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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렘 게임의 공략캐가 되었다-86화 (86/95)

86.

“이 시간에 여긴 웬일이죠?”

나는 카미앙을 돌아보며 물었다.

“웬일이긴, 그대가 방은 마음에 드는지, 불편한 건 없는지 확인하러 왔지.”

“일이 많아서 바쁠 거라고 들었는데….”

누가 그런 말을 했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아무튼, 왕궁으로 돌아온 카미앙은 바쁠 터였다. 어찌나 바쁜지 제대로 얼굴을 볼 틈도 없을 거라 했다.

“아무리 바쁘다고 해도 그대 만날 시간이 없겠소? 잠을 쪼개서 자고 식사를 거르는 한이 있더라도 그대 얼굴은 봐야지.”

카미앙이 내 머리카락을 쓸어넘겼다.

“그대의 연둣빛 머리카락은 여기서도 싱그럽게 빛나는군.”

그가 처음으로 아름답다는 수식어를 붙였던 게 바로 이 머리카락이었다. 물론 그 이후로도 눈동자가 아름답다는 둥 손가락이 아름답다는 식으로 수식어를 남발했지만 역시 처음 들었던 말이 가장 강렬하게 다가오는 법이었다.

난 살짝 몸을 돌리며 카미앙의 손길을 밀어냈다. 왜 이런 변덕을 부리는 건지는 나도 알 수가 없었다. 분명 카미앙과 꽤 괜찮은 분위기였는데 말이다.

“루티시나는 안 만나시나요?”

“루티시나라니?”

카미앙이 누군지 전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바르하르트 영애요.”

“아, 그러고 보니 베르만에게 여동생이 있다고 했지.”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살짝 미간을 찌푸린 게 카미앙은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것 같았다.

“베르만의 여동생이 서기관으로 지원이라도 했소?”

“아뇨.”

“그럼…. 바르하르트 가문을 대표해 내게 건의할 사항이 있다고 했었나?”

“아닐걸요.”

카미앙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것도 아니라면 대체 내가 왜 바르하르트 영애를 만나야 하는지 모르겠군.”

그렇다. 내가 이상했다. 카미앙이 왜 루티시나를 만날 거라고 생각했지?

“그냥…. 왕세자님이시니 귀족 영애들과 만남도 중요하지 않을까 하여….”

“녹시아.”

돌연 카미앙의 목소리가 심각해졌다. 그가 양손으로 부드럽게 내 뺨을 감싸며 눈을 마주쳤다.

“누구에게 어떤 말을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내게 여인은 오직 그대 한 명뿐이오. 다른 여인은 그저 돌멩이…. 아니, 그보다 더한 오징어로 보일 뿐이니 다신 그런 말 마시오.”

그의 다정한 말에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마음 한편에는 불안과 의심이 자리 잡고 있었다.

‘대체 왜?’

더할 나위 없이 만족스러운 상황이었다. 카미앙은 오직 나만을 바라보고 세상 모두가 날 카미앙의 약혼녀로, 아나드의 영웅으로 존중해 주었다. 그런데 위화감이 느껴졌다.

이 현실이 진짜가 아닌 것만 같았다.

***

“겨우 성에서 벗어났군. 신관이 납치되었다고 해서 우리까지 돌아다니지 못할 게 뭐 있겠소. 다들 걱정이 지나치다니까. 하마터면 지키지도 못할 약속을 한 왕세자가 될 뻔했소.”

흔들리는 마차 안에서 카미앙은 칭찬이라도 해달라는 듯 주절거렸다. 그는 바렌시드에 가면 직접 도시를 안내해주겠다는 나와의 약속을 잊지 않았다. 하지만 그와 단둘만의 데이트를 하게 된 것 보다 신관의 소식에 더 관심이 갔다.

“신관이 납치되었다고요?”

“놀랄 건 없소. 이미 무사히 돌아온 모양이니.”

“당연히 그렇겠죠. 그 사람 제가….”

“제가?”

그다음에 무슨 말이 나올지 기대가 된다는 듯 카미앙이 날 빤히 바라보았다.

“제가….”

무의식적으로 제가 구해왔다는 말을 하려고 했다.

