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
‘어떻게 크로버를 잊을 수가 있냐고!’
무슨 일이 있어도 나만은 크로버를 기억하겠다고 다짐한 지 불과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았다.
‘이건 다 환상이야. 환상이라고!’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카미앙과의 달콤한 환상에 젖어 크로버를 완전히 잊고 있었다는 게 미안했다. 미안하고 자존심 상했다.
‘카미앙 따위가 뭐라고! 저런 놈 열 트럭을 가져와도 소용없으니 크로버를 돌려줘!’
눈앞을 어른거리는 어둠이 점점 옅어져 갔다. 눈을 뜨고 싶은데 그게 마음대로 되질 않았다. 눈꺼풀이 천근만근인 양 눈을 짓누르고 있었다.
“제 목소리가 들립니까?”
나를 깨우려는 말소리가 들렸다.
‘어쩐지 이 상황 익숙한데.’
귓가에 어른거리는 목소리, 좀처럼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 몸뚱어리.
‘이거…. 설마?!’
아까와 똑같았다. 크로버가 없는 그 환상 속에서 빠져나왔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고 또다시 반복되는 건가? 좀체 깨어날 수 없는 환상에 빠져버린 걸지도 몰랐다.
‘아직까진 크로버가 생각나는데 또 이러다가 점점 그를 잊어가고….’
안된다. 그런 바보 같은 짓을 되풀이할 수 없었다. 어떻게든 이 몹쓸 환상에서 깨어나야 했다.
“카미앙 같은 거 필요 없어! 크로버를 돌려달라고!”
난 있는 힘을 다해 몸을 일으키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성공이었다. 시야가 밝아지며 녹색 정원이 눈에 들어왔다.
“깨어나셨군요! 얼마나 걱정했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그보다 더 가까운 곳에 안도의 숨을 내쉬는 크로버가 있었다.
“좀 전에 하셨던 말은 정말 감동적이었습니다. 감히 누가 절 녹시아 님에게서 뺏어 갔길래 돌려 달라고 하신 건진 모르겠지만.”
가만히 손을 뻗어 그의 뺨에 얼굴을 가져다 댔다. 어쩐지 보고 듣는 것만으로는 그의 존재를 인식하기 부족하다는 기분이 들었다. 크로버는 가만히 자신의 얼굴을 맡겼다.
“당신이 없었어.”
“여기 이렇게 있지 않습니까.”
“그냥 없는 게 아니라 당신의 존재조차 기억하지 못했어.”
“나쁜 꿈이었을 뿐입니다.”
“내겐 잠깐의 나쁜 꿈이었을 뿐이지만 당신에겐 평생이었잖아요?”
내 손을 어루만지던 크로버의 손이 움직임을 멈췄다.
“잊어버리는 것도 이렇게 괴로운데 잊혀진 사람의 마음은 어땠을지 감히 상상조차 못 하겠네요.”
붉은 눈동자가 그걸 어떻게 아느냐는 듯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다 알게 됐거든요. 당신에 대해, 카미앙에 대해. 그리고 라암이란 존재에 대해.”
크로버는 잠시 놀란 것처럼 굳었다. 몇 번이나 달싹거리던 입술이 겨우 말을 흘려보냈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진실을 알아줄 사람을….”
그의 눈동자가 일렁이는 걸 보자 괜히 나까지 코끝이 찡해졌다. 그러나 나까지 눈물을 보일 순 없었기에 얼른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뭔가 분위기를 바꿔야겠다는 생각에 일부러 더 수다스럽게 꿈에서 겪은 일을 이야기했다.
“카미앙이 어찌나 상냥하고 진실한 남자던지. 그래서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니까요. 당신 이름은 떠올리지 못했어도 내게 이런 말을 했던 사람이 있었는데 하면서….”
순간 단단한 두 팔이 나를 껴안았다. 내 어깨 위에 그의 흐느끼는 숨결이 내려앉았다. 그는 신을 갈망하는 인간처럼, 엄마의 품에서 떨어지지 않으려는 아이처럼 날 꽉 붙잡았다.
“계속 말해주십시오.”
이런 말이 그에게 위로가 될지 알 수 없었지만, 그저 크로버의 요구대로 이야기를 이어갔다. 밝은 톤을 유지하기 위해 애를 쓰면서.
“한 번도 가본 적 없던 연인의 분수를 알고 있었어요. 심지어 신관이 납치당했다는 소문에 내가 신관을 구했었는데 하고 생각했다니까요.”
