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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렘 게임의 공략캐가 되었다-85화 (85/95)
  • 85.

    예상치 못한 내 대답에 카미앙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당황한 것처럼 보이기도 했고 약간은 억울한 것 같기도, 혹은 슬픈 것 같기도 했다.

    “내게 왜 그대에게 거짓말을 하겠소.”

    자신의 말이 진실이라는 것을 증명하겠다는 듯 카미앙은 베르만을 돌아보았다.

    “왕궁에 서신을 넣으시오. 파르미엔 백작가의 녹시아 영애와 이미 약혼을 했으니 바렌시드로 돌아가면 곧바로 식을 올릴 수 있도록 준비해달라고 말이오.”

    함부로 카미앙의 약혼녀라 떠들어 대서는 안 됐다. 남들 앞에선 카미앙이 여느 기사와 같이 대하는 것도 다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에선 카미앙과의 관계를 모두에게 인정받고 싶었다.

    “하지만 왕세자님, 그건 왕실 어른들의 허락을 받은 후에….”

    “토벌전의 영웅인 파르미엔 영애요. 그녀의 실력과 성품이 얼마나 출중한지는 여기 있는 모두가 증인이 되어 줄 것이오. 왕가에 대한 파르미엔가의 충성심이라면 이미 넘치도록 받고도 남았소. 어느 누가 이 약혼을 반대하겠소?”

    분명 내가 가장 듣고 싶었던 말이었는데 기분이 묘했다. 너무 행복해서 되려 현실감을 느끼지 못하는 걸까?

    ‘꿈이다. 이건 꿈이야.’

    이게 현실일 리 없었다고 생각했지만, 며칠 후 꿈이 아님을 똑똑히 알게 되었다.

    “파르미엔 기사님 만세!”

    “저분이 아나드 토벌전의 영웅이시라네.”

    “여기사라니, 보기 드문 일이군. 실력이 보통이 아니라던데.”

    난 카미앙과 나란히 개선 행렬의 가장 앞에 서 있었다. 이 개선식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나, 파르미엔 드 녹시아였다.

    사람들은 내게 환호하고 있었다. 모두 내가 아나드 전쟁에서 세운 공을 알고 있었다. 어린애들이 파르미엔 기사가 아나드 수장을 무찌르는 장면을 따라 한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저런 분이 장차 왕비가 되신다면 든든한 일이지.”

    “너무 낭만적이지 않아요? 왕세자님과 그 수호기사의 사랑이라니.”

    뿐만 아니라 나와 카미앙의 약혼 소식 역시 이미 널리 퍼져 있었다. 음유시인은 왕세자와 수호기사의 이야기로 로망스를 지어 부른다고 했다.

    난 그렇게 모든 영광을 한몸에 받으며 바렌시드에 입성했다. 장차 왕비가 되실 분이라며 두 명의 시녀와 세 명의 하녀가 내게 배속되었다. 파르미엔 영지에서도 받아본 적 없는 과한 보필이었기에 몇 번이나 사양했으나 카미앙은 절대 양보하지 않았다.

    내가 지낼 방 역시 더할 나위 없이 훌륭했다. 눈이 부실 정도로 새하얀 침구는 바라보기만 해도 포근함이 느껴졌다. 밝은색 나무로 맞춘 화장대와 테이블은 방에 따스한 분위기를 더해주었다.

    ‘다 좋아. 다 좋은데…. 어쩐지 현실감이….’

    “부족한 게 있다면 뭐든 이야기하시오.”

    새 보금자리를 멍하니 바라보는 내 곁에 어느새 카미앙이 와 있었다.

    ***

    “일찍부터 행차하셨군.”

    카미앙이 아직 잠이 덜 깬 얼굴로 마룬시에를 맞이했다.

    “내가 빨리 온 게 아니라 그쪽이 늦은 거겠지. 대체 어젯밤에 뭘 한 거야? 눈이 빨개.”

    어젯밤에 무얼 했냐면…. 집중을 하자 머리가 욱신거렸다. 카미앙은 관자놀이를 누르며 기억을 되짚었다.

    ‘녹시아가 내 침대에 걸터앉아 자장가까지 부르며 날 유혹했던 건 생각이 나는데…. 그다음은 도무지 생각이 안 나는군. 하필 그런 중요한 순간이….’

    의사 말로는 과음이라고 했다. 자신의 주량이 와인 두 잔을 가지고 과음이라 할 정도는 아니라는 걸 카미앙은 잘 알고 있었다.