‘내가 구하긴 누굴 구했다고. 난 신관이 납치당한 것조차 모르고 있었는데?’

카미앙이 피식 웃으면서 내 손을 잡았다.

“자자, 여기서 내립시다. 저기 보이는 분수가 뭐냐면….”

“연인의 분수죠.”

“하하, 연인의 분수가 유명하긴 한가 보오. 파르미엔 영지까지 소문이 나다니.”

아니, 백작령까지 소문이 난 게 아니었다. 그러니까 난 누군가에게 저 분수에 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누가 이야기해 주었는지 떠올리려고 애쓰던 차에 가슴 언저리에서 무언가가 진동했다. 주위를 더듬어 보니 낯선 물건이 손에 잡혔다.

‘이게 뭐지? 붉은 펜던트의 목걸이?’

날 재촉하는 카미앙에게 난 장신구를 내밀어 보였다.

“혹시 이 목걸이 당신이 선물한 건가요?”

“그건 내가 그댈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니고 있던 물건이 아니오.”

“그때도 이걸 하고 있었다고요?”

“장난치지 말고 저쪽으로 가봅시다. 저기서 파는 젤라또가 그렇게 인기가 좋다고 하더군.”

정체 모를 목걸이부터 시작해서 오늘 데이트는 하나같이 다 이상했다. 레스토랑, 바렌시드 극장, 향수 샵…. 난 바렌시드엔 한 번도 와본 적이 없는데 카미앙과 함께 가는 곳마다 왔던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카미앙이 아닌…. 다른 남자와 말이지.’

다른 남자가 누구냐고 물으면 할 말이 없었다. 우스운 말이지만 그 사람이 누군지는 생각나지 않았다. 그저 내게 미소 짓던 얼굴, 짓궂은듯하면서도 다정한 말투만이 기억에 남아있었다.

“녹시아, 즐겁지 않으시오? 어째 온종일 다른 생각을 하는 것 같소.”

“아뇨, 아녜요. 아주 즐거워요. 여기 풍경이 너무 아름다워서 감상하고 있던 것뿐이에요.”

난 노를 젓고 있는 카미앙에게 한껏 밝게 웃어 보였다. 나를 위해 온전히 하루를 비우고, 데이트 코스를 짜고 이젠 노까지 젓고 있는 카미앙이었다.

‘왕세자이면서도 자신을 전혀 내세우지 않고 날 이렇게 배려해 주다니.’

다들 세상에 저런 남자는 없다고 했다. 바렌시드의 모든 영애가 하나같이 날 부러워했다. 저런 카미앙을 두고 있지도 않은 다른 남자를 생각하다니 양심의 가책마저 느껴졌다.

“노 젓는 게 힘들진 않으세요? 교대할까요?”

“교대라니! 그런 말 하지 마시오. 어찌 레이디에게 노를 젓게 할 수 있단 말이요.”

“그치만 당신 이젠 지친 것 같은데요? 무리하다간 손에 물집이 잡힐지도 모른다고요.”

“그대야말로 그 고운 손에 물집이라도….”

나는 무슨 소리냐는 듯 손바닥을 들어 보였다. 검을 잡는 손엔 굳은살이 훈장처럼 박여 있었다.

“얼른! 노를 이쪽으로 주세요.”

“아니, 그래도 그게 아니지.”

카미앙과 내가 실랑이를 벌이던 중에 종일 웅웅 거리던 목걸이가 톡 떨어졌다. 꼭 일부러 올려놓은 것처럼 배 난간 위에 말이다.

“움직이지 말아봐요!”

손을 뻗어 잡으려는 순간 배가 크게 흔들렸다. 목걸이는 내 눈앞에서 물속으로 퐁당 빠지고 말았다.

“녹시아? 지금 뭘 하려는 거요?”

“당신도 봤잖아요? 내 목걸이가 물에 빠졌다고요.”

“그래서, 설마 지금 그걸 찾으러 물속으로 들어가겠다는 거요?”

“당연하죠.”

카미앙이 제 눈앞에서 스스럼없이 드레스를 벗어 재끼는 날 움켜잡았다.

“녹시아, 장난이지?”

“제가 당신 앞에서 장난으로 옷을 벗겠어요?”