“그래도 용케 절 기억 해내셨네요.”
크로버의 목소리에서 물기가 묻어났다.
“당신이 선물을 줬잖아요. 정말 길을 알려주던걸요.”
나는 팔을 뻗어 그의 머리에 가져갔다.
“수고했어요. 아무도 당신을 기억하지 못하는 세상에서 여기까지 오느라 힘들었죠?”
크로버의 어깨가 떨렸다. 달래주려 머리를 쓰다듬어 봤지만 떨림은 되려 더 커졌다.
“그래, 후련해질 때까지 울어요.”
어쩌면 크로버는 십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아무에게도 위로받지 못한 채 혼자 눈물을 삼켰을지 모른다. 그가 맘껏 울 수 있도록 내버려 두고 싶었다. 내버려 두고 싶었는데 못다 끝낸 퀘스트가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여긴 내가 있던 곳이 아닌데?’
분명 내가 정신을 잃었던 곳엔 저 조각상이 없었다. 내가 크로버를 만났을 때 시스템에 대한 힌트를 주었던 그 조각상 말이다.
“왜 그렇게 두리번거리십니까?”
크로버가 잠긴 목소리로 물어왔다.
“제가 쓰러졌던 곳이 여긴가 싶어서….”
“그거라면 제가 이리로 모셔왔습니다.”
어느 정도 진정이 된 건지 크로버가 붉어진 눈시울을 훔쳤다. 눈물을 보인 게 이제야 부끄럽기라도 한지 내게 눈을 맞추지 못했다.
“정원 입구 쪽에 환각제가 잔뜩 뿌려져 있더군요. 사람들의 눈을 피하려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여기로 와버렸습니다.”
정원 입구에 쪼그리고 앉아있던 마룬시에가 떠올랐다.
“어쩐지…. 마룬시에가 여기다 향수를 뿌렸다고 했거든요. 향수가 아니라 환각제였군요.”
“왕궁의 정원에 환각제라니. 아무리 바이난의 공녀라 해도 이건 도를 넘는 짓인 것 같습니다. 단독적인 행동이라고 보긴 어려운데요.”
“카미앙이 뭔가를 꾸민 게 아닐까요.”
“그렇다면 괜한 일에 휘말리기 전에 빨리 여기서 빠져나가야겠군요.”
“잠시만요.”
아직 여기서 해야 할 일이 남아있었다.
“아주 잠깐이면 돼요.”
나는 검을 꺼내 다시 장미 줄기를 잘라내기 시작했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날 바라보는 크로버의 얼굴 위로 세피아 빛이 드리워졌다.
‘됐다! 퀘스트에 성공했어.’
마지막 과제였다. 이번엔 어떤 진실이 기다리고 있을지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신관복을 입은 사내가 이쪽을 향해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한발 한발 툭툭 내던지듯 내딛는 발걸음, 그에 맞춰 가볍게 좌우로 흔들리는 어깨. 머리부터 발끝까지를 전부 가리고 있었지만, 크로버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날 무심히 스쳐 지나가는 크로버를 따라 시선을 돌리자 이번엔 웬 여인이 눈에 들어왔다. 위로 틀어 올린 붉은 머리카락, 나비의 날갯짓처럼 우아한 몸짓.
“어머나, 신관님을 여기서 다 뵙네요.”
귀족 특유의 억양이 도드라지는 말투. 루티시나였다.
‘왜 루티시나가 여기에….’
크로버가 루티시나에게 인사를 건넸다. 두 사람이 따로 만난 적이 있었던가? 이런 외진 곳에서 따로 약속하고 만날 만큼 친밀한 관계였던가?
“마침 기도가 필요했는데 정말 잘 됐군요.”
친숙한 대사가 묘하게 신경 쓰였다. 하지만 그보다 더 신경 쓰이는 건 루티시나의 모습이었다. 과거의 그녀라고 하기에는 지금과 크게 다를 게 없어 보였다. 누가 봐도 카미앙이 어렸을 때라는 걸 알 수 있었던 첫 번째와 두 번째 재현과는 사뭇 달랐다.
‘일 년 정도밖에 안 된 일이라면 그럴 수도 있겠지만.’
그때 어디선가 한 줄기 바람이 불어왔다. 크로버의 후드가 휙 제쳐졌다.
“혹시 제 얼굴을 보셨습니까?”
이 대사 역시 익숙했다. 분명 나도 크로버가 저렇게 말하는 걸 들은 적이 있었다. 이번 재현은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듦과 동시에 눈앞이 새하얘졌다.