    ‘이런저런 일로 피곤한 하루이긴 했지만….’

    자기 전까진 함께 있던 사람이 눈을 뜨고 나니 자리에 없는 것도 영 신경 쓰였다. 물론 시종들에게 그녀의 행방을 묻지는 않았다. 다 녹시아를 위한 배려였다. 루안을 인질로 잡고 있으니 녹시아가 자신의 손아귀를 벗어나진 않았을 거라는 계산도 있었다.

    “아무 말 못 하는 거 보니 정말 뭐가 있었긴 있었나 보네. 응?

    마룬시에가 어깨를 툭 치며 뭔지 알겠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있긴 뭐가 있어.”

    “나 아침 일찍 네 약혼녀가 궁에서 나오는 걸 봤다고.”

    “녹시아는 원래 궁에서 머물고 있었어. 바렌시드에 처음 왔을 때부터.”

    “에이, 지금 그 얘길 하자는 게 아니잖아? 근위기사 몇 명이 녹시아가 네 침실에서 나왔다고 말하는 것도 들었다고.”

    “어떤 불순한 생각을 하는지는 대충 짐작이 가는데 그만하지 그래? 아무 일도 없었으니까.”

    카미앙이 정색하자 마룬시에는 슬그머니 꼬리를 내렸다. 장난은 여기까지였다. 카미앙을 자극해 봤자 그녀에게 좋을 건 아무것도 없었다.

    “용건이 뭐야? 설마 그 쓸데없는 소리를 하러 온 건 아닐 테고.”

    “임무를 완수했다고 알리러 왔지. 이제 왕비님만 정원으로 오시면 돼.”

    “안 그래도 정원에서 긴히 드릴 말씀이 있다고 했으니 그리러 가실 거다.”

    카미앙이 게슴츠레한 눈으로 마룬시에를 쳐다보았다.

    “그 향이 진짜 효과가 있기는 해?”

    “최고급 환각제라고. 요즘 왕비가 이상하다고 해서 어렵게 구해온 거라고.”

    “그래, 그렇게라도 날 좀 좋아하게 되시면 좋겠군.”

    “아무리 신성력이 뛰어난 집안이라 해도 제 아들에게 거부감을 느끼다니. 보면 참 신기해.”

    카미앙은 마룬시에가 제 좋을 대로 지껄이게 내버려 두었다. 어차피 크로버의 일은 마룬시에조차 알지 못하는 사실이었다.

    “향이 효력을 발휘하려면 평온한 환경을 조성해야 하는 거 잊지 말라고.”

    “정원이 소란스러울 일이 뭐가 있겠어.”

    “그래, 그렇지. 그것보다 말이야.”

    마룬시에가 본론은 따로 있었다는 듯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말을 건넸다.

    “네 그 잘난 약혼녀 말이야, 향수 사건에 관여한 게 확실해.”

    “아, 그거라면 이미 알고 있어.”

    카미앙이 서류를 휙휙 넘기며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알고 있다고?”

    이건 마룬시에가 원한 반응이 아니었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놀람보단 억울함이 서려 있었다.

    ‘뭐야, 베갯머리에서 다 털어놓을 만한 일이었어? 그런 거였으면 내가 조무래기들 틈에서 그런 수모를 당하지 않아도 되는 거였잖아?’

    마룬시에는 카미앙에게 따지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며 차를 마셨다. 뜨거운 홍차가 목으로 넘어가니 되려 더 열이 나는 것 같았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할 거지? 약혼녀의 소행이니 모르는 척 넘어갈 건가? 설마 그런 건 아니지? 어차피 그 여자를 그렇게 좋아하는 것도 아니잖아?”

    “좋아해.”

    “풉.”

    아무리 입이 거칠다 해도 바이난 공국의 공녀로서 갈고닦은 예법이 있었다. 덕분에 마룬시에는 차를 입에서 뿜는 건 면할 수 있었다.

    “갑자기?”

    카미앙이 녹시아를 잃지 않으려 애쓰긴 했다. 하지만 그건 사랑이라기보단 제가 갖긴 싫고 남 주기는 아까운 물건을 놓지 못하는 것에 가까웠다. 그런 카미앙이 이렇게 솔직히 녹시아에 대한 애정을 드러낸 건 처음이었다.

    “갑자기가 아니야. 이제야 내 마음을 깨달은 것뿐이지. 게다가….”

