해 보는 건 어때요?”
“어필이라니…. 제가 녹시아 님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말입니까?”
“아뇨, 그 반대에요. 어떤 점에서 내가 본인을 좋아한다고 생각하는지 얘기하는 거죠.”
“그게 무슨.”
크로버는 이상한 어필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내 목적을 모를 테니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었다. 지금 내게 필요한 건 두 사람의 구애 따위가 아니었다.
나와 크로버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카미앙에게 제대로 알려 주고 질투심이 절정에 다다른 순간순간에 그를 뻥 차버릴 계획이었다.
크로버가 망연자실하게 서 있는 사이 카미앙이 선수를 쳤다.
“녹시아, 그대는 나를 위해 아나드 적장의 목을 베지 않았소? 그 험준하고 위험한 곳에 정예병 몇 명만을 데리고 말이오. 이거야말로 당신이 날 목숨보다 더 사랑한다는 증거가 아니겠소?”
자신 있다는 듯 의기양양한 목소리였다. 카미앙이라면 자신의 승리를 확신하고 있을 게 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