‘뭐야, 벌써 끝나는 거야?’
이러면 곤란했다. 난 이번 재현에서 아직 아무런 힌트도 발견하지 못했단 말이다. 내가 시스템을 외치는 사이 시야가 세피아 빛으로 돌아왔다.
다행히 끝이 아니었다. 무의식적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리자 또다시 신관 복장을 한 사내를 발견할 수 있었다.
한 발 한 발 무게를 실어 움직이는 덕에 어쩐지 리듬감이 느껴지는 발걸음, 그에 맞춰보기 좋게 흔들리는 옷자락. 이번에도 크로버였다.
그는 다시 한번 내 곁을 무심히 스치고 지나갔다. 곧 뒤쪽에서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의외네요. 신관님을 이런 곳에서 만나다니.”
매력적인 저음에 약간은 느릿느릿한 목소리. 루티시나는 아니었지만 역시나 내가 아는 사람이었다.
‘라라벨이 어떻게 여기 있는 거지?’
루티시나는 그렇다고 쳐도 라라벨이 장미 정원에 온 적이 있던가? 그녀의 신분으로는 궁을 드나들기 어려웠다. 여기까지 왔다면 그건 카미앙을 만나기 위해서지 결코 크로버를 만나진 않았을 것 같았다.
“신관님의 기도가 필요한데. 좀 도와주시겠어요?”
라라벨은 루티시나와 같은 말을 했다. 그리고 내가 신성력의 존재를 알게 되었을 때 크로버에게 했던 말이기도 했다.
‘뭔가 이상해.’
예정되어있다는 듯 또다시 바람이 불어왔다. 그리고는 눈을 뜰 수 없을 정도로 주변이 밝아졌다가 세피아 색으로 돌아왔다. 이제야 이 상황이 무언지 짐작이 갔다.
과거가 반복적으로 재현되고 있었다.
배경은 장미 정원, 시간은 내가 처음 크로버를 만났을 때. 아니지, 나를 기준으로 하면 안 된다. 배경과 크로버는 동일한데 바뀌는 것은 나라는 존재였다.
첫 번째는 나 대신 루티시나가, 두 번째는 라라벨이 등장했다. 크로버를 기준으로 생각하는 편이 옳았다.
‘크로버와 공략 캐릭터 중 한 명이 만날 때가 반복해서 나타난다는 건가?’
아무래도 내 예상이 맞는 것 같았다. 헤슬루가 나타나 크로버와 인사를 나누는 걸 보니 말이다.
“신관님! 기도 좀 해주세요!”
헤슬루의 입에서 저 말이 나왔으니 곧 바람이 불어올 타이밍이었다.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이번엔 크로버의 얼굴을 제대로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후드가 벗겨진 것을 당황스러워하며 크로버가 제 얼굴을 봤냐고 물어봤던 게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난 그 당시에는 이성의 얼굴은 전부 오징어로 보였던지라 아무것도 보질 못했다.
‘그때 만일 진짜 크로버의 얼굴을 봤더라면. 그랬더라면 크로버의 비밀을 좀 더 빨리 알아챌 수 있었을까?’
후드가 벗겨지고 크로버의 얼굴이 드러났다. 크게 뜬 두 눈을 그 얼굴에 고정했다. 검은 머리카락이 휘날리는 사이로 회색 눈망울이 비쳤다.
‘검은 머리에 회색 눈동자…. 검은 머리에 회색 눈동자? 이건 그냥 평소와 똑같은 크로버잖아?’
크로버가 크로버의 얼굴을 하고 있는 건 당연한 일이지만 내가 기대한 건 이 모습이 아니었다. 원래 모습인 백금발에 붉은 눈동자를 하고 있을 거라 생각했었다. 그랬기에 본 모습을 들켰나 걱정이 되어 물어본 거라 여겼다.
“제 얼굴을 보셨습니까?”
바로 저 질문을 말이다.
‘그것도 아니면서 대체 저런 건 왜 물어본 거지?’
엄청난 이유가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괜히 실망스러웠다.
크로버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이는 헤슬루의 귀 끝이 살짝 붉어져 있었다. 저렇게 얼굴을 보여줘봤자 상대를 꼬시는 것 외엔 별다른 효과가 없는 것 같았….
‘?!’
크로버가 원했던 효과가 바로 이거였나 하는 생각이 퍼뜩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잘난 외모로 공략 캐릭터를 꼬시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