    카미앙이 찻잔을 입으로 가져가며 뜸을 들였다. 하얀 김에 서려 있는 향을 음미하고는 찻잔을 뱅뱅 돌렸다. 그러다가 차를 한 모금 머금은 후에 다시 입을 열었다.

    “라암이 그녀를 선택했어.”

    이번엔 갈고닦은 예법도 소용없었다. 마룬시에는 들고 있던 찻잔을 그대로 떨어트리고 말았다.

    “무슨 뜻이야?”

    “라암의 음성이 그녀에게 내 반려가 될 거라 했다더군.”

    “거짓말.”

    마룬시에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내뱉었다.

    “그 여자가 라암을 알 리 없잖아?”

    “그러니 거짓말이 아니라는 거지. 라암의 존재조차 알 리 없는 사람이 라암이란 이름을 말하며 그의 음성을 들었다고 하니 말이야.”

    “말도 안 돼. 너 대신 라암의 메시지를 받는 건 나라고.”

    “잘 알고 있어. 계약자는 나, 대리인은 너.”

    계약의 대리인. 머리가 조금 굵어진 카미앙이 생각해 낸 방법이었다. 이교도의 신과 계약을 맺고는 바렌시드에서 제대로 살아갈 수 없었다. 특히나 신전에 자주 들릴 일이 있는 왕족은 더더욱 그러했다.

    ‘왕세자님, 혹시 최근에 사특한 존재가 왕세자님을 괴롭히고 있진 않습니까? 어쩌면 왕세자님의 아주 가까운 곳에 봉인된 이교도의 물건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카미앙을 만난 대신관의 첫마디였다. 라암과의 계약을 대신관에게 들킬지도 모른다는 위협을 느낀 카미앙은 바이난의 도움을 받기로 했다. 다양한 신을 믿고 있는 바이난 공국에선 라암도 여느 신 중 하나일 뿐이었다.

    물론 라암의 계약에 대해 전부 알려준 건 아니었다. 카미앙이 라암의 음성을 들을 수 있게 되었고 그가 힘을 주기로 약속했다 정도의 설명이면 충분했다. 공국의 입장에선 카미앙이 바이난에 어떤 이익을 줄 수 있는지가 더 중요했다.

    다행히 넓은 영토와 많은 인구를 가진 바렌시드는 공국에 줄 수 있는 게 많았다. 왕을 대신해 일부 행정을 맡게 된 카미앙은 바이난에 시장을 개방했으며 향료 길드의 권한을 넘겨주었다. 토벌전에서 손에 넣은 광산 중 몇 개는 바이난에 채굴권을 양도하기로 되어있었다.

    이 모든 것의 대가로 마룬시에는 카미앙의 대리인이 되었다. 카미앙은 이전처럼 라암의 목소리를 직접 들을 수는 없었지만 대신 그에게서 느껴지는 라암의 기운을 지울 수 있었다. 대신관 뿐만 아니라 그 어느 신관도 카미앙에게서 이교도의 존재를 느끼지 못했다.

    “난 라암에게서 그런 메시지를 받지 못했어.”

    “원래 라암은 과묵하시지.”

    그가 전하는 메시지라고는 재물을 요구하는 것과 재물에 만족한다는 것 정도밖에는 없었다. 늘 카미앙이 성실하게 그의 요구를 들어줬기 때문일진 모르겠지만 지금까진 그래왔다.

    “하지만 그렇게 중요한 일이라면 라암이 내게 메시지를 주시지 않았을까?”

    “그뿐만 아니라 라암께서는 우리의 의사를 존중하시지. 안 그래?”

    라암이 계약자인 자신을 옭아매며 마음대로 조종하려 드는 존재였다면 카미앙의 삶은 지옥이나 다름없었을 것이다.

    “어쨌든, 바렌시드인인 그 여자가 라암의 음성을 들었다는 건 이상해. 믿을 수 없다고!”

    “녹시아의 증언뿐만이 아니야. 라암의 보물이 녹시아에게 반응을 보였으니….”

    “아무래도 내가 바렌시드의 왕세자님께 선물을 준 것 같네.”

    마룬시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래도 못마땅하다는 듯 얼굴이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라암이 선택했다는 당신의 사랑이 장미 정원으로 들어갔거든요. 혹시 알아요? 크로버 따위는 까맣게 잊고 당신만 좋다고 할지. 아, 물론 환상에서 깨어났을 때 이야기지만요. 그 환각제, 뿌린 직후에는 너무 독해서 자칫하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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