“잠깐만, 그럼 이건 어떨까? 내가 들어가서 찾아보지.”

날 달래려고 해본 말은 아니었는지 카미앙이 재킷을 벗었다. 하지만 수영 실력은 내가 그보다 훨씬 나았다. 게다가 다른 사람에게 목걸이를 맡기는 건 미덥지가 않았다.

“아뇨, 제가 직접 찾을 거예요.”

“왜 쓸데없는 고집을 부리지? 그깟 목걸이가 뭐라고.”

그깟 목걸이? 지금 그깟 목걸이라고 한 거야? 그게 얼마나 중요한 물건인데 감히 너 따위가…!

나도 모르게 그에게 험한 말을 할 뻔했다. 별것 아닌 한마디에 왜 이리도 화가 나는지 모를 일이었다.

“저게 얼마나 소중한 물건인지 알아요? 함부로 말하지 마세요!”

“좋소, 얼마나 대단한 물건이기에 내가 준 다이아몬드 목걸이 대신 저 구질구질한 걸 걸고 다니는지 나도 한번 들어봐야겠소.”

“저건….”

그러고 보니 저게 왜 소중한 물건이지? 소중한 물건이라고 당당히 외친 것 치고는 목걸이를 누구에게 받은 것인지, 언제 받은 것인지 전혀 생각이 나지 않았다.

‘당신이 길을 잃지 않도록 도와줄 겁니다.’

단지 이 말 만이 머리에서 뱅뱅 맴돌 뿐이었다.

“저건….”

“저 목걸이는 잊어버린 거로 치고 이참에….”

“저건 내가 길을 잃지 않도록 도와줄 목걸이라고요!”

난 카미앙의 손을 뿌리치고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추운 날씨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수영을 즐길만한 날씨도 아니었다. 눈을 부릅뜬 채로 열심히 팔과 다리를 움직였지만, 목걸이는 보이질 않았다.

한차례 자맥질을 하며 더 깊은 곳으로 내려갔다. 언뜻 카미앙의 외침이 들리는 것 같기도 했다.

‘아니야, 이건 카미앙의 목소리가 아니야.’

리듬감이 느껴지는 경쾌한 목소리였다.

「진짜 이유를 말씀드리자면,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할까요.」

「무슨 자신이요?」

「반드시 절 구하러 와주시고, 비밀도 지켜주실 거라는 자신.」

어려움에 부닥쳤을 때마다 예상했다는 듯 나타나던 목소리였다.

「모포는 이거 두 개뿐인가요?」

「그렇습니다.」

「두 명이 있을 걸 알았다면서요?」

「그러니까 두 개를 가져왔지요.」

종종 날 당황하게 만들기도 했지만, 결코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그렇게 말씀하시면 섭섭하네요. 전 지금 정말 기쁜데 말이죠.」

「뭐가 그렇게 좋으신데요?」

「당연히 이렇게 아름다운 분과 함께 춤을 추고 있어서죠. 오늘 녹시아 님을 본 순간 얼마나 놀란 줄 아십니까? 숨이 막혀서 하마터면 등장할 타이밍을 놓칠 뻔했습니다.」

「그런 말을 참 잘도 하시네요.」

「부끄러워하실 필요 없습니다. 진짜로 아름다우시니까요.」

카미앙이 아닌 다른 누군가가 내 곁에 있었다.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누군가가 분명 존재했다.

아래에서 붉은 빛줄기가 반짝였다. 더는 숨을 참기가 힘들었지만, 꾸역꾸역 호수 밑바닥으로 몸을 움직였다.

「당신을 왕세자에게서 떨어뜨릴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습니다.」

「내가 카미앙에게서 멀어지면 당신이 얻는 이득이 뭔데요? 바르하르트 가문이 당신이 대신관이 될 수 있도록 힘이라도 써준다고 하던가요?」

「당신이 왕세자님의 주위를 맴도는 게 싫었습니다.」

이제 한계였다. 콧속으로 입속으로 차가운 물이 꾸역꾸역 들어왔다. 억지로 손을 뻗어내 붉은 보석에 닿은 순간 그 이름이 떠올랐다.

‘크